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자꾸 깬다. 신문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안팍의 자극에 지나치게 예민해지고 초조해하며 수면장애.불안.두통.피로 등이 동반되는 이런 종류의 증상을 ‘신경쇠약’이라고 한다.
미국의 내과의사 M.비어드는 이 증상의 원인을 ‘문화변동’으로 설명한다.
비어드가 지적하는 신경쇠약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1.삶의 속도다. 19세기 전신.철도.증기기관 등의 발전으로 d니해 삶의 속도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결과 사람들이 처리해야 할 정보의 양이 18세기에 비해 100배나 많아졌다.
빨라진 삶의 속도와 격렬해진 경쟁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부적응 현상이 바로 신경쇠약이라는 것이다.
비어드가 경고한 19세기 삶의 속도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속도는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실시간으로 경험한다. 내 삶의 속도를 따라가기도 바쁜데, 남의 삶에도 쉴 새 없이 개입해야한다.
몸은 갈수록 느려진다. 가까운 이들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하여 끙끙대는 일도 잦아진다. 휴대폰을 이용한 이후로는 제대로 외우는 전화번호도 없다.
이런 낡은 아날로그적 신체로 급변하는 21세기적 삶의 속도를 쫒아가려니 그토록 힘든 것이다.
삶의 속도가 급변하여 생기는 문화병의 치료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걷기’다.
수백만년에 이르는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걷는 속도’에 적응해 발달해 왔다. 감당하기 어렵게 빠른 삶의 속도는 불과 지난 몇백년 동안의 일일 뿐이다. 인류역사를 하루로 보면 겨우 몇 초 전에 시작된 변화라는 이야기다. 요즘 그래서 다들 ‘올레길’ 등을 찾아다니며 걷느라 난리다.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삶의 속도를 회복하고 싶은 까닭이다.
맨발로 걸어보라.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흙의 느낌이 그렇게 상쾌할 수 없다. 그저 한 시간 남짓 걸어도 그날 밤 깊은 잠에 빠질 것이다. 잠이 들 때, 잠의 나락에 한없이 떨어지는, 아주 기분 좋은 느낌도 되살아날 것이다.
맨발로 걷기. 새벽에 자꾸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세상에 별로 없다.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기쁨을 안다.
그리움=갈망? 열망?
그리움은 ‘그림’ 혹은 ‘글’과 그 어원이 같다.
종이에 그리는 것은 그림이나 글이 되고, 마음에 그리는 것은 그리움이 된다.
인간은 도대체 언제부터 생각하는 능력이 생긴 것일까?
아기가 어느 순간부터 타인의 행동을 흉내 내기 시작한다. ‘흉내내기’
그것도 한참 전에 봤던 타인의 행동을 흉내내는 것이다. 이를 ‘지연모방deferred imitation’이라고 한다.
지연모방은 타인의 행동이 머릿속에 그림처럼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머릿속에 그림을 그린다는 의미로 보자면 ‘그리움’과 ‘생각’은 같은 단어다. 살면서 도무지 그리운 게 없다면 아무 생각없이 산다는 이야기가 된다. 요즘 내가 아무 생각없이 그저 멍하니 지내는 것도 도무지 그리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 삶의 어느 순간부터 가슴 시린 그리움의 감정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괴테의 시에 차이코스키가 곡을 붙인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삶에 아무런 기쁨이 없을 때는 처절하게 고독해보는 것도 아주 훌륭한 대처방법이다. 혼자 떠나는 거다. 휴대전화.노트북 모두 놓고 떠나는 거다. 하루 종일 아무 목적도 없이 낯선 길목을 기웃대며 걷는 거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딩굴며 자는 거다. 중간중간 노천카페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는 청승도 떨어본다.
고독해야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되고, 누군가를 그리워해야 내면이 풍요로워진다.
--루저를 위한 달걀 프라이느 없다.
지난 시절. 한국 남자를 지켜온 세 가지 자부심이 있었다.
1.우선 생산인으로서의 자부심.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이 이 정도까지 된 것은 한국남자들의 희생 때문이다.
2.두번째 자부심은 가장으로서의 자부심이다. 바깥에서 아무리 비굴하게 돈을 벌어도, 집에 들어서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 아버지들은 왕이 되었다.
아버지가 세수를 마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안방으로 들어서면, 어머니는 아랫목에 식탁을 펴고 정성스럽게 저녁을 내왔다. 아, 그 맛있고 귀한 달걀 프라이는 오직 아버지의 몫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아내들은 더 이상 남편들을 위해 밥을 짓지 않는다. 오직 아이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한다.
3.세 번째 자부심은 수컷으로서의 자부심이다. 밥을 먹다가고 식탁을 치우고 ‘하자’하면 바로 할 수 있었다.
옛날처럼 내키는 대로 그냥 ‘하자’했다간 큰일 난다. 촛불도 켜야 하고 분위기 있는 음악도 배경음악으로깔아야 한다.
--이러다가 정말 한 방에 훅 간다!
때론 비굴하게, 때론 무모하게 부대끼며 정말 치열하게 살아온 내 삶에 도대체 무엇이 빠져 있기에 이토록 허전한 것인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중년의 남자들에게 불현듯 찾아와 도무지 벗어날 수 없게 엉켜드는 이 무기력감의 실체를 ‘알렉시티미’=‘감정인지불능’/독일의 심리학자 비요른 쥐프게.
그는 남자들이 한번 빠지면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심리적 미로를 4단계로 설명한다.
1.우선 자신의 내면을 외면하기 시작한다. ‘감정부정’또는 ‘감정 회피’
2.‘남성적 외향화’..과도하게 ‘사내스러움’을 지향한다. 술만 먹으면 욕하면서 터프함을 과장한다.
3.‘영웅주의’와 ‘지배욕구’의 독단적 이데올로기. 웬만큼 돈도 벌고 사회적 지위을 얻으면 다들 정치하려고 달려든다. 그러나 그 영웅주의적 실체는 ‘무기력감’이다. 자신의 무기력을 숨기려는 방어의 결과다.
4.여기까지 온 남자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남성우울증’이다. 이 우울증은 아내에 대한 정서적 의존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아내는 결코 자신의 안식처가 아님을 알게 된다. 자신을 귀찮아하고 힘들어하는 아내의 속마음이 느껴지면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런 식의 아내에 대한 애증의 모순적 감정 또한 마지막 단계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늙으면 아내밖에 없다고 하는 사내들은 아내로부터 실망.허전함. 더 나아가 배신감을 느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홀로 서라는 이야기다. 어차피 혼자라는 뜻이다.
--한국남자들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이유.
의사소통 장애는 교수의 직업병.
그래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양100마리를 끌고 가느 것보다 교수 3명 설득해서 데리고 가는 게 훨씬 어렵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교수뿐만이 아니다. 한국남자들 대부분이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만 세지고 남의 말 귀는 못 알아듣는다. 이 심각한 의사소통 장애의 원인은 단순하다. 의미 공유가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 사랑한다고 이야기 할때, 내가 이해하는 ‘사랑의 의미’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가 같다고 누가 보장해주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관한 암묵적 의미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부부관계가 삐걱대는 이유는 서로가 이해하는 사랑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에로티시즘 혹은 섹슈얼리티가 사랑의 의미에서 빠져나가는 중년부부에게 의사소통 장애는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결혼25년차인 나에게 사랑은 ‘아침식사’다. 집에서 아침ㄴ식사를 못 얻어먹으면 더는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내 아내에게 사랑은 ‘배려’다. 자신과 아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과 벼려가 사랑의 기준이다.
‘아침식사’와 ‘배려’의 의미론적 구조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매번 힘들다.
의미는 도대체 어떻게 공유되는 것일까? 동일한 정서적 경험을 통해서다.
엄마의 품안에서 아기는 엄마고 똑같은 정서적 경험을 한다. 아기가 놀라면 엄마도 같이 놀라고, 아기가 기뻐하면 엄마도 함께 기뻐한다.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은 정서적 경험을 한다는 이 정서적 상호작용으로부터 의미공유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제 막 사랑하기 시작한 연인들이 놀이공원에서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고 공포영화를 보는ㅇ 이유도 마찬가지다. 인위적으로라도 과장된 정서 공유의 경험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함께 구성하려는 것이다.
젊은 날의 뜨거운 사랑일수록 이런 정서공유의 경험이 드라마틱하다. 그래서 젊어서 죽고 못사는 연애를 한 부부의 이혼율이 높은 것이다. 결혼이 일상이 되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정서적 경험이 밋밋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변한다!
정서공유의 경험이 가능하려면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야 한다. 말 귀 못 알아듣는 한국남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내가 도대체 뭘 느끼는지 알아야 타인과 정서공유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자신의 내면에 무지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결정적인 문제는 판단력 상실이다. 인지능력은 멀쩡하지만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아주 황당한 결정을 하게 된다. 돌아보면 주위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집에서 아침밥 못얻어먹고, 토마토 케찹만 가득한 달걀토스트를 들고 길거리에 서있는 그 싸한 기분부터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손님에 대한 아무 ‘배려’없이 펄펄 끓는 물을 부어 만든 싸구려 원두커피에 혓바닥을 델 때의 그 분노가 처절해질 때쯤, 아내와의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형용사가 다양해져야 남의 말 귀를 잘 알아듣게 된다.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단어라곤 기껏해야 쌍시옷이 들어가는 욕 몇 개가 전부인 그 상태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는 거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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