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일요일. 하루종일 비가 내린다. 처서(處署) 무렵에 비가 오면 그 해 농사는 크게 기대하지 못한다는데 걱정이다. 햇볕을 한껏 받아 결실을 맺어야 할 때 비가 많이 오면 일조량이 부족하여 열매가 부실해지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 몇 주 째 일요일에 비가 내리는가. 내가 휴가간 지난 한 주를 빼고는 매주 비가 왔으니 하느님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시는가.
세상의 모든 일이 무슨 일이든 까닭 없는 것이 없다는 것 아닌가. 자연 현상의 모든 것, 자연의 순환까지도 어떤 이유가 있지만, 단지 우리 인간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자연의 세계에서는 넘치고 지나치면 줄여서 알맞게 하고, 부족하고 모자라면 채워서 또 알맞게 평형상태를 만들어 놓을 것인데, 단지 우리들 인간이 제 눈으로만, 제 식으로만 들여다보니 안 보일 뿐 아니든가.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여 산행을 그만둘까 했다.
집사람이 모처럼 점심을 준비해 가서 산에서 먹기로 약속했는데 아침부터 비가 오니 어찌해야 할지 갈등이 생겼다.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산행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비 오는 날의 산행, 운치 있지 않겠어요?"
"그래도 빗줄기가 만만치 않은데."
강력한 거부의사가 아니었다.
나는 더 확실하게 밀었다.
"우리 나이가 이제 중요한 때래요. 최소 일주일에 한번은 산에 갈 버릇해서 다리 힘을 길러놔야 한대요."
"까짓 것, 만일 비가 더 많이 오면 어디 좋은 곳에 가서 차라도 하고 오면 더 좋지 뭐."
침묵은 긍정이었다. 가장 손쉽고 편안한 곳이 청계산. 다시 청계산을 찾기로 하였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니 필시 산행객이 많지 않을 거고
주차장이 여유가 있을 게 분명, 차를 가지고 가기로 하였다.
평소에는 주차문제도 문제지만, 오고가는 길이 너무 막혀서, 버스로 ‘느리게 또 느리게’ 오가는 자연주의었는데, 오늘은 물질적 시간적 편의를 좇아 자동차를 이용하였다.시간과 육체의 편함을 얻으면서 자연의 느긋함을 버린 것이랄까. 좀 비약인가.
역시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평소와 너무 다르니 그것이 또 더 이상하였다. 인간의 선입견이라니, 인간의 인식 습관이라니, 주차장에 차가 없어도 얼른 당연한 것으로 받지 못하다니, 우리 인간들의 이중성, 우리들은 모순덩어리 그 자체. 처음에 좋은 틀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오전 9시 40분. 청계산 입구. 비는 계속해서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굴다리 밑의 채소장수 할머니 아줌마들의 얼굴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장사는 ‘보나마나’라는 허전함이 얼굴에 그려져 있었다.
산행객이 눈에 띄게 줄어있었다.
평소의 십분의 일 아니 백 분의 일도 되지 않은 듯 싶었다. 그러나, 청계산은 오랜만에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산행객들이 많지 않아서 오늘은 평소보다 덜 귀찮을 것이기 때문.
집 사람은 두 번째 좌회전 길로 가자고 하였다. 다른 길에 비하여 조금 더 가파를 거라고 하여도 그 길이 좋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오르면서 호흡을 조절해 나가는데, 벌써 숨이 차고 온몸이 후덥지근해 왔다. 숲 속의 한증막 효과가 또 나타나는 것인가.
비는 더 거세게 내리는 듯 숲 속의 나무터널도 내리는 비를 막아주지는 못하였다.
숲 속에 들어가면 우산을 접어도 좋을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떨어지는 빗방울의 세기로 봐서는 계속 쓰고 가야할 형편이 되었다.
우산을 쓰면서 하는 산행이라니, 조금은 우스꽝스럽기도 할 것이나,
한편으로는 부부가 그것도 우산을 쓰면서 우중에 산행을 하는 그림이라니,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화인가.
정말 산행객들이 많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시쳇말로 바글바글 할 것이나,
오십여 미터 앞을 봐도 사람들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너무 속도를 내는 것도 우리의 산행원칙에 반하는 것.
30여분이 지난 지점에서 간단히 호흡을 조절하였다.
물은 왜 그리 시원하며, 귤은 왜 그리 달고 맛있는가.
뜨거운 커피는 비 오는 날의 산행에는 딱 제짝이었다.
마음속을 확 풀어내는 뜨거운 손이었다.
다시 30여분이 지나서 헬기장에 도착하였는데, 빗줄기는 그칠 줄을 모르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듯 이제는 바람까지 거들고 있었다.
돌문바위를 세 바퀴 돌면서 지난주에 군대간 둘째의 건강함을 빌고 또 빌었다.
578 미터의 매 바위는 거센 바람을 보내 우리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매처럼 거세게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저 멀리 산중턱에는 운무(雲霧),
구름안개인가 안개구름인가
바람을 따라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는데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하였다.
우리는 비교적 평평하고 바람막이가 될 듯한 돌 바위를 찾아서 앉았다.
깔판을 놔두고 온 것이 무척 아쉬운 순간이었다.
우리는 가능한 한 편하게 쪼그리고 앉아서,
고구마에 열무김치를 감아서 입 속으로 넣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둘러서서 우리를 보건 말건 비바람이 얼굴을 때리건 말건,
우리의 해야할 일은 오로지 시큼한 김치에 고구마를 입 속에 집어넣는 일밖에 없는 것처럼,
한동안 열심히 그 일에 열중하였다.
무엇을 진수성찬이라고 해야 하나요?
열무김치가 다 떨어지고 나서야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가 이해되었다.
주위에서 안개구름이 어떻고 구름안개가 어떻다는 둥,
비바람에 떠다니는 풍경에 감탄을 토해내는 산행객들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그렇다고 후식을 생략할 수는 없는 노릇,
그 맛있는 감귤은 다시 입안을 즐겁게 해주었고,
뜨거운 커피도 다시 비바람으로 추워진 몸과 마음을 알맞게 덥혀 주었다.
매봉정상 584.5 미터.
유치환님의 시 ‘행복’은 여전히 비바람 속에서도 돌바위 위에서 웃고있는 그 행복이었다.
‘내 가진 것 없건마는
머리 위 푸른 하늘 우러렀음에
항시 내 마음 행복 되노라‘
집사람은 다른 곳, 나무 팻말에 쓰여있는 역시 유치환님의 시 ‘바위’가 더 좋다고 하였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의 함묵 ...‘
혈읍재를 거쳐서 옛골을 갔으면 좋으련만
자동차를 입구 주차장에 놓고 왔으므로 망설여져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하산은 첫 번째 좌회전 길과 만나는 쪽으로 하였다.
산길 바닥은 질퍽하였고 내려가는 길이라 더 조심하여야 했다.
나무계단이 때로는 나의 보폭과 엇박자가 나기도 하여 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우리의 나이가 오십이 넘었으니 어디 옛날 젊었을 적과 견주기나 하겠는가만,
흐르는 세월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음을 또 알게 되었다.
자연의 순환을 어찌 한 인간이 거역할 수 있겠는가.
자연의 섭리를 어찌 우리 인간들이 거스릴 수 있단 말인가.
오늘 내리는 비도, 요즈음 많이 오는 비도, 어쩜 자연의 순환 아니겠는가.
자연의 움직임은 시작의 이유가 있고 또 반드시 끝맺음의 까닭이 있지 않은가.
다만, 우리 인간들이 제 눈의 안경기준으로, 아전인수격으로 판단하다보니
미처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
비가 많이 오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쁠까.
세상의 이치 중,
하나가 좋으면 다른 하나가 좋지 않은 제로섬(Zero Sum) 또는 총량불변의 법칙.
비가 많이 와서 올해 농사가 걱정,
반대로 서울의 공기는 좋아졌다.
서울의 공기가 좋아지니,
노약자의 여름철 감기가 줄어들었다, 노약자의 건강이 좋아졌다.
반대로 소아과나 내과의 수입이 줄어들어 병원들이 울상.
나는 또 비약한다.
병원들이 울상을 짓는다는 것은 그들이 새로운 사회현실을 경험한다는 것.
멀리 내다봐서 그들에게도 결코 나쁘지 않을 것.
어쩜 축복일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환자는 찾아왔고 돈은 그냥 벌리는 것이었다.
땀이 어디 있으며, 또 환자는 어디 인간이었는가
환자는 돈을 가지고 오는 하나의 걸어다니는 물건으로 보였을 것.
이제 그들이 환자를 똑바로, 제대로 쳐다보기 시작할 것이고,
그것은 환자에게도 좋고 그들에게도 너무 좋은 새로움일 것 아닌가.
자연현상이나 인간사회 활동이 제로섬에서 뱅뱅 돌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플러스 섬'(Plus Sum)이 될 때
우리 인간사회는 확실히 더 밝아질 것.
어느 한 쪽의 일방적 우위에서는 건강한 경쟁사회가 존재하지 못하고
다른 쪽의 일방적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
다른 쪽의 희생 위에 한쪽의 지나친 안락함에 안주하는 것은
건강한 사회의 전제조건이 될 수 없지 않은가.
자연순환의 원리처럼
지나치고 넘치는 곳들에서, 모자라고 부족한 곳들로 줄이고 채워서
우리사회가 건강하게 알맞게 되었으면 싶다.
자연의 순환은 우리사회의 권력이동현상과 같지 않을까.
비가 내리는 것도,
태풍이 부는 것도,
공기의 이동현상 아닌가.
가부장적 권위가 무너지는 것도,
여성의 사회참여가 늘어나는 것도,
대통령의 권위가 예전과는 전혀 다른 것도,
‘사오정’이나 ‘오륙도’의 사회현상도,
모두가 우리사회의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런 권력이동을 달리 표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지나친 우위에서 알맞은 위치로 중심 이동하는 것,
그것은 자연현상과 똑같지 않은가.
얼마 전 젊은 법관들의 대법관 추천에 대한 항변도,
엊그제 검찰인사의 파격도,
요즈음 의사들의 새로운 경험도,
어쩌면 자연현상,
우리사회의 전통적 권력이 자연스럽게 알맞은 위치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 아닌가.
어쩌면 그동안 너무 한쪽에 치우쳐 있던 힘들이,
이제야 몸부림하며 제자리를 찾으려 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권한과 혜택이 많은 곳으로 인간들이 몰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
자본주의의 경쟁사회에서는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권한과 혜택이 너무 한 곳으로 지나치게 치우쳐서,
공동사회의 다른 쪽 어디가 갈수록 어두워져 간다면,
함께 살아가는 삶에 갈등의 그림자가 짙게 되고
결국은 그 나쁜 결과가 부메랑이 되어,
지나친 혜택을 누리는 쪽으로 역반응될 것임을 우리는 미리 깨달아야 되는 것 아닌가.
있는 자, 힘있는 자들은
없는 자, 힘없는 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천부적 우월감을 버려야 할 것이다.
급속한 사회발전 과정상,
어쩔 수 없이 비합리적 제도에 의한 지나친 권한과 혜택이 주어진 것이지,
어려운 시험을 통했으므로 또는 힘든 시간들을 이겨냈으므로
다른 사람들과 당연히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너무 무식한 것이고 지나친 오만이며 편협한 특권의식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땀 흘려 열심히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힘들이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 모두가 어렵게 힘들이며 오늘날 이 사회를 만들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
비가 오는 자연현상처럼
알맞게 비가 와서
농사일에도 좋고,
서울의 공기도 맑아져서 좋고,
새로운 위치에서 의사들의 병원경영도 좋아지고,
우리 모두가 함께 좋아지는 건강한 사회, 튼튼한 사회가 되었으면 싶다.
우리에게 자연은 무엇인지
우리는 그 자연의 순환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오늘날 우리사회도 자연의 바뀜처럼 비가 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바뀔 수 없는가.
어느 곳의 지나치게 넘치는 권위와 혜택이,
지나치게 모자란 곳을 향하여 알맞게 자연스럽게 그 중심이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인가.
정말로 어려운 것인가. 오른쪽 무릎이 엄살을 부리는지 예전 같지가 않았다.
집사람은 드디어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퉁’하는 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다행히 두 손을 땅에 대고 넘어져 있었다.
나무계단 위 젖어있던 빗물이 미끄럼을 태우고 만 것,
그만 한 것이 천만 다행.
앞으로 넘어졌으면 어쩔 뻔하였는가.
나의 발걸음도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오늘 비 오는 날 산행의 하산 길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 2007 OhmyNews
최근 들어서 몇 주 째 일요일에 비가 내리는가. 내가 휴가간 지난 한 주를 빼고는 매주 비가 왔으니 하느님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시는가.
세상의 모든 일이 무슨 일이든 까닭 없는 것이 없다는 것 아닌가. 자연 현상의 모든 것, 자연의 순환까지도 어떤 이유가 있지만, 단지 우리 인간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자연의 세계에서는 넘치고 지나치면 줄여서 알맞게 하고, 부족하고 모자라면 채워서 또 알맞게 평형상태를 만들어 놓을 것인데, 단지 우리들 인간이 제 눈으로만, 제 식으로만 들여다보니 안 보일 뿐 아니든가.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여 산행을 그만둘까 했다.
집사람이 모처럼 점심을 준비해 가서 산에서 먹기로 약속했는데 아침부터 비가 오니 어찌해야 할지 갈등이 생겼다.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산행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비 오는 날의 산행, 운치 있지 않겠어요?"
"그래도 빗줄기가 만만치 않은데."
강력한 거부의사가 아니었다.
나는 더 확실하게 밀었다.
"우리 나이가 이제 중요한 때래요. 최소 일주일에 한번은 산에 갈 버릇해서 다리 힘을 길러놔야 한대요."
"까짓 것, 만일 비가 더 많이 오면 어디 좋은 곳에 가서 차라도 하고 오면 더 좋지 뭐."
침묵은 긍정이었다. 가장 손쉽고 편안한 곳이 청계산. 다시 청계산을 찾기로 하였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니 필시 산행객이 많지 않을 거고
주차장이 여유가 있을 게 분명, 차를 가지고 가기로 하였다.
평소에는 주차문제도 문제지만, 오고가는 길이 너무 막혀서, 버스로 ‘느리게 또 느리게’ 오가는 자연주의었는데, 오늘은 물질적 시간적 편의를 좇아 자동차를 이용하였다.시간과 육체의 편함을 얻으면서 자연의 느긋함을 버린 것이랄까. 좀 비약인가.
역시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평소와 너무 다르니 그것이 또 더 이상하였다. 인간의 선입견이라니, 인간의 인식 습관이라니, 주차장에 차가 없어도 얼른 당연한 것으로 받지 못하다니, 우리 인간들의 이중성, 우리들은 모순덩어리 그 자체. 처음에 좋은 틀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오전 9시 40분. 청계산 입구. 비는 계속해서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굴다리 밑의 채소장수 할머니 아줌마들의 얼굴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장사는 ‘보나마나’라는 허전함이 얼굴에 그려져 있었다.
산행객이 눈에 띄게 줄어있었다.
평소의 십분의 일 아니 백 분의 일도 되지 않은 듯 싶었다. 그러나, 청계산은 오랜만에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산행객들이 많지 않아서 오늘은 평소보다 덜 귀찮을 것이기 때문.
집 사람은 두 번째 좌회전 길로 가자고 하였다. 다른 길에 비하여 조금 더 가파를 거라고 하여도 그 길이 좋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오르면서 호흡을 조절해 나가는데, 벌써 숨이 차고 온몸이 후덥지근해 왔다. 숲 속의 한증막 효과가 또 나타나는 것인가.
비는 더 거세게 내리는 듯 숲 속의 나무터널도 내리는 비를 막아주지는 못하였다.
숲 속에 들어가면 우산을 접어도 좋을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떨어지는 빗방울의 세기로 봐서는 계속 쓰고 가야할 형편이 되었다.
우산을 쓰면서 하는 산행이라니, 조금은 우스꽝스럽기도 할 것이나,
한편으로는 부부가 그것도 우산을 쓰면서 우중에 산행을 하는 그림이라니,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화인가.
정말 산행객들이 많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시쳇말로 바글바글 할 것이나,
오십여 미터 앞을 봐도 사람들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너무 속도를 내는 것도 우리의 산행원칙에 반하는 것.
30여분이 지난 지점에서 간단히 호흡을 조절하였다.
물은 왜 그리 시원하며, 귤은 왜 그리 달고 맛있는가.
뜨거운 커피는 비 오는 날의 산행에는 딱 제짝이었다.
마음속을 확 풀어내는 뜨거운 손이었다.
다시 30여분이 지나서 헬기장에 도착하였는데, 빗줄기는 그칠 줄을 모르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듯 이제는 바람까지 거들고 있었다.
돌문바위를 세 바퀴 돌면서 지난주에 군대간 둘째의 건강함을 빌고 또 빌었다.
578 미터의 매 바위는 거센 바람을 보내 우리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매처럼 거세게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저 멀리 산중턱에는 운무(雲霧),
구름안개인가 안개구름인가
바람을 따라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는데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하였다.
우리는 비교적 평평하고 바람막이가 될 듯한 돌 바위를 찾아서 앉았다.
깔판을 놔두고 온 것이 무척 아쉬운 순간이었다.
우리는 가능한 한 편하게 쪼그리고 앉아서,
고구마에 열무김치를 감아서 입 속으로 넣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들이 둘러서서 우리를 보건 말건 비바람이 얼굴을 때리건 말건,
우리의 해야할 일은 오로지 시큼한 김치에 고구마를 입 속에 집어넣는 일밖에 없는 것처럼,
한동안 열심히 그 일에 열중하였다.
무엇을 진수성찬이라고 해야 하나요?
열무김치가 다 떨어지고 나서야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가 이해되었다.
주위에서 안개구름이 어떻고 구름안개가 어떻다는 둥,
비바람에 떠다니는 풍경에 감탄을 토해내는 산행객들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그렇다고 후식을 생략할 수는 없는 노릇,
그 맛있는 감귤은 다시 입안을 즐겁게 해주었고,
뜨거운 커피도 다시 비바람으로 추워진 몸과 마음을 알맞게 덥혀 주었다.
매봉정상 584.5 미터.
유치환님의 시 ‘행복’은 여전히 비바람 속에서도 돌바위 위에서 웃고있는 그 행복이었다.
‘내 가진 것 없건마는
머리 위 푸른 하늘 우러렀음에
항시 내 마음 행복 되노라‘
집사람은 다른 곳, 나무 팻말에 쓰여있는 역시 유치환님의 시 ‘바위’가 더 좋다고 하였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의 함묵 ...‘
혈읍재를 거쳐서 옛골을 갔으면 좋으련만
자동차를 입구 주차장에 놓고 왔으므로 망설여져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하산은 첫 번째 좌회전 길과 만나는 쪽으로 하였다.
산길 바닥은 질퍽하였고 내려가는 길이라 더 조심하여야 했다.
나무계단이 때로는 나의 보폭과 엇박자가 나기도 하여 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우리의 나이가 오십이 넘었으니 어디 옛날 젊었을 적과 견주기나 하겠는가만,
흐르는 세월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음을 또 알게 되었다.
자연의 순환을 어찌 한 인간이 거역할 수 있겠는가.
자연의 섭리를 어찌 우리 인간들이 거스릴 수 있단 말인가.
오늘 내리는 비도, 요즈음 많이 오는 비도, 어쩜 자연의 순환 아니겠는가.
자연의 움직임은 시작의 이유가 있고 또 반드시 끝맺음의 까닭이 있지 않은가.
다만, 우리 인간들이 제 눈의 안경기준으로, 아전인수격으로 판단하다보니
미처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
비가 많이 오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쁠까.
세상의 이치 중,
하나가 좋으면 다른 하나가 좋지 않은 제로섬(Zero Sum) 또는 총량불변의 법칙.
비가 많이 와서 올해 농사가 걱정,
반대로 서울의 공기는 좋아졌다.
서울의 공기가 좋아지니,
노약자의 여름철 감기가 줄어들었다, 노약자의 건강이 좋아졌다.
반대로 소아과나 내과의 수입이 줄어들어 병원들이 울상.
나는 또 비약한다.
병원들이 울상을 짓는다는 것은 그들이 새로운 사회현실을 경험한다는 것.
멀리 내다봐서 그들에게도 결코 나쁘지 않을 것.
어쩜 축복일 것이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환자는 찾아왔고 돈은 그냥 벌리는 것이었다.
땀이 어디 있으며, 또 환자는 어디 인간이었는가
환자는 돈을 가지고 오는 하나의 걸어다니는 물건으로 보였을 것.
이제 그들이 환자를 똑바로, 제대로 쳐다보기 시작할 것이고,
그것은 환자에게도 좋고 그들에게도 너무 좋은 새로움일 것 아닌가.
자연현상이나 인간사회 활동이 제로섬에서 뱅뱅 돌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플러스 섬'(Plus Sum)이 될 때
우리 인간사회는 확실히 더 밝아질 것.
어느 한 쪽의 일방적 우위에서는 건강한 경쟁사회가 존재하지 못하고
다른 쪽의 일방적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
다른 쪽의 희생 위에 한쪽의 지나친 안락함에 안주하는 것은
건강한 사회의 전제조건이 될 수 없지 않은가.
자연순환의 원리처럼
지나치고 넘치는 곳들에서, 모자라고 부족한 곳들로 줄이고 채워서
우리사회가 건강하게 알맞게 되었으면 싶다.
자연의 순환은 우리사회의 권력이동현상과 같지 않을까.
비가 내리는 것도,
태풍이 부는 것도,
공기의 이동현상 아닌가.
가부장적 권위가 무너지는 것도,
여성의 사회참여가 늘어나는 것도,
대통령의 권위가 예전과는 전혀 다른 것도,
‘사오정’이나 ‘오륙도’의 사회현상도,
모두가 우리사회의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런 권력이동을 달리 표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지나친 우위에서 알맞은 위치로 중심 이동하는 것,
그것은 자연현상과 똑같지 않은가.
얼마 전 젊은 법관들의 대법관 추천에 대한 항변도,
엊그제 검찰인사의 파격도,
요즈음 의사들의 새로운 경험도,
어쩌면 자연현상,
우리사회의 전통적 권력이 자연스럽게 알맞은 위치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 아닌가.
어쩌면 그동안 너무 한쪽에 치우쳐 있던 힘들이,
이제야 몸부림하며 제자리를 찾으려 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권한과 혜택이 많은 곳으로 인간들이 몰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
자본주의의 경쟁사회에서는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권한과 혜택이 너무 한 곳으로 지나치게 치우쳐서,
공동사회의 다른 쪽 어디가 갈수록 어두워져 간다면,
함께 살아가는 삶에 갈등의 그림자가 짙게 되고
결국은 그 나쁜 결과가 부메랑이 되어,
지나친 혜택을 누리는 쪽으로 역반응될 것임을 우리는 미리 깨달아야 되는 것 아닌가.
있는 자, 힘있는 자들은
없는 자, 힘없는 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천부적 우월감을 버려야 할 것이다.
급속한 사회발전 과정상,
어쩔 수 없이 비합리적 제도에 의한 지나친 권한과 혜택이 주어진 것이지,
어려운 시험을 통했으므로 또는 힘든 시간들을 이겨냈으므로
다른 사람들과 당연히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너무 무식한 것이고 지나친 오만이며 편협한 특권의식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땀 흘려 열심히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
힘들이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 모두가 어렵게 힘들이며 오늘날 이 사회를 만들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
비가 오는 자연현상처럼
알맞게 비가 와서
농사일에도 좋고,
서울의 공기도 맑아져서 좋고,
새로운 위치에서 의사들의 병원경영도 좋아지고,
우리 모두가 함께 좋아지는 건강한 사회, 튼튼한 사회가 되었으면 싶다.
우리에게 자연은 무엇인지
우리는 그 자연의 순환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오늘날 우리사회도 자연의 바뀜처럼 비가 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바뀔 수 없는가.
어느 곳의 지나치게 넘치는 권위와 혜택이,
지나치게 모자란 곳을 향하여 알맞게 자연스럽게 그 중심이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인가.
정말로 어려운 것인가. 오른쪽 무릎이 엄살을 부리는지 예전 같지가 않았다.
집사람은 드디어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퉁’하는 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다행히 두 손을 땅에 대고 넘어져 있었다.
나무계단 위 젖어있던 빗물이 미끄럼을 태우고 만 것,
그만 한 것이 천만 다행.
앞으로 넘어졌으면 어쩔 뻔하였는가.
나의 발걸음도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오늘 비 오는 날 산행의 하산 길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 2007 OhmyNews
'카테고리(무소속)'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밤 비행기 속에서 2003.10.8? (0) | 2024.01.28 |
---|---|
'아직은 덜익은, 푸른 가을빛이 쏟아진다' (0) | 2024.01.28 |
'벌써 서울의 하늘은 뜨거워지고 숨이 막힌다', 벼락휴가를 다녀와서 2003.8.21? (0) | 2024.01.28 |
'자잘한 생각들이 금방 산을 이룬다', 둘째아들을 군대에 보내면서 2003.8.19? (0) | 2024.01.28 |
'행복? 뭐 별거 아니야' (0) | 2024.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