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군대에서,1970-1977

서둔 야학교사...농악반 그리고 기숙사 ‘상록사’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9. 8. 12:35

//서둔 야학교사...농악반 그리고 기숙사 ‘상록사’

심훈의 ‘상록수’에는 박동혁과 채영신이 농촌에서 야학을 하면서 농촌계몽활동을 한다.

나도 박동혁처럼 야학교사를 하면서 농촌문제와 접하면서 그들과 동조하고 싶었다. 내가 깡시골출신이었으므로, 자라오면서 또 부모님들 생활하시는 거보면서 느끼는 것이 많았다. 광주유학하면서 도시민과 농민들 생활사이의 이해할 수 없는 경제적 불평등괴리가 어디에서 발생하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대학생활을 시작하면서 ‘농대디스카운트’에 대한 표현못할 반항과 숨은 울분을 어떻게 해쳐나가야하는지..야학교사는 첫걸음일 수 있었다.

농악반활동도 하고싶었다. 농악의 경쾌하고 시원한 발산..무작정 하늘로 뿜어내는 경쾌한 흐름이 좋았다. 꾕과리치고 장구치고 징치면서 깊은속마음에 자리잡아있는 울분을 뿜어낼 수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유분방함. 사회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사회가 아무리 구박하고 무시해도 훌훌 털어버리고 훨훨 하늘높이 날아갈 수 있는 길이 거기에 있을 것 아닌가?

 

기숙사. 상록사...농대 기숙사는 둘이 있었다. 남자 기숙사는 상록사, 여학생기숙사는 녹원사.

‘녹원사’에는 순수함.청초함.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금남의 집이라고들 웃었지만 거기에는 가까이갔으면 싶은 충동이 숨어있었다.

‘상록사’에는 자유분방함이 살아움직이고 있었다.

서울출신 학생들중에서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학생들이나 지방출신중에서도 부모님의 재력이 있는 학생들이 기숙사생활을 하였다.

서울출신중 학생과외를 해야하는 학생은 서울에서 기차통학을 하였고, 지방출신들은 학교주변에서 하숙을 하거나 나처럼 수원시내에 나와 하숙을 하면서 학생과외를 해야하는 학생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않았다.

 

잔디밭에 끼리끼리 모여앉아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기타를 치기도 하고, 누구들은 카드놀이를 하기도 하고...또 누구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그냥 드러누워서 푸른하늘을 보고만 있어도 자유였고 해방이었다.

나에겐 특히 잠자고 먹는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는 공간이었다.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때늦게 식사를 하는 것이나 부스스한 눈빛과 머리를 하고 강의실에 게슴치레 등장하는 것도 자유요 해방.

주말, 평화로운 오후시간, 데이트하던 여학생을 데리고 오픈하우스하는 것은 정말로 ‘낭만’

청바지 입고 기타치고 여학생과 잔디밭에서 담소한다면...얼마나 신날 것일까?

 

그러나...하숙비를 스스로 마련해야하는 나는 학생과외를 하지않을 수 없었고 기숙사생활은 꿈에만 꾸어보는 일이 되었다.

주5회. 토요일과 일요일을 빼면 매주 학생과외에 얽매이게 돼서 다른 과외활동을 할 수 없었다. 거기에 ‘기러기회’는 주1회, 매주 화요일,은 절대적이었으니, 정말 딱한 노릇이었다.

야학교사도, 농악반 풍악소리도, 기숙사의 낭만도 모두 나에겐 현실과 동떨어져있었다.

 

내가 만일 하숙비를 벌지않아도 좋았다면, 다른 과외활동을 할 수 있었다면, 나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원칙적이고 고집스러운 나의 성격은 다른사람들과 타협하는 보다 유연한 사람으로 변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