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생활 3년 ‘유감’, 1986-1989년, 내 나이 35-38세..사면초가, 좌충우돌. 피투성이', 값없는 아니 값을 매길 수 없는 값진 '자산'이 되었다.
(주변의 부러움과 시샘을 동시에 받으면서, 어린 나이에 방콕지사장으로서 대임을 맡고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어져서 ‘사면초가’가 되었고, 그 속에서 헤쳐나오려고 발버둥치며 ‘좌충우돌’하였더니, 결과는 나의 몸무게는 10여키로나 빠지고 온몸은 ‘상처투성이’ 아니 ‘피투성이’가 되었더라.)
짧지않은 3년동안, 첫단추를 잘못 꿴, 갈피하나 잡지못하고 헤매기만한 3년여 방콕생활에서, 처음에는 모든 것을 잃은 줄 알았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사실은 많은 것들을 배우고 얻었으며 후일 그 몇배 아니 계산할 수 없는 ‘자산’이 되어 돌아왔다.
(일반적으로느ㅡ해외주재원 생활은 3년을 1기로 하는데, 본사월급과는 별개로 또 본사월급에 준하는 현지주재수당과 주택수당.자녀학자금보조등 각종 복리후생을 회사가 책임져주기때문에...주재원선발과장부터 경쟁이 붙ㄱ고, 또 부인들이 시집과 떨어져 사는 생활을 선호하므로, 자연히 누구나 2연임/3연임을 희망하는데, 나는 1기도 채우기전에 격렬하게 '본사복귀'를 요구하였다. 나의 '자존심'이 지켜지지못하는 상황에서는 '경제적 편익'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못했다. 자존심 버리고 무릎꿇고 사는 것은 내사전에는 없었다.)
하늘은 누구에게 미리 시련을 주어, 그가 어떻게 그 시련을 이겨나가는지 지켜본다 하였다.
한참 잘나가던 나에게 나중에 큰 화를 당하게 하지않게 하기 위하여, 잠시 방콕생활하면서 이런저런 역경을 거치게 한 것이었을까?
나는 그때는 몰랐지만, 사사건건 얽히고 엉키고 꼬여가기만 하는 일들에 치여, 몸무게가 10여키로나 빠지는 곤경에 처해있었지만, 결국에는 그 ‘고행’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고, 더 큰 어려움을 만나도 굳건히 헤쳐나갈 수 있는 ‘전투력’을 나에게 만들어 준 결과가 되었다.
방콕에 갈때만 해도 세상을 전혀 몰랐다. 내가 잘 나서 내가 잘 해서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잘되었다 싶었는데, 방콕에서부터는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지면서, 여기저기서 주어터지면서 (새로 온, 해태그룹 오너 박건배회장의 동생, L.A 법인의 박성배 사장이 전혀 인정을 해주지 않은 것이 제일 치명상이었다. 그는 나를 그가 죽기로 싫어하는 박0무상무의 왼팔로 잘못 알고 오해하고 있었다? )세상을 어렴풋이 알기 시작하였다. 3년이 지나가니 그제서야 세상이 조금씩 보였다. (세상이 또 열리기 시작하였다.)
고스톱판에서, 나는 내패만 보고 친다. 상대방이 무슨 패를 갖고 무엇을 도모하려는지 전혀 관심두지않고, 내 패를 가지고 밀어부친다. 이를테면 나는 흐름을 타고, 그 흐름을 나에게 유리하게 흘러오도록 만들어내는 어떤 기운이 있다. 무모해보이지만 상당히 승률이 높다. 그것도 큰게임에서 크게 얻어먹는다.
그러나 치명적인 약점은, 초고수를 만났을때와 경쟁동반자끼리 짜고 칠때는 내가 당해내지 못한다. 아무리 판을 읽는 눈이 특별하다해도, 나의 약점을 파고드는 강자에게 또는 짜고치는 판에서는 나의 승률은 급격히 떨어지고 때로는 낭패를 보기 쉽다.
말하자면 방콕에서 나의 3년이 무림의 고수들을 만나고 또 촘촘히 짜여진 판에서 게임을 하다보니, 어설프고 아마츄어적인 나의 실력으로는 감당이 쉽지않았던 것 아닐까?
그동안 일본땅콩수출사업이나 태국산농산물개발사업등은 경쟁자들이 한정되었고 누구나 게임룰이 일반화 되어있던 곳에서의 게임이었다면,
방콕지사장 생활은, 기본적 룰이란 것이 이미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고, 수시로 그때그때마다, 관계된 자들에 따라 임의적으로 바뀌는 것이니, 내가 그들을 통제 또는 내식으로 관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였으니, 하는 게임마다 나는 넘어지고 회복이 쉽지 않았던 것.
더군다나, 어떤 때는 게임의 룰은 전적으로, 절대적으로 ‘본사경영진’에서 나왔으니 내가 이를 어찌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는, 특히 비즈니스사회에서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경쟁자들이 있다는 것.
내가 아무리 뛰어나고, 또 준비를 잘했다고 해도, 경쟁자중 누군가가 나만을 공략하기 위하여, 나의 약점을 파고들고 반칙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게임에 대처해야 하였다.
경쟁자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들은 어찌하든 앞서가는 나를 무너뜨리기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않고 공격하며 때로는 반칙도 개의치 않는다는 것까지 고려에 넣어두어야 한다는 것.
나만 운전을 착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필요충분치 않고, 언제 어떤 상황이 발생할 지모르니 ‘방어운전’하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
(야구게임을 빌어 다른말로 표현하자면...나는 일종의 정통파투수, 매우 빠른 강속구를 불같이 던지면서 상대편타자를 압도해 나간다. 칠 테면 쳐봐라는 식으로 자신만만, 내볼만 믿고 상대방을 압박해들어간다. 어정쩡한 변화구로 타자의 실수를 유도하는 얄팍한 수는 쓰지않는다. 나를 믿고, 나의 강속구를 믿고 무조건 밀어붙인다.
그러나...이런 불같은 정통파 강속구투수에게도 어려울때가 있다. 심판이 불공정하거나, 타자가 매우 영악한 변칙플레이를 할때에는 대처하기가 여간 쉽지않다...나는 방콕생활 3년여, 초기에는 심판의 매우 불공정한 판정 때문에 매우 고전하였고, 중후반에는 팀내 선수들에게까지 협조를 받아내지 못해 매우 어렵게 경기를 끌어왔다. 상당부분 그동안 내가 너무 잘나간 탓도 있고, 또한편으로는 나와는 상관없는 주변환경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나에게는 정말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방콕지사 생활 3년여가 지나고...다시 ‘농산사업부장’자리를 되찾고, 다시 ‘부활’의 날개짓을 하면서...그동안 방콕에서 겪었던 여러일들이 주마등처럼 들고나면서, 드는 생각이었다.
‘하늘은 누구를 나중에 크게 쓰기 위하여 그에게 한동안 시련을 주어 그를 단련시킨다.’
소위 중세의 암흑기같은 3년여를 지나고보니, 그제서야 들어오는 생각이었다.
(박사장 눈밖에 나서, 본사에 더 이상 내자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되어, 내사업을 할 것인지 아니면 ‘동부산업’등 다른 종합상사에서 근무할지, 일단은 해태상사를 떠나기로 하였는데...어떻게 ‘농산사업부장’자리로 되돌아오게 되었는지...또다른 운명의 갈림길은 ‘후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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