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군대에서,1970-1977

가짜 서울대 상대생,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0. 11. 13:09

-가짜 서울대 상대생,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5사단 보충대.

다행인지 아닌지 5사단 보충대의 전입신병담당 인사과 행정병이 서울대농대 선배였다.

충남 홍천출신 농화학과 68학번 이신규.

5사단 사령부의 신병배치를 위하여 기초자료가 제공되는 첫관문.

그 선배에 따르면 이번 전입신병의 학력이 매우 좋지만 안타깝게도

사단본부에는 행정병 충원이 없어서 모두 예하 연대로 내려가야한다는 것.

대신에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신병생활이 까다로운 보병연대보다는 포병대대 쪽이 더 좋을 것. 더구나 포병대대에는 부대장이 단독 인사명령권이 있으므로 보병대대 근무하는 것보다는 더 나을 것.

그래서 나는 그의 호의로 보병연대가 아닌 포병사령부로 배치되었다.

잔뜩 긴장하여 포병사령부 인사과에 갔다.

그곳에는 뜻하지않게 일고동기생 백범0가 최고참 행정병으로 있는 것 아닌가?

그는 육사에서 최우수생도에게 주어지는 독일육군사관학교에 파견유학생활을 하다가 독일현지 간호사? 유학생?과의 로맨스로 강제퇴교되어 일고동기생들 중에는 이미 유명인사였다. 그는 서울대생들 특유의 샌님기질이 아니라 고교성적이 나쁘지않은데도 육사를 지원할 정도로 개성이 뚜렷하고 장차 장군이 되고싶은 뚜렷한 목표가 있다는 친구였다. 그를 표병사령부 인사과에서 보게 되었으니 참 인생 넓다가도 좁았다. 사단 보충대 인사과에서 농대선배를 만난 것도 그렇지만 육사를 갔다가 퇴교당한 그를 보는 것은 참 인생에서 인연이란 끈질긴 어떤 끈이 연결되어 있나 싶기도 하고 또 끈에 따라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얄궂은 면도있겠구나 싶었다. 그는 나에게 그날 특식으로 제공되었던 통닭 한 마리를 먹울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나에게는 인생 내내 먹을 복이 따라다녔다? 배불리 먹기위해서 식품공학과를 선택했고, 보급이 충분치 않았던 군대에서 훈련소에서도 통닭을 먹고, 전방부대배치때로 통닭을 또 먹게 되었으니 먹는 복을 타고 난 것이 틀림없지않은가?

 

5사단에는 4개 포병대대가 있었다. 일고동기생인 그의 배려라고 할 수는 없는 거겠지만

포병사령부 전체 10여명의 전입신병중에서 나와 또다른 한명이 선임대대인 195대대에 배치되었다.

논산훈련소 동기생 이식0, 영광출신과 함께였다. 문제는 그때부터 3년내내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나는 195포병대대 인사과에 따불백을 메고 전입신고를 하엿다,

인사과에서는 난리가 났다. 대학출신 신병도 흔치않앗는데 서울대출신 신병이 둘이나 왔다고 신통방통해 하였다.

인사과에는 제대예정 고참병장이 하나가 있었다. 자리는 하나밖에 없는데 신병이 둘이니 고민이라는 것.

둘을 다 받자니 자리도 없을뿐더러 어쩌면 군법을 어기게 되는 것. 군법까지는 아니겠지만 모범을 보여야할 인사과에서 위규보직을 하게 되는 것 아닌가?

둘중 한명만 받아야한다면 사회통념상 또는 사회의 일반정서상 당연히 서울대농대출신보다는 서울대상대출신을 선택하는 것은 어쩜 당연하다 할수 있었다.

(농대에 대한 사회일반적 평가는 가희 혐오적이라 하겠다. 개인개별적 특별함은 전혀 무시되는 사회적 평가일 수밖에 없으니 내가 일고 3년우등생이며 졸업성적은 반 1등이며 이과전체 300여명중 4등으로 최상위권이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아주지않았다. 내가 사회생활 하는 내내 사회가 주는 농대생의 평가에 대한 극심한 콤플랙스를 겪어야하는 아프고 아픈 사실이 있다.)

그러나 195대대 인사과 부관(3사출신 대위 김정수)과 선임하사(상사 박종기)는 타 참모부(작전과, 군수과)와 중대본부(3개중대)의 비난을 아랑곳하지않은 채, 우리 둘을 모두 받는 강수를 두었다.

서울대출신이 뭐라고 말단 군대에서도 서울대의 위력은 대단하였다?

후일 선임하사 가라사대; 당연히 서울대상대출신을 받고 나는 다른 참모부나 중대본부 행정병으로 보내는 것이 순리였지고 부관도 그리하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였지만 선임하사는 왠지 그렇게 하고싶지 않더라는 것.

또 운명이라는 것.

만일 그때 그 선임하사가 고집을 부리지않고 나를 인사과행정병으로 받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군대생활을 하였을까? 다른 경험을 하고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그는 서울대 상대출신이라는데 아무리 봐도 가짜같았다. 학번도 얼버무리고 서울대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봐도 하나도 제대로 답변하는 것이 없었다.

가짜라고 심증이 굳어져도 그가 선언하지않는 한 어찌할 수가 없었다. 대나무숲에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칠 수도 없는 생활이 3년내내 계속되었다.)

 

포병대대는 3개 포병중대와 1개 본부중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나는 참모부에 근부하는 행정병들(인사과.정보과.작전과.군수과.병기과.수송부)의 소속인 본부중대에 편입되었다.

수송부의 운전병들이 가끔 말썽을 부리긴 하였지만 참모부에 근무하는 병력들의 학력은 포대에 근무하는 포병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우수해서 분위기가 나쁘지않았다.

개인별로 부서별로 조금 차이가 나겠지만 집합도 많지않고 소위 빳다도 그리 많지 않았다.

(운전병들이 있는 수송부는 집합도 많고 빳다도 많았다. 틈만 나면 우당탕탕 시끄러웠다.)

특이하게도 나는 한번도 빳다를 맞지않고 신병생활을 하였다. 물론 내가 고참병이 되고서는 신병들에게 빳다치는 것은 용납하지않았다.

 

전입신병의 하루는 아침식사후 집합에서 시작되었다. 중대본부 선임하사는 사역병 모집이 큰일이었다. 참모부 근무하는 행정병들을 사역병으로 차출하기란 쉽지않았기 때문.

서로 행정반 일이 많아서 사역병으로 내줄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전입신병들이 최우선으로 사역병이 되었다.

나의 인사과에는 전입신병이 둘이니 사역병 차출의 최우선 순위였다.

나는 언제나 1번으로 사역병 지원을 하였다.

전입신병으로서 부대적응이 쉽지않은 면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그 가짜 서울대생을 보는 것이 사역이 육체적으로는 물론 힘들지만 정신적으로는 사역보다 더 어려웠기 때문.

후일 인사과 선임하사 가라사대, 나의 이런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았다는 것.

왜 박이병은 행정반에 오지않고 매일 사역만 나가냐는 것. 혹시 탈영하는 것은 아닌지도 살펴보았다는 것.

내가 물설고 낯설은, 사회의 일반적 통념이 어떨 때 깡그리 무시되는 군대에서 그를 만난 것은 행운? 아니면 또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