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5반 (6번); 반 6/63, 전체 30/501(우등상)................ .김정기선생님(영어)
2학년7반(10번); 반3/57, 전체 13/289(우등상)..................김영원선생님(화학)
3학년7반(24번); 반1/60, 전체 4/297(우등상, 3년우등상)....강태풍선생님(수학)/대의원=반장
/전체성적을 보면 알수 있듯이, 자취와 과외가정교서를 하면서도, 전체 500여명 중, 1년30등-2년13등-3년 4등을 하였으니 경이로운 학업성적을 거두었다. 보성시골촌놈의 놀라운 성적이었다.
/#고2때의 성적, 3/57에 대해서 보충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실제로는 1등, 전통적 평가방식(절대평가?)으로는 내가 1등이었다...내가 반3등인 것은, 그때당시 성적평가방법이 과목별 이수단위로 상대평가인가?를 하여 얻은 결과...총점수에 의한 다른평가=절대평가도 병행하였는데(비공식자료로?), 그 방식(전통적인 방식=다시 3학년때는 전통적 방식으로 하였다.)으로는 내가 반전체 1등이었다..
나는 과외활등으로 '흥사단학생아카데미'를 하였는데...거기서는 학업성적이 뛰어난자(반1등 버금)에게 '역행상'을 주는데..이 종합평가점수가 반영되어 받게 되었다. 그렇지않앗으면 3등이었으니 받지못하였을 터인데, 그 '역행상'을 받은 같은반, 김수0/신상0과 형평에 맞지않는다고 하여 나도 받게 되었는데...그 까닭은 과목별 이수단위 평가방법 차이로 비롯된 것이었다....
전체 289명중 13등이 어찌 변하였는지는 그때 나는 모른다...시시콜콜한 옛기억이 왜 이리 새록새록 떠오르는지...알수가 없다....
(이글을 쓰고있는 지금은=2019.1.14, 방금전 무엇을 했는지도 깜빡 잊어버리고 허걱거리는 데...참참참.)
(#총평한마디더; 3년동안, 자취를 하면서...고1때/고3때 입주가정교사과외를 하면서도...우수학생들이 모인 광주일고에서 3개년우등상을 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성적아니겠는가? 더군다나, 마지막 3학년때는 반에서 1등하고 이과전체4등을 하였다는 것은, 보성촌놈자취생으로서는, 큰상을 받을만 한 결과였다...
물론, 사회생활을 해봐서 알게 되엇지만, 학교공부를 잘 했다고 해서, 다른 세상살이를 또 잘하던가? 오히려 못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던가?
내가 골프를 배우고나서 알게 된 사실 하나.....'드라이버샷' 한번 잘쳤다고해서, 골프스코아가 좋던가? 학교공부 잘한 것은, 골프로 치면 '드라이버샷'한번 잘 친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너무 뻐기지 말 것이다. 내가 지금 학교공부 잘했다고 방방 뜨는데 그렇게 방방 뜰 일이 아니지 자중하시라 하하하.
마찬가지 논리로, 대학 다닐때 국가.사회문제에 대하여는 딱 눈감아버리고, 여학생과 데이트도 못해보고, 데모도 한번 해보지않고 법서만 달달외우고는, 어쩌다 고시 한번 붙어서 평생동안 지금 떵떵거리고 사는 높으신 분들도, '드라이버샷' 한번 잘친것이니, 너무 잘났다고 떵떵거리지말고, 귀하가 정말 잘나서 그리 된것 아니니, 이젠 사회환원도 하시고, 주변의 약자들 사정도 좀 챙겨보시라고들 허ㅓㅎ허
(나의 대학.사회생활은 좌충우돌, 언제나 주류들과의 투쟁의 연속이었다..나는 변방출신, 언제나 영원한 '비주류'였다.),
학교성적으로 치면 최상의 결과를 얻은 것이니..나의 부모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고3때로 거슬러가보면, 나는 학력고사 성적이 매월 몇계단씩 뛰어올랐다...급기야 여름방학무렵 이과전체1등이 되었다. 마라톤경주에서 막판 스퍼트를 하는 것과 비슷?)...나의 부모님은 내가 이런 성적을 낸 것을 아실까? 아마도 모르실 것..
만일, 내가 그때, 일반적으로, 성적에 따라, 비인기대학인 '농대'를 가지앟고, 인기대학인 '법상대'나 '의대'를 갔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은 운명이었다. 이미 정해진 운명에 따라, 내가 그렇게 선택해서 간 것이었다...그렇지않고는, 지금의 내 생활, '대평원' 창업으로 이어진 '독특한' 나의 생활을 설명할 수가 없다. 지금의 내 생활을 누가 '냉대'할 것이며, 이 당당하고 떳떳하고 유유자적 가득한 내생활이 '고시' 할아버지를 한 사람의 것보다 천배만배 가치있지 않을까? 더 부러울 것이 없으니 굳이 옛날 고3으로 돌아갈 필요도 없을 것이라.)
내가 이렇게 시시콜콜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큰아이가 울면서..''아빠는 왜 그런 대학을 다녔느냐?'고 물었으니...다른사람들이 오해하고 '냉대'하느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우리 아이들/우리 손자들/우리며느리들이 똑같이 '오해'해서는(=공부를 잘 하지못해서 '농대'에 간 것이 아니었다는 보충설명) 안되기때문으로..그렇다면, 또 역설적으로..이렇게 이야기하다보니...우리사회 '학벌'의 병폐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지않은가...나말고도 수많은 '농대출신들' 수많은 '일류학교출신이 아닌 사람들' 얼마나 마음고통이 심할까..새삼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조금이라도 '변명'이 될수 있을까 이 기록을 남긴다.2019.1.14.치앙마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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