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칼럼] 민주주의와 관용 | |
김형태칼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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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수천 수억 년의 세월에서 보면 개별적 존재들은 그저 유전자의 숙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구체적 삶을 살아가는 개별자들에게 자신은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다. 세상에서 똑똑하고 힘 있는 이들은 자신들만 그럴 거라고 여기지만 가만히 보면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도 자신이야말로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한다. 존재의 피할 수 없는 속성이다. 그러니 각 개별적 존재들이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풀이 되었든 고기가 되었든 다른 존재들을 먹이 삼기 마련이다. 해탈이나 구원도 밥을 먹어야 사는 인간의 존재적 한계 때문에 애당초 도달 불가능한 허상이라 여겨진다. 남의 목숨을 먹는 이가 어찌 성인 성불을 논할 건가. 저마다 제 살길을 찾아가는 것을 존중하는 것, 이것이 정치적으로 보면 민주주의다. 하지만 서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생존조건에서 보면 다른 이들의 살길 찾기도 허용하는 것, 곧 ‘관용’이 존재의 필수 요건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관용을 이렇게 풀었다. “다른 사람들의 행위나 판단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 자신의 견해 또는 일반적인 방식이나 관점과 다른 것을 편견 없이 끈기있게 참아주는 것.” 이리하지 않으면 각자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하고 부득불 풀이나 고기 같은 남의 목숨을 먹고 내 주장이 옳다고 내세우는 민주주의는 어렵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제1차 회의에서 임시의장 이승만은 이렇게 개회사를 했다. “대한민국 독립 민주국회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에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 먼저 우리가 다 일어서서 성심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터인데.” 그의 지시에 따라 한 의원이 나와 길게 기도를 한 후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하고 끝냈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기독교 신자가 아닌 대다수 국회의원들이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 이 정황을 소개한 어떤 이는 국회 속기록에서 “이 장면을 보고 감회에 젖었고 잃어버린 10년의 좌파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오늘의 현실 앞에서 이 박사에게 무한한 존경을 올린다”고 글을 맺었다. 장차 공화국이 될 대한민국 제헌의회에서 자신의 개인적 종교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다른 의원들에게 강요한 행위는 그들이 내세우는 자유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지금도 비슷하다. ‘다른 사람들의 행위나 판단의 자유를 허용하고 자신의 견해와 다른 것을 편견 없이 끈기있게 참아주지 못하고’ 무조건 집회시위를 금하고 인터넷 7년치를 뒤지고 마구 잡아간다. 방어적 민주주의는 모든 것을 허용하지만 민주주의를 해치는 행위만을 허용하지 않는다. 생 쥐스트의 말마따나 “자유의 적에게는 자유가 없다.” 김형태 변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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