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출장여행기

2003.09.25

햄릿.데미안.조르바 2003. 9. 25. 16:02

2003.9.25. 목, 0030. KE682, 호치민 0040/서울 0750

밤 비행기는 항상 어수선하다. 방콕 자카르타 호치민발 서울행 비행기는 모두 한밤에 떠서 서울 아침출근시간에 맞추는데, 출발지 아열대의 밤은 항상 시끄럽고 어수선하다.

 

아침에 상여를 보고서는 오늘 무척 좋은 일이 있을 것으로 은근히 기대했었다.

오늘 서울에서는 타피오카 입찰이 있는 날이고 모처럼 좋은 가격을 만들어 회심의 일격을 노렸었는데, 그가 더 좋을 가격을 내었다니 놀랍고 괘씸하였다.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어찌 할 것인가. 다음 기회를 보아야겠다. 이렇게 된 것이 좋은 일이려니 하였다. 그가 또 장난을 쳤음이 분명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기다리는 수밖에, 어디까지 가는지 기다려봐야겠다.

 

오늘 또 신기한 일이 또 일어났다. 호치민에 들어올 때 같이 왔던 여승무원들이 서울로 들어가는 비행기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확률적으로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나이가 들어서인가 자꾸 무엇과 관련지어서 생각하려 든다. 여승무원들이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무슨 좋은 일이 있긴 있을 모양이다.

 

여러 음료중에서 또 ‘미모사’를 선택하였다. 삼페인+오렌지쥬스+꼬엥트로? 억지로 물어서 기록해둔다. 언제 또 이름을 기억못해 할퀴지 않으려면 말이다. 불쌍하다고 할 건가 사랑스럽다고 할 건가.

서울시각으로는 지금 새벽 3시. 이곳 현지시각으로는 1시, 출발예정시각이 지났는데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덜덜덜 떨고만 있다. 가벼운 빗방울이 창을 건드려도 비행기 안은 냉방이 돌지 않아 덥고 또 덥다.

입찰결과를 받아보고 처음에는 끝없이 화가 났지만 다시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하니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 고쳐 생각하였다.

Anger is your enemy. Just do play the game and enjoy it.

 

사업을 서서히 넘겨주고 길게 잡아 5년, 짧게는 3년 아니 1년 후, 그동안 하고싶어도 못했던 일들, 시간이 없어서 또는 돈이 없어서, 못했던 공부를 조금 사치스럽게 해보려고 했었는데, 그의 돌연한 공격으로 잠시 궤도수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거래선을 만나고 상담을 하다보니 어디서 힘이 나오는가 옛날처럼 신이 난다. 그 덕분에 다시 더 젊어지는 것인가.

상황을 설명하며 몰입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시간가는줄도 모르고 자기도취에 빠지는 모양이다. 계약을 하지못하고 돌아가지만 오히려 홀가분하고 앞으로의 해야할 일들이 벌써 바쁘게 보인다.

서울의 도둑놈을 잡기 위하여 베트남의 도둑놈을 만나러 갔는데 당장 도둑을 잡을 수는 없지만 한가닥 실마리는 찾았으니 어디가 끝인지 꼭 끝까지 확인할 것이다.

 

하늘로 머리두른 동물, 머리가 검은 동물을 기르지 말라고 했더라. 그래도 난 이를 믿지 않는다. 다만, 그 잘못이 믿음을 잘못 준 내게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언짢고 화나고 속상하지만 참는 자에게 축복이 있다고 했으니 꾹 참고 끝이 어딘지 꼭 확인할 것이다.

 

비행기는 어느사이 이륙하여 밤 하늘을 깜깜하게 날아간다. 서울의 신문들이 그동안의 소식을 읽어보라고 아우성이다. 신문들을 읽다보면 오늘은 잠이 올지 모른다. ‘미모사’를 마셨으니 여느 때와는 다르게 잠이 올지 모른다. 그러면 또 다른 일이 오늘 또 일어나는 것인가.

밤 비행기를 타도 잠을 자지 못하는 내게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2003.9.25. 목,0600, 8A, KE682,

얼마를 잤을까. 신문 셋을 모두 읽고서 잠을 청했으니 많이 잤어야 2시간 여. 아침 6시.

심한 흔들림, 이제껏 이렇게 흔들리기는 처음. 몸이 공중으로 한 번 튕기는 느낌이 들정도로 비행기가 세게 흔들렸고 그 바람에 잠이 깨었다.

서울까지는 아직도 2시간 여를 더 날아야 한다. 의외로 몸은 가볍다. 피곤하지도 않고 잠을 설친 후의 찝찝함도 찌부등함도 없다.

지난 5일의 출장이 빠듯하였지만 바쁘고 힘든 상담일정이 오히려 몸과 마음을 더 건강하게 만들었다는 증좌가 아닌가.

뜨거운 열에 달구어질수록 더 강해지는, 녹아 없어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철처럼 우리 인간이 철을 닮았는지 모를 일이다.

 

비행기 창밖은 온통 시커멓게 칠흑이다. 땅을 내려다봐도 온통 까맣게 어둡고 거대한 산이 되어있다. 불빛이 띄엄띄엄 건너 뛰더니 어느 곳에선 아예 선명한 직선을 그리고는 불길이 되어 뻗어있다.

한반도 어느 도시 위를 지나는 것일까. 큰 도로의 가로등일까. 어느 곳은 큰 산속에 불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불길이 번지는 듯 보인다.

 

하늘을 쳐다보니 별들이 총총, 뚜렷한 것은 제법 크다. 또 좁쌀같은 별들도 무수히 많다. 셀 수가 없다. 눈이 시릴정도로 촘촘히 박혀 있다. 누가 말했다. 하늘의 별은 문명의 발달 정도와 반비례 한다. 도시 문명이 발달할수록 도시의 불빛이 강하여 하늘의 별빛을 가려버린다는 것이다. 밤하늘의 별빛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인생이 정말 행복한 것인가. 어둠을 밝혀주는 도시의 인공불빛만으로 인생을 정말 편리한 것인가.

오늘 땅 위에서 하늘 위에서 하늘의 별을 가까이 보면서 질문하여 본다.

 

한참을 별을 보았더니 작은 별들 점박이 별들이 내 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상상속인지 착각속인지 셀 수 없는 수 많은 작은 점박이 별들이 촘촘히 하늘에 박혀있다.

상상일 것이다. 착각일 것이다. 착시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울에 가까워지면서 하늘이 하얗게 더 밝아오고, 시커먼 땅, 큰 산같던 땅은 머리 위에 희미하나 기다란 구름모자를 얹고 있다. 산 위에 떠있는데 공중에 떠 있는데, 산 위에 떠있는지, 땅 위에 붙어있는지 알 수가 없다.

 

여승무원이 얼큰한 라면을 끓여다준다. 이 맛을 누가 알 것이랴.

한식을 가까이 못한 5일 후, 이른 아침에 비행기 속에서, 라면의 얼큰함과 만난다, 상상만이라도 해보시라. 그리고 거기에 모닝커피까지. 아이들 말로 ‘죽인다’ 낮 보다 밤 비행기가 더 좋은 것이 밤을 도와 서울로 오다보면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 같기도 하여 좋기도 하지만, 딴에는 내내 밀린 신문들을 보는 재미, 잠이 오지 않으면 가져온 책을 읽는 재미, 출장중 일어났던 일들을 정리하는 재미를 주는, 시간이 널널하고 엉성한 밤 비행기가 좋기도 하지만,

이른 시각에 만나는 얼큰한 라면과 향긋한 커피냄새 때문에 더욱 좋다.

얼큰하고 짭짜름한 새벽의 라면은 뱃속을 후벼서 뒤집어버리는지, 이어지는 커피는 깔깔한 입속을 씻어내고 탑탑한 목속을 뚫어내는지, 나의 몸과 마음은 벌써 여독이 다 풀리고 만다.

거기에 커피의 향은, 코 끝을 벌름거리게 하는 커피의 냄새는 차라리 덤이다.

 

창 밖은 어느 사이, 20여 분이 지나는 사이에 활짝 열렸다. 시커멓고 커다란 산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대신 거대한 바다가 되어 나타났다. 검은 듯 연푸른 바다 위에 솜털 구름들이 수없이 물결이 되어 비행기와 함께 떠있다.

저 멀리 붉으레한 그룸띠가 만들어지고 그것은 수평선처럼 되어 또다른 하늘과 만난다.

태양이 이미 하늘과 땅을 지배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솜털같은 구름들이 또 어느 사이에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푸른 하늘이 내 머리 위 하늘 위에 있고 총총하게 빛을 내던 별들은 인사도 없이 하늘나라로 갔는지 하나도 없다. 땅도 보이지 않고, 불길처럼, 산불처럼 직선을 그리며 타는 것같던 도시의 불빛도 흔적이 없고 대신 망망대해같은 드넓은 하늘이 다시 눈아래 떠있다.

내 머리 위에도 내 발 아래도, 내 옆 창밖에도 온통 푸르고 하얀 하늘만 있다. 나는 하늘 속에 있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 꼭 1 시간이 지났고, 1 시간 동안 하늘은 이렇게 신나게 변신하였음이다. 아침 7시.

 

여승무원이 살갑게 또 친절하다. 돈이 말하는 것이려니. 다른 무엇이 있을까.

커피를 또 갖다준다. 창 밖을 자꾸 내다보고, 하늘을 쳐다보고, 뭔가를 계속 끄적대는 내가 이상한가 커피를 주면서 내 눈을 보았을까.

실내등을 나혼자만 켜고 있으니 미안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다.

 

기내방송은 인천까지 50여 분 남았다고 알린다. 현재 7시 5분.

창 밖은 완연히 밝아 아침이 시작되었고 바다와 땅과 산이, 강물이, 이제는 건물도 모양을 갖추어 아침 인사를 한다.

5일간의 출장이 끝나면서 새로운 날이 새롭게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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