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단산 참깨 2000톤, 정부와 수의계약 ‘농.유.공 Japan' 그리고 한동안 ’긴긴 잠수‘
서울로 돌아오자 마자, 나는 신속히 수단참깨를 어떻게 시장에 소개할지 고민고민하였다.
참깨는 정부가 수입권을 가지고 있으니, 해태상사같은 일반기업은 수입할 수 없으니, 농.유.공을 통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였다.
우선, 수단에 참깨가 있다는 사실을 은밀히 요로요로에 알리고 그 품질상태를 검사해보라하였다.
(한편으로는 국내시장의 참깨 큰손들에게도 수단산 참깨샘플을 보여주면서, 중국산과 비교검토해줄 것을 요청해놓았다. 일반 시장상인들은, 겉보기가 퉁퉁거려서 중국산만큼 인기 있지는 않을 것이라 하였고, 반면에 기름만을 짜는 곳에서는 기름나오는 수율이 중국산보다는 더 낫다는 평가를 해주었다. 고소한 맛은 아무래도 중국산만 못하다 하였다. 비교적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평가가 나왔다.)
나는 농.유.공과 긴밀한 협의에 들어갔다.
정부의 공식입찰에 바로 붙일 수는 없고, 일단 시험수입을 해서 시장반응을 볼 수있도록 해보자 건의.제안해보았다.
의외로 쉽게 반응이 들어왔다. 농유공 일본법인을 통하여 한번 시험수입해보자는 것.
(쉽게 반응이 나온 숨은 배경은, 수단참깨가격이 중국산에 비하여 월등하게 가격우위에 있었다. 100불 이상? 그리고 농유공 일본법인의 먹거리가 그때는 하나도 없었다. 수입원을 만들어주어야 했다.)
지금이야 농유공의 국영무역에 수의계약은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때만해도 ‘수의계약’을 명분만 확보되면..수의계약도 하던 시절이었다.
수단참깨 역사이래, 한국시장에 맨처음으로 수단참깨 2000톤이 들어오게 되었다.
1994년?의 일이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일본의 종합상사들은 이미 수단참깨를 수입하고 있었다.)
Huyton의 Mr.Philip은 좋아 좋아하며 ‘난리’였다. 역쉬 우리의 Mr.Park 하였다.
인도산 대두박 M.V.메해딘티로 고생고생하던 Huyton이 모처럼 활기를 되찾았다.
수단참깨는 그때 1995년 처음 들어오고나서 참깨입찰이 거의 매달 열렸지만 그 이후, 한번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동양그룹의 해외창구 신설법인 ‘동양글로벌’의 농산사업본부장으로 스카우트되어 이직할때까지(1995.5.1) 한국시장에 다시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마도, 참깨 작황이 좋지않아 해외수출할 정도로 물량이 많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의 경험치로는 다른 농산물도 그렇지만, 수단참깨는 한해걸러 해걸이 또는 그이상의 해걸이를 가끔 하는 듯 하였다. 이 풍작,흉작의 싸이클을 잘 이용해야 큰돈을 벌수 있다? 그일을 Huyton의 Mr.Philip은 ‘귀신’이었다.)/계속...(다음 이야기는 해태상사에서 동양글로벌로 이직하고나서)
'해태상사(주)에서(1980-1995)'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제경쟁입찰 ‘유감’, ‘휴가날짜를 잡아놓으면, 곧 취소해야 하다니@@@’ (0) | 2019.02.03 |
---|---|
갑자기 찾아오신, ‘오십견의 경고’,그러나, 내 마음근육과 다리근육이 더 커졌다? (0) | 2019.02.02 |
카르튬 Hilton 호텔에서, CNN '김일성 주석 사망‘, 서울은 열대야. (0) | 2019.02.01 |
아프리카 수단에 다녀오다..‘운명적인 첫 발’, 지금의 ‘대평원 농상주식회사’를 있게 한 시작. (0) | 2019.01.31 |
역곡역앞, ‘표주박’ 그리고 ‘석촌돼지갈비’의 추억 (0) | 2019.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