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기러기 카페 글모음)

[스크랩] 오이 먹는 날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1. 20:24
2004.5.2.일요일. 오늘은 오이 먹는 날

청계산 입구에 때아닌 손님들로 왁자지껄.
일요일 오전시간, 5월의 산자락은 푸르게 피어나고 있었다.

‘오늘은 5월 2일, 오이와 함께 산에 가셔요.’
판촉은 판촉인데 재미있는 판촉행사였다.
5와 2, 오이.
3월 3일이 삼겹살이 되는 것과 발상이 같다.

오이를 한 입 벌써 덥석 물고 기분 좋게 출발, 오늘의 산행은 만점일 것.

원터골 쉼터에서 매봉으로 오르는 길은 오늘따라 분위기 그만. 초록빛으로 가득한 세상이 거기 있었다. 도시의 한 가운데에 이만한 산책로가 있다는 것은 서울 사람들에게 얼마나 축복일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만 가는 선물이겠지만, 자주 찾아와 선물을 꼭 챙겨가리라 다짐하였다.

매봉을 지나 혈읍재 가는 길목의 막걸리 한잔은 생명수.
갈증도 풀어주고 피로도 멀리하고 사랑도 주었다.
벌써 붉어지고 알딸딸해지는 얼굴과 마음에 또 초록빛 숲 속으로 날 밀어 넣었다.

오늘은 그동안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 혈읍재를 지나지 않고 바로 떨어지는 길로 들어가 보았다.
거기에 또 다른 신세계가 펼쳐지는 것을 누가 알았으리오.
초록빛 신세계가 거기 또 있었다.

가을에는 홍엽만산일 것이나 5월에는 초록빛 만산이었다.
굳이 둘 중에서 더 좋은 것을 말한다면 오늘은 단연코 초록 잎 가득한 5월의 산이다.
가을산 단풍은 어딘지 안타깝고 쓸쓸하고 허망하다. 불타는 단풍 뒤 피할 수 없는 재의 찌꺼기 때문일까 다가올 추운 겨울이 두려워서일까.
5월산의 초록빛은 설레이는 희망이요 수줍은 외침이다.
죽어지내던 겨울을 벗어났음이요 숨죽여 기다리던 새 생명이 태어났음이요 곧 뜨거운 여름이 나의 것일진대 무슨 주저함이 있을 것인가. 터지게 외쳐보리라. 소리쳐 불러보리라.
5월의 초록빛은 이렇게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거기 눈부시게 서서 우리 부부를 맞았다.

오늘 우리 부부는 5월의 초록빛 세상에서 어느덧 그 젊음이 되었다.
하나도 속없이 막걸리 한잔으로 오십 허물을 활짝 벗어 던져버렸다.
산 속을 느리게 걸으며 자연 숲 속의 속도에 맞추었더니 온통 초록빛 물감이 들고 말았다.
마음 속 저 깊숙이 오래오래 물 들었으면 좋으련만 며칠이 지나면 흔적없이 지워지고 말 것임을 또 안다. 곧 뜨거운 여름날이 오면 오늘 이 초록빛 물감은 햇볕에 그을려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음에 올 5월을 기다리는 수밖에.

마침 또 가랑비가 때 맞추어 오셨다. 많이 좀 오셨으면 했지만 감질만 내고 오락가락 하셨다. 바지가랑이 사이로 엉겨붙는 흙먼지를 털어 가셨으면 했는데, 비님은 다른 바쁜 일이 있으신가 더 이상 시간을 내지 않고 멀리 가버리셨다.

산채비빔밥은 오늘따라 척척 입에 더 잘 들어왔다. 5월에 만나는 '버섯과 묵'의 묵은 김치.
알맞게 시어버린 이 '묵은 김치'의 맛을 누가 당해낼 것인가. 난 이 맛에 사로잡혀 옛골을 벗어나지 못한다. 봄 날의 산행에는.
또 덧붙여 정말 볼 품 없는 ‘막커피’의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오늘도 옛골의 일방통행로는 들어오고 나가는 차들이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세상일이란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이야. 분명 일방통행이라 하였건만 사람들은 크게 상관하지 않으면서 쌍방통행을 하고 또 기꺼이 싸움을 하면서 산다. 이래서 세상은 재미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따져서 뭐 할 것인가. 오늘은 따지지 말자고 하였다.

서울로 들어가는 마을버스 405번은 언제나 느리다. 가는 세월을 마뜩치 않아서 일까 오는 세월이 미워서일까 옛골에서 나가는 마을버스는 늦게 오고 늦게 떠나고 그리고 느리게 간다.
난 초록빛 주변을 들여다보다가 초록빛 봄날의 노곤함에 취해 체면을 잃은 채 그냥 잠을 자고 말았다.

아직도 옛골 마을버스는 서울 복판을 저 앞에 두고 마냥 서있었다. 아직 차창 밖으로는 초록빛그대로 있었다. 차라리 이렇게 서서 초록빛 세상 속에서 살아도 좋으리.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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