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군대에서,1970-1977

논산훈련소, 대기병 그리고 칼잠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9. 9. 19:23

 

논산훈련소, 대기병 그리고 칼잠

1973년 10월.

1972년, 3학년 후학기때 휴학하고 1년이 지나 복학하자마자 나는 전혀생각지않은 군대입영영장을 받았다.

머리를 미리 스포츠형으로 깎고 군대갈 준비를 하였다. 마침 3-7반 일고친구 김제0도 같은 날 영장을 받아 나는 입대 하루전 그의 광주 사직동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논산훈련소에 도착하니 어디서 그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는지 소위 인산인해.

‘아무거나 좋습니다.’ 

 훈련복 싸이즈에 상관하지않고 바꿔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아무런 불평없이 주는대로 입겠다는 확인이었다.

복창을 하면서 훈련병복으로 갈아입었다.

죄수집단수용소와 다름 없었다. 다만 죄수라는 이름만 붙여지지않았을뿐 분위기는 살벌하였고 훈련병들은 긴장속에 떨고있었다.

하늘과 땅차이. 불과 어제의 사회와 오늘의 논산훈련소는 그렇게 차이나게 달랐다.

 

샤워를 시키는데 수십명이 한꺼번에 들어가서, 기간병조교의 구호에 따라 몇초만에 물한번 쐬고 몇초만에 비눗칠하고 몇초만에 다시 물을 쓰고 샤워끝. 번갯불에 콩볶아먹는 샤워가 끝났다.

'일어서 앉아'를 시도때도없이 하면서 이런저런 입소절차를 밟았다.

훈련소에서 이동하다 멈춰서 잠시 서있으면 ‘앉아 일어서’가 반복되었다.

숨쉴 틈을 주지않으면서 고향생각 나지않게 하고, 사회물을 빼내가는 과정이라 하였다.

 

대기병.

아직 정식 훈련병이 되지않은 채, 사회인과 훈련병 사이의 신분.

하루라도 빨리 훈련병 명령을 받기를 서로 원하였지만 군대행정은 무지막지한 듯 했지만 나름 절차가 있었다. 모든 대기병들이 일률적으로 바로 훈련병으로 바뀌지않았다.

논산훈련소에도 정원이 있을 것이니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로 빠지는 병력이 있을 것이고 그에 맞춰서 대기병들이 그 자리를 채우는 것 아니겠는가?

하루이틀 길어야 사흥정도의 차이. 그래도 대기병들은 하루라도빨리 훈련병이 되어 하루라도빨리 제대하기를 바라는 것.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가? 하루라도 빨리 훈련병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사회에서 누렸던 학벌도 나이도 출신도 배움의 차이도 상관없이 모두가 동일하였다.

대기병 시절의 침상은 콩나물시루속의 콩나물처럼 빽빽하여 옆사람간의 사이에 공백이란 없었다. 소위 ‘칼잠’

누워서 자는 것이 아니라 어깨를 바닥에 대고 어깨와 어깨를 서로 맞대고 자야했다.

대기병들이 안락하게 잠을 자면 안되어서일까 아니면 군기를 잡기위해서일까 아니면 대기병이 많아서 수용인원이 넘쳐서일까 며칠간의 대기병생활은 칼잠을 자면서 시작되었다.

칼잠이 싫어서 어서빨리 훈련병이 되고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이틀이 지나서일까? 나는 드디어 훈련병이 되었다.

논산훈련소 28연대.

몇 번인지 나의 번호는 기억이 없지만 앞뒤로 동국대출신.영광출신들이었다.

보통 훈련병들의 학력은 중졸은 없고 대부분 고교졸업이었지만 28연대는 조금 달랐다.

나처럼 학적변동으로 갑자기 군대에 오게된 대학재학생들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동병상련이 되었다.

나는 훈련소 기간병이 시키는대로 내 옷과 함께 보성고향집 주소를 써주었다.

나의 사제옷이 보성고향집으로 보내지는 것. 영화같은 데서 보면 고향집으로 되돌아온 아들의 옷을 보고 우는 어머니들의 모습이 영상으로 나오지않던가?

나의 논산훈련소 생활은 이제 본격적으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