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상사(주)에서(1980-1995)

프랑스 회사, General Societe '미선적, 계약위약금 받아내기', 에펠탑도 보지못하고 빈손으로..

햄릿.데미안.조르바 2019. 1. 8. 13:04

//프랑스 회사, General Societe '미선적, 계약위약금 받아내기', 에펠탑도 보지못하고 빈손으로../다음은 프랑스 회사, General Societe

 

소주제조 주정용으로 베트남 타피오카칩도 공급한 실적이 있었다.

의외였다. Peter Cremer가 한국의 사료곡물사업에 뛰어든 것처럼, 프랑스의 General Sociate 가 대한주류공업협회의 소주제조용 주정생산하는 타피오카칩 계약을 하였다는 것이, 생각지 않은 일이었다.

상당부분, 김차장과 신대리의 활약이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중국공급선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비교우위에 있던 국내 곡물.농산물 시장에, 독일과 프랑스의 유력공급선과 제휴하고 국내시장 지배력을 늘렸다는 데, 그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던 것.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계약과 관련한 클레임(미선적 및 조출료미정산등)이 미결상태였다.

비록 실수요자(형식상 바이어)인 대한주류공업협회 회원사들이, 국내소주업체들이다 보니, 해외무역거래에 어두웠고, 모든일은 수입대행업자인 우리 해태상사를 통하여 해결하였으므로, 그들이 자세한 클레임 내용을 알리 없었다.

그러나, Peter Cremer에서 보듯이, ‘자존심’의 문제가 나에게는 있었다.

선적이행후 조출료등 클레임은 당연한 일이고, 무엇보다도 계약미행하고도 이에대한 벌금Penalties를 클레임하지 않는 것은, ‘나는 바보입니다’라고 국제적으로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런 경우, 나는 분연히 손들고 일어나선다. 불의를 보고는 참지못하는데 하물며, 해외거래선에게 왜 아무 클레임도 제기하지 않고 그냥 없었던 것으로 해야 하느냐? 나는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

아무리 바쁘고 당장 해야할 일이 차고 넘친다해도, 프랑스 General Societe에게 한국에는 ‘해태상사’라는 줏대있는 상사조직이 있음을 알려야했다.

 

자초지종, 그간의 경위를 요약하여 유영0부회장에게 보고하고 파리를 며칠 다녀오겠다 하였더니, 그는 두말하지않고 결재해주었다.

(내가 농산팀장이 되고 얼마나 지났을까? 3개월? 해태그룹 박회장은, 동생인 박사장을 퇴진시키고, 사실 그동안 박사장의 경영능력에 대하여 그룹사내에서는 말들이 많았다. 특히 텔런트누구와의 찌라시등으로 코네에 몰려있었다..와중에도 나를 끝내 내치지않았던 것은 불행중다행..// 그동안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고문자격으로 물러나있던 유영0부회장을 전격적으로 해태상사 대표이사에 그를 보내, 흐트러진 해태상사의 조직을 추스르게 하였다...유부회장은 내가 방콕지사장으로 나갈 때, 부사장이었는데...곧 사장이 되어 해태상사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L.A에서 오너의 실제 박사장이 부임하자,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고문자격으로 있었던 것...해태그룹의 창업주, 박병규회장이 전문경영인으로 초빙한, 나웅배 전재무장관의 서울대상대 동기여서, 해태그룹에서는 정.재계 다방면에 걸친 그의 능력을 높이 샀던 것.

여기서또 질문, 박사장이 나를 농산팀장까지 맡겨놓고, 어느날 갑자기 물러나고, 그 자리를 나를 이해해주는, 유부회장이 오신 것은, 누구의 연출일까? 나의 자유의지가 하나도 개입되지 않았는데 이는 누가 만든 작품일까? 알듯 모를듯, 세상은 요지경속? 그래 지구는 언제나 돈다. 나를 중심으로 돈다는 생각을 하는 자에게는 언제나 그렇게 '돌고 또 돌아온다')

 

(나에게는 유부회장의 재등판은 천군만마를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제는 박사장과의 관계가 나쁘지않게 정리되었다해도 그래도 옛묵은 감정은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었으니, 결코 편한 관계는 아니었는데, 나를 잘알고 특히 나의 특이한 성격을 잘 알고, 또 일에 대한 나의 능력과 열성을 이미 파악하고 있는 그의 재등판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해외출장에 대하여 상당히 까다로운 그였지만, 나의 파리출장에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그; 소신껏 주장.요구하고 오너라. 돈은 받지못해도, 우리 해태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와 하셨다...너무 애쓰지말고 그냥 에펠탑 구경한다 셈치고 가볍게 다녀와 하시었다. 해외사업에 백전노장인 그는 이미 프랑스회사에게서 클레임금액을 받아낸 다는 것이 ‘가능성제로’임을 이미 짚고 있었다?)

 

나; 에팰탑 구경 잘하고 오겠슴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한번 부딪쳐보겠습니다 하고, 파리출장길에 올랐다.

 

그들은 나의 이야기를 모두 잘 들어주고...그러나 ‘잘 해결해드리겠다’는 의사표시는 어디에도, 한마디도 없었다.

베트남계 여성부장이 담당이었는데, 미소지으며 나의 클레임주장을 존중해주었을뿐, 지급보증은 없었다.(여성부장 윗사람은 맨처음 명함 주고받으며, 인사한 뒤로는 코빼기도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네 외국손님 대접하고는 하늘과땅차이였다...과공은 비례가 맞았다. 우리도 그리 해야...그런데 우린 너나할것없이 코쟁이 외국손님에게는 언제나 ‘과공’이었다.)

왜냐하면 계약서에는 미이행하거나 조출료등 클레임이 발생할 경우, 공급자는 이에 대한 책임을 부담한다는 명문규정이 있긴 해도, 이의 이해을 강제할 어떤 ‘장치’가 없었던 것.

(대형계약의 경우, 이런 경우를 예비하여, 이행보증을 강제하는 은행의 제3자보증서를 사전에 징구하지만, 보통 계약체결에 우선 매달리다보면 소홀하게 다루게 되고, 특히 한두번 계약에 서로 친해지게 되면, 처음부터 아예 잊어버리곤 하는, ‘문제조항’...우리 한국상사들의 약점이었다. 아니 뭐 그리 사소한 것까지 따지느냐, 통크게 밀고 나가야지 언제 그런 문제까지 계약서에 넣으면서 해외거래를 하느냐,쫌생이처럼...우린 ‘통크게’에 익숙해져있다. 따지면, 금방 ‘쫌생이’가 되어 이상한놈으로 취급당하기 일쑤인 그런 사회에 살고 있었다.)

 

어찌 할 수가 없었다.

해외상사중재 클레임하여 국제상사분쟁으로 끌고 가는 길은 열려있었지만, 배꼽이 배보다 훨씬 클뿐더러, 해태상사의 능력으로는 그들 국제상사분쟁이 이골이 나있는 그들을 이긴다는 것은 정말 바위에 달걀던지기였다. 더 이상 진전없이 클레임 포기해야 하였다.

 

얻은 것은, 유부회장말씀대로, 한 일주일 푹쉬고 파리냄새 맡고 온 것이 전부.

나는 빈손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유부회장은 내 뭐랬느냐는 듯이 빙그레 웃으면서 ‘수고했다. 잊어버리고...다른 일에 집중하라’ 하시었다.

(여인은 자기를 알아주는 남자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사내는 자기를 알아주는 상사에게 목숨을 바친다 하였는가?

그런 것을 떠나서, 나는 천성이 물불가리지 않는 몰입형이었다. 일에 살고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 ‘일통뼈’였다.)

 

상사직원 모두가 한번쯤 가보고 싶은 곳, 프랑스 파리.

나는 그 파리를 클레임도 받지못하고 씁쓸하게 다녀왔다.

(...파리에 가면 모두들 에펠탑 구경은 필수 그러나 난 그 모두가 하는 에펠탑에 인사도 못하고 귀국하게 되었으니, 이또한 '기네스북'에 오를 사안 아닐까? 하루쯤 아니 반나절만이라도 짬을 냈다면 에펠탑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었을 것이었지만, 그런일에는 전혀 용의주도하지못하고, 공적인 출장에 사적용무는 금물이라는 '결벽증'까지 겹쳐있는지라...가희 '기네스북'감이 될만하지 않을까싶다 하핳)

(내 상사생활중 몇 안되는 판정패 스토리...그래도 홀가분하였다. 클레임이라도 쳐놓고 봐야지, 쳐놓고 선적미이행=계약위반했으니 패널티 부담해야한다고 주장하여야지, 그냥 아무말 하지않고 ‘나는 국제바보로소이다’ 할수는 없잖은가?)

클레임친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