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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어느 날의 인사동 외출기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2. 5. 14:10

2002.04.03. 수. 두 번째 철학강의를 다녀와서

 

이른 봄날 해질 무렵,

인사동 입구는 나에게 아련한 옛날들을 불러오게끔 하는 묘한 여운이 있었다.

안국동 전철역에서 접근되는 인사동 거리는 가녀린 나무 그늘을 받아서인지 나이 오십을 조용히 충돌질하고 있었다.

이른 봄, 해질녘을 그려보시라.

우선 말끔하게 포장된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인위적인 가공이 이루어져있어 천연덕스럽지 않았지만 크게 자연을 손상하며 만들어놓았다 느껴지지않아 거부감없이 들어왔다.

 

제멋대로 넘실대는 여러 군상들, 빽빽이 들어찬 입간판들, 좁은 도로를 비집고 마구잡이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택시들 그리고 유독 내눈에 딱들어오는 특별한 그림하나;천진하게 느림보 걸음을 걷는 젊은 연인들!

해질녘의 인사동 봄날 거리 여기저기는 나의 옛날들을 끌어내 아쉽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젊은 연인들 몇몇은 도로 사이사이 놓여진 말뚝자리 위에 가방을 아무렇게나 안고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눈을 맞추면 행복은 그냥 오는 것인가.

손을 잡고 있으면 그냥 마냥 좋은가.

아이스크림을 핥거나 무슨 군것질을 하거나 하면 정말 시간은 거기에 멈추어 서있을 것인가.

사람이 살고있는 평화로움은 이렇게 내 앞에 자유를 내놓고 자랑하고 있었다.

자유란 세상의 최고이며 우리의 모든 것인가. 

그런가하면 또 다른 군상은 축쳐진 어깨 위에 무슨 고민이 저토록 많이 쌓여있단 말인가.

중년의 넥타이는 길게 무겁게 늘어져 거리를 터벅대고 있었다.

또 초로의 희끗한 머리는 어둠이 다가오는 거리와 호흡을 맞추는 듯 얼굴은 저멀리 북한산 자락을 보며 햇볕의 남은 세기를 재는 듯 표정이 왠지 허허로이 허전하였다.

우리 중년의 삶은 무겁기만하고 허전하기만 한 것일까.

봄날은 가고 겨울이 오고 있는 것인가.

 

간혹 싱겁게 키가 큰 외국인들도 인사동의 구색을 맞추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을까.

익숙하지 않은 거리와 사람과 물건들을 흥미롭게 들여다보며 한가로운 나그네길을 즐기고 있는 것이리라.

내 눈높이에 눈짓을 해주며 반가움을 보내 인사하였다.

 

왠 찻집이 이리 많은가, '바람이 부는 섬', '옛이야기','멍석을 깔아놓았으니 잠시 앉아 놀다가셔요' '뭐시 꺽정이다냐'.....

이름이 좋지 않아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겠다 싶었다.

우리말이 이렇게 맛있고 멋있는 것을 그동안 몰랐단 말인가.

전통찻집과 전통술집은 인사동에 모두 모여 있었다. 많다. 재미있는 이름들을 한웅큼씩 가지고서는.

 

우리들 운명을 말해주는 곳도 있었고, 여심을 자극하는 액서사리점도 있었으며, 군것질하게 유혹하는 노점상도 많았다.

앉아서 자화상을 초상화해주는 손재주 좋은 사람이 나는 몹시 부럽다.

점을 봐볼까 내 초상을 그려달랠까 출출한데 뭐 한 입 물어볼까 이리저리 머리속을 재고 굴려보았다.

모처럼 자유를 찾아 내시간을 몽땅 내놓았지만 막상 철학강의시간은 코앞에 다가와 그 놈의 자유시간이 다시 또 속박이 되어 돌아왔다.

또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어서 가자.

철학이 무엇인지 들으러 가보자.

허름한 7층 건물에 철학은 조용히 문을 열어 십여명의 자유인을 맞이하였는데, 뭐 특별함이 있겠는가.

그냥 돌아가는 세상이야기를 소위 철학적으로는 어떻게 표현하는지 궁금하고 호기심있었는데 막상 강의는 추상적 단어의 나열로 숨막히고 답답하기만 하였다.

내내 하품이 나오는 걸 억지로 억제하느라 참참 힘들었다.

30여 년 흐른 세월간극이 그리 간단치 않으리라 짐작은 하였지만 철학을 바로 받아들이기는 당초 무리였다.

거기에 강사가 40대초년의 여인이면 나와의 삶의 역정과 무게가 사뭇 다르지 않겠는가.

물론 이것도 당초 짐작에 넣어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기대와는 많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뭐 대수겠느냐. 딱히 특별하게 도모할려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자유시간을 만들어 나의 생활바퀴를 옛날방향으로 일부 되돌리자는 것이었으니....

혹, 그러면 생활이 탄력을 받을 수 있고 그 시간에 자유로움을 흉내내다 보면 자유 가깝게 나를 보낼 수 있으려나 희망했던 거니까....

지금 그 초입에 들어선 것, 뭐 큰 것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으니...

다음 주에 또 보자.

그냥 맥 놓고 지금의 내 생활과 다른 것 아무것이나 듣고 판단은 나중에 하자.

그냥 다른 냄새라도 맡을 수 있으면 그것은 자유이고 행복이고 큼지막한 덤일 것이다.

 

강의가 끝난 인사동은 벌써 한참 밤속을 달리고 있었다.

해질녘의 낭만찬 군상들과 거리는 어디 가고 여느 번화가 밤거리 닮은 너절함이 큰 입을 쫙 벌리고 있었다.

요란한 술집 네온사인, 백.적.청 이발소의 뒤틀려 돌아가는 소용돌이 간판,

인사동 거리는 지친 삶의 철학을 밤 불빛사이로 형체도 없이 날려보내고 전자오락실의 잡음과 소음처럼 요란하고 산란스럽고 소란하였다.

그래도 어디 자유로운 자유가 있을 것이고 지친 삶의 활기찬 부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늦은 밤의 전철은 그래서 귀가하는 승객들로 가득차서 삶의 무게와 애환을 내일로 연결하고 있었다.

전철을 타기 위해 걸어가다 보면 분명 다른 세상이 확연히 있음을 확인하고, 보고 생각하고 얼마나 좋은가.

전철을 타고 여러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고 냄새맡으며 느끼고 생각하니 또 좋았다.

까마득히 멀어져있던 아들은 가까이 다가와 언제 들어오시느냐고 녀석은 벌써 집에 와 있다고, 내 손전화기에 파란불이 깜박이며 알려주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자유롭게 내 앞에 놓여 있으니 이 얼마나 반갑지 않을 것이오.

행복이란 것인가. 자유란 이런 것이리라.

 

전철을 내려 또박또박 집으로 가는 도시의 골목은 이른 봄의 밤공기답게 싱그럽기만 하였다.

오늘따라 술냄새 풍기는 도시의 뒷골목이 푸짐하게 들어왔다.

술취해 주정부림하지만 않는다면 잠시 때론 술푸며 소리쳐 외쳐대는 것도 좋을 것이었다.

그것 또한 나의 삶이겠거니 품안으로 보듬고 몇 신호등을 지나니 드디어 오늘의 자유를 찾는 철학은 우리집 앞에서 강의를 끝내고 멈추어 섰다.

오늘 밤 새로운 꿈을 만들고 또 내일 자유가 있는 곳을 찾아 떠나려면 이제 철학 이야기는 오늘 그만하자.

내일을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두 번째 철학강의를 다녀온 밤에 주절이주절이....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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