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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은 운명을 믿는가?'(3)

햄릿.데미안.조르바 2024. 1. 17. 13:29

1994년?

나는, 포트수단항 가까운 보세창고에서 수단참깨와 첫대면을 하고, 다시 카르튬으로 돌아와, 수단의 힐튼호텔에서, 언제올지 모르는 런던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릴없이 수영장에서 시간을 때우고 또 출장갈 때 가지고간 책들도 모두 읽어버리고...무료하게 시간이 남아돌아 미국 CNN 방송을 듣고 있었다.

'Northe Korea, Kim il-sung' 사망 뉴스가 긴급으로 자막에 들어왔다.

1994.7.??

서울은 몇백년만의 무더위가 찾아와 매일밤이 열대야라 하면 아우성치고 있었다.

 

수단에 드디어 출장간다고 하였더니, '그'의 첫마디는 ‘절대로 날 것을 그대로 먹지 말 것이며 특히 물은 호텔에서 제공하는 생수만 먹으라' 하였다.

호텔의 아침식사 뷰페는 말이 뷰페이지 먹을 만한 것이 도무지 없었다. 거칠은 식빵과 달걀후라이 정도. 우유는 겁이나서 마시지 못했다.

수단의 카르튬에는 유일하게 힐튼호텔이 있었는데 호텔방만 클뿐 잠만 잘 뿐 아무것 도 아니었다.

시도때도 없이 호텔방벽으로 도마뱀이 돌아다녔다.

서울로 국제전화를 하려면 호텔의 교환실에 신청을 하고 마냥 기다려야했다. 1시간 2시간 3시간...서울과 연결될 때 까지 기다려야 했다.

하루종일 기다려도 서울과 연결이 되지 않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엇다.

어쩌다 운좋게 걸려도 통화품질이 좋지 않아 바닥수준이어서 소리소리 질러대면서 통화하다가 그만 끊어져버리면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옛날 어렸을 적 시골전화국에서 서울로 전화신청을 하면 조금 기다리면 통화할 수 있었고 통화품질도 그닥 나쁘지 않았는데 이곳은 그 보다 훨씬 심하게 좋지 않았다.

 

수단에서 유일한 항구는 포트수단. 홍해 연안에 있는 수단 제2의 도시.

그곳에 가야 참깨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수단의 수도 카르튬에서 비행기로 1시간 거리. 홍해에 열려있는 수단의 문.

포트수단행 비행기는 엿장수 마음.

가고싶으면 가고 가고싶지 않으면 뜨지 않았다.

핑계거리는 많았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또는 비행기 활주로를 고쳐야하므로...또는 비행기 어느 곳이 고장이서 고쳐야 하므로...

아무리 예약을 했다해도 수시로 출발시각을 바꾸고 취소하는 것을 밥먹듯 하였다.

비행기 타기 훈련이었다.

매일 공항까지 가서 기다리고 다시 호텔로 돌아오기 연습.

그러하기를 몇 번일까? 서너번하면 보통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한번에 타면 그것은 행운 이상이었다.

나중에 보니, 장사속셈이었다. 손님이 가득차야 비싼 기름값등이 나오는데 만석이 되지않고 운행하면 그것은 국가적 손실이니 정책적으로 만석이 될때까지 승객모두를 똥개처럼 왔다갔다 훈련시키는구나 싶었다.

나는 이를 빗대어 한마디 하였다.

Sudanese Airline(S.A) means 'Stop always'

몇차례 비행기 타기 훈련을하고나서 포트수단에 가보니,참깨가 이 창고 저창고에 그득그득 쌓여있었다.

땟깔은 한국산이나 중국산처럼 하얗게 깨끗하여 좋으나 몸통이 통통하여 조금 커 보였다.

우리 소비자들의 입맛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우선 눈맛에 거스릴 것 같았다.

보통 국산모양에 길들여져 있으므로 중국산보다 통통하고 몸집이 조금 크니 소비자들의 눈에 어찌 보일지 궁금 걱정되었다.

그래도 기름짜는 용도로는 중국산대체품으로 충분히 시장성이 있을 것이고 아무런 지장이 없을 듯 싶었다.

거기에 고소함이나 고유의 향까지 맞아 입맛까지 잡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

좋은 참깨의 가능성이 보이기는 하엿지만 그러나 포트수단항까지 오기가 쉽지 않은 것이 꺼림칙하였다.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다.

어렵사리 비행기를 탄다고 해도, 사막의 열풍같은 무더위를 어찌 이겨나갈지 쉽지 않을 것이었다.

바지가랑이 사이로 쉴사이 없이 들어오는 사막의 열풍! 그냥 서있기만 해도 온몸이 줄줄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포트수단항의 유일한 호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Palace Hotel' ,정말 궁전같은 호텔일까?

말이 궁전이지 실제는 옛날 우리의 시골 여인숙보다 오히려 더 좋지않은 수준이었다.

너무 오래되어 건물이 낡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시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간신히 비를 피하고 잠자기 위한 곳 정도였다.

방천장에는 선풍기라고 매달여있는데 요란한 소리만 낼 뿐 전혀 시원한 바람을 불어오지 못하였다.

오히려 선풍기돌아가는 소리에 방안은 더 더워지고 있었다.

한밤 내내 자다가 깨도 깨다가 자고 또 깨고 거의 한숨도 자지 못하였다.

호텔의 아침식사도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훅 불면 날아갈 것같은 안남미형 쌀밥 그리고 달걀후라이 하나. 살아야 하니 먹어야 했고 잘 넘어가지 않은 흰쌀밥을 그냥 입속으로 꾸역꾸역 집어넣어야 했다.

오늘 이 괴로움이 훗날 언젠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것인가 잠시 기대해 보았지만 막상 큰 기대를 하고 싶지가 않았다.

고통은 고통이었지만 신음소리 하나 낼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소리내어 울 수도 없고 그냥 참아낼 뿐 속으로 속으로 집어삼킬 뿐이었다.

그러기를 이틀밤을 더 지내야했다.

수단참깨를 보았으니 바로 그 다음날 카르튬으로 떠났으면 좋았는데, 공항에 가면 그놈의 S.A는 뜨지않고 다음날 또 오라는 것.

그 '궁전같은 호텔'로 다시 와, 다시 그 지옥같은 밤을 지새우고...또 공항에 가면 또 내일 오라 하고...

다시 또 그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고...그리고...어렵사리, 카르튬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누가 가라고 떠밀어 온 것도 아니고, 가지말라고 해도 내가 자원해서 온 것인데 누굴 탓할 것인가?

 

오늘의 내가, 그 때 그 더웠던 밤들, 잠못이루던 밤들을 지새고, 그 꾸역꾸역 넘어가지 않는 흰밥을 집어삼켰던, 눈물없이 삼키기만 했던 그 밥들과 연결되어 있을까?

나의 운명일까?

나의 선택일까?

 

수단산참깨 첫 시장조사를 마치고 얼마되지 않아 나는 첫 시험 수입을 하였다.

첫 한국시장 반응을 보기 위하여 어렵게 어렵게 유통공사의 일본지사를 활용하여 시험수입을 해보았다.

시장상인들은 중국산 품질과 비교하여 좋지 않다고 불평만 늘어놓았지만 나의 판단으로는 품질상 중국산에 비해 우위에 있지는 않지만 쓰지 못할만큼 나쁘지는 않으며 특히 착유용으로는 크게 뒤떨어지지 않은 것으로 잠정 평가되었다.

문제는 가격이었고 중국산참깨 공급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그 대체품으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큰 수확이고 첫수입으로는 성공이었다.

 

-----------------------------------------------------해태.동양을 나와서...;내 회사를 차리다!

어찌된 까닭일까? 성공적인 시험수입에도 불구하고 수단산 참깨는 더 이상 한국시장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국산참깨에 비교하여 가격경쟁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수단 산지시장에 생각지 않은 큰 변화가 생겼을 것이었다.

가뭄등으로 수확량이 현저히 떨어져 수출경쟁력을 갑자기 잃어버린 것이었다.

반짝하며 한국시장에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는데 그 이후 몇 년간 한국시장에 들어오지 않아서 나를 포함하여 한국시장의 누구도 수단산 참깨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것도 나의 운명일까?

그때 계속해서 수단산 참깨가 한국시장에 들어오고 많은 사람들이 수단산 참깨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었다면...???

그때 나의 진로는 달라졌을까?

지금 나는 어찌되었을까? 다른 일을 하고 있읆까?

 

수단산 참깨가 다시 한국시장에 나타난 것은, 내가 수단에 다녀오고 또 시험수입을 하고.. 내가 해태상사를 떠난 바로 그 다음해였다. 1996년. 그러니까...수단에 다녀오고 3년후 ???

우리정부의 국제경쟁입찰에 수단산참깨가 전량 최저가로 전량 낙찰, 전량계약되어 수입되게 되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국내시장은 물론 홍콩과 유럽등 국제참깨시장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곳저곳에서 정부직영유통공사로 온갖 압박이 들어왓다.

시장상인들은 전량 수단산참깨수입은 불가하다고 정부를 압박하였고, 중국산을 취급하는 홍콩의 해태상사거래선은 중국산대신에 수단산응찰을 한 해태상사에게 계약취소를 종용하고있었다. 수단산공급자인'그'도 해태상사를 압박하며 전량 수단산참깨낙찰시키고 전량수입계약해야 한다고 해태상사를 압박하엿다.

나는 그때 해태상사를 그만두고 동양종합상사로 옮겨 마찬가지로 참깨입찰사업을 하고 있었다.

내가 떠난 해태상사는 갑작스런 수단산전량최저가로 인하여 사면초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정부는 정부대로 해태상사의 이중응찰을 비난하고, 홍콩의 중국산공급자는 공급자대로, 수단산공급자인 '그'는 '그'대로, 해태상사의 비윤리적입찰행위에 대하여 책임져야 한다고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전량 수단산으로 하자니 홍콩의 중국산공급자가 가만히 있지를 않을 것이고...시장상인들 주장을 받아들여 수단산계약을 포기하고 전량 중국산으로 가자니 수단산공급자에게 국제무역질서를 외면하는, 못할 짓을 하는 것이고...

유통공사는 빨리 결정하라고 매일매일 압박하고...

수단산공급자와 홍콩의 중국산공급자도 매시간 전화하며 해태상사의 결정을 압박해대니..

해태상사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동 구르고 있었다.

 

해태상사는 어찌 결정을 해야할지 난감할 뿐이었다.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때였다.

해태상사가 바로 결정을 하지 못하니, 모두들 나에게 전화하여 도와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유통공사의 본부장도, 홍콩의 중국산공급자도 그리고 수단산공급자인 '그'도, 이일을 어찌해야 좋은지, 모든 일을 내가 시작한 것이니, 모든 것의 시작이 나로 인하여 비롯된 것이니, 말하자면 ‘결자해지’차원에서 해결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엄밀히 말하면, 엄연히 다른 직장에서 근무하는, 동종경쟁업체의 임원일뿐이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해태상사하고는 이미 공적인 인연이 끊어졌으며 따라사 해태상사의 공급자인 홍콩의 공급자도 수단의 공급자도 공적으로는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뿐, 단지 사적으로는 친구수준일 뿐이었다.

유통공사측의 요청도 단순한 협조차원이지 특별히 책임이 따르는 업무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런 진척이 나오지 않자, 이제는 개인적 친분을 빌미로삼아 문제해결을 집요하게 요구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홍콩도, '그'도 심지어 유통공사까지 협박반애걸반 나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엇다.

나는 더 이상 이 문제를 차일피일해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내가 해결방법을 찾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입장이었다. 나는 동양상사의 임원으로서 이 일을 처리한다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다 판단되었다.

우선 내가 근무하는 동양상사에 사정을 설명하고 사표를 냈다. 동양상사에서는 사표내지말고 이 일을 처리해주라고 하였지만 나는 동양상사의 배려를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원칙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마침 동양에서 더 근무를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던 차 회사생활 그만두는 것을 조금 빨리 결정한 셈치고 결행하기로 하였다.

동양상사를 그만두기로 마음을 굳히니 일처리는 신속하게 진행 할 수 있었다.

유통공사의 본부장에게 나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수단산과 중국산을 반반으로 수입계약하되,

중국산의 가격은 수단산가격수준까지 내리게 하고,

국내상인들이 선호하는 중국산참깨를 수의계약형식으로 추가수입한다.

이 경우 중국산가격은 최소 불당20불정도 내려서 수의계약한다.

 

유통공사의 본부장으로부터 위와같이 해도 좋다는 전권을 위임받고나서, 홍콩업자와 수단의 그와 접촉하여 모두 승낙을 받아냈다.

전광석화!

이런 일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는 전범을 보이듯이 일괄처리해버리니 유통공사도 좋아하고 홍콩의 공급자도 불만없이 그위에 추가로 수의계약까지해서 8천통 전량을 수출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좋아하고, 수단산참깨를 공급하는 그도 8천톤계약이 취소될뻔하였는데 4천톤이나 계약하고 한국시장의 문을 활짝 열어졎혔다고 좋아하고...

모두가 승리한 게임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동양상사라는 안정된 임원자리를 내팽개치고 허허벌판 찬바람 쌩쌩불어대는 시장바닥에 나왔으니 걱정이라면 큰 걱정, 큰일이라면 큰 일이었다.

아무런 대책없이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원칙을 기준으로, 업무처리 도리상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었으니 정말 못말릴 팔자였다.

그때 해태상사가 수단산과 중국산 모두를 응찰하고 양손에 떡을 쥐고서..어찌할 바 모르고 우왕좌왕한 것이....

내가 그 문제를 풀기 위하여 동양에 사직서를 낸 것이...사직서를 내지않고도 풀어낼 수도 있었으나...

이것이야말로 나의 운명일까? 아니면 나의 의지가 반영된 나의 의지가 이끌어낸 나의 선택일까? 나의 운명적 선택일까? 선택적 운명일까?

 

그 일이 일어난 뒤로 정부측 방침은 1해외공급자 1국내대리인 체제의 입찰규정을 바꾸었다.

나는 동양을 그만두고 지금의 내회사를 차렸다.

보장된 자리, 안정된 사회적 지위.

아무런 계획도 없이 동양을 떠난 것은 잘 한 일일까? 나의 선택은 잘 한ㅇ 것일까? 이것도 나의 운명인가?

 

일단 퇴직금과 위로금으로, 동양의 임원퇴직금규정은 1년 근무할 경우 3년해당의 급여를 퇴직금으로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위로금을 더해서, 임원의 퇴직을 위로해주었다.

앞으로 3년을 버틸 수 있겠다 싶었다.

우리집 마님께는 퇴직금과 위로금을 몽땅 주고 앞으로 3년동안 아무런 수입을 기대하지 않기를 요청하엿다.

다짜고짜 아무런 설명도 없이 3년간 수입을 기대하지 말라니...그 잘나가는 회사 임원을 어느 날 갑자기 때려치우고 한다는 말이...????

우리마님;@@#$%%$????

나;........!!!!!!

 

사무실은 어디에 어떻게 마련해야할지??? 특별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한가지 떠오르는 것은...최소비용으로 오래오래 버틸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2010.2.1.월.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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