/해태상사를 떠나면서 1...‘반장난삼아’, 나는 ‘동양그룹’의 임원공개모집에 지원하였다.
바야흐로,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그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한번 보지요?’
나는 년말이 되면, 해외공급자들을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 해의 사업을 정리하면서 다가오는 새해에 어떻게 대응해나갈지, 앞으로 해외공급지 시장이 어떻게 변화해갈지, 해외거래선들을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하고, 새해 사업계획을 미리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1994년 말.
수석부장 2년차.
숨가쁘게 돌아가던 정부의 입찰시계도 잠시 멈추는 듯 하였고, 우리 농산부도 갑자기 한가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할 겸, 태국 방콕으로 업무출장을 갔다. 특별한 사안은 없었지만, 그동안의 비즈니스를 정리해보고 태국의 공급자들과 앞으로 어떻게 사업을 펼칠지 ‘큰그림’을 한번 대강이나마 그려보고 싶어서였다.
특별히 해결해야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몸과 마음이 한결 편했다. 그리고 방콕은, 나에게는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 출장 때마다 언제나 편했다.
출장온지 며칠째였을까? 방콕지사에서 지사원들과 환담을 하고 있는데, 본사의 농산부 정차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뭐 특별한 것이 있을 수 없는데 무슨 전화일까 싶었는데, 예상밖으로 ‘그들이 어떻게 평가하나 한번 보지요?’ 하는 것이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했더니, 아무래도 ‘이사’승진은 물건너간 것 같으니, 차라리 ‘동양그룹’의 임원초대에 응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 유명조간신문에는 동양그룹이 해외창구로서, 종합상사 신설법인 ‘동양글로벌 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임원초빙’과 경력사원을 모집한다고 대대적인 광고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일언지하에 쓸데없는 소리하지말라하고 정차장의 전화를 끊었지만 자꾸 그 생각이 떠나지않았다.
‘임원’으로 승진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답답하기만한 해태그룹내 사정에 ‘나는 과연 어떻게 자리잡아야 하는가?’로 항상 고민해왔던 바였기 때문이다.
‘임원’이야 따놓은 당상, 언제되느냐만 남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별 걱정하지않았지만, 내가 ‘임원’이 되면, 그때 나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가 항상 걱정이었다.
사원으로서 부장일때는, 무슨 일이건 무슨 말이건 하고싶은대로 내뱉으면서 ‘자유분방’하게 회사생활해 왔지만, ‘임원’이 되는 순간, 그 ‘자유’를 잃어버릴 것이므로 과연 내가 ‘그 자유없는 임원’노릇을 할수 있을 것인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창업해서, 내 회사를 20여년간 운영해보니, 큰기업에서 자유없이도 ‘임원’노릇 잘 할 수 있었고, 조금만 더 참고 조금만 더 눈감았더라면, ‘사장’까지도 할 수 있었는데, 괜히 조바심내고 자격지심으로 미리 포기했구나, 조금 후회되기도 한다.)
방콕출장다녀와서, 년초가 되고 해태그룹 ‘임원’인사가 있었으며, 역시나 나는 ‘이사’승진이 이루어지지않았다.
수석부장2년차이고, 5년연속 흑자경영을 하였으니, 제1순위로 ‘이사’되기에 필요충분하였지만, 단 1%가 부족한 것이 모회사인 해태제과 기준으로, 나의 ‘이사’승진은 좀 빠르다는 것이었다. 나는 해태제과 기준을 들먹이며, 그 핑계로 ‘이사’승진을 시키지 않은 것에 대하여는, 큰 불만이 없었다.(해태상사는 모기업인 해태제과의 눈치를 보지않을 수 없었다.)
다만, 더 큰걱정은,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이사’가 된 후, 내가 어떻게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고민하였다.
사람 마음이란 것이 참 요상한 것이었다. ‘이사’승진에 대하여 아무런 느낌이 없다고 하면서도 막상 ‘이사’가 되지않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왔고, 동양그룹의 ‘임원초빙’광고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정차장이 농담삼아 이야기하였듯이 ‘한번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에 대하여 시장의 평가는 과연 어떠한지? 한번 찔러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묘한 감정이 있었다. ‘장난치다 혹시 애나 생기면 어떻게 할건데??’ 흔히들 농담으로 주로 하던 말이었다. 애가 생기면? 뭐 까짓껏 낳아서 기르면 되지뭐? 하는 복잡한, 복합적인 생각들이 드나들었다.)
(시저의 복잡한 속내가 그러할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란 것이 전혀 밑도 끝도 없이 나오는 즉흥적인 결행은 아닐 것 아닌가? 최전선 지휘관으로서 군권을 장악하였더니, 점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지고 숨어있던 ‘야망’이 스물스물 기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부하들이 따르고, 해외공급자들이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고, 또 객관적으로 ‘실적’이 뛰어나니, 재벌들..해태그룹의 비합리적 경영방침을 무조건 따르기가 쉽지않아지고,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들이 계속되니, 딴마음을 먹기 시작하는 것 아닐까? 이미 일선 지휘관으로서 책무를 벗어난, 새로운 역사를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동양그룹의 ‘임원초빙’에 대하여 응시해보기로 하였다. ‘장난삼아 놀았던 것인데 혹시 아이가 생기면 어떠나 하는 불안함(회사 몰래 타그룹의 임원초빙에 응하는 것이니 불안하였다)이 있었으나, 그러나, 그냥 한번 응시해보겠다는,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한번 보고싶다‘는 호기심이 또한 강하였다.
(나의 경력이 과연 다른 종합상사의 농산.식품사업본부장을 이끌고 갈 정도의 실력으로 평가해주고 인정해 줄 것인가? 한번 객관적인 평가를 받고 싶었다.)
(정차장을 비롯하여 농산부 직원들의 생각이 그러하였다. 내가 ‘이사’가 되지않은 것에 대하여, 모회사인 해태제과의 인사적체를 이해하면서도, 모두들 마음속이 못내 불편하였다. 열심히 일했고 또 성과도 있었으니, ‘인재발탁’도 해야하는 상황에 지금 존재하는 인재도 하나 대접해주지못하는 모그룹의 인사방침에 모두들 불만가득하던 차였다.)
나에 대한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농산.식품사업을 운영해나갈지에 대하여,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중.장기 사업계획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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