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기러기 카페 글모음)

[스크랩] 68 기러기 산행 후기-----청계산을 다녀와서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0. 21:10
2003.9.20.토. 청계산을 다녀와서
언제 비가 왔었더냐
언제 우리가 떠운 여름, 숨가쁜 도시에 살았더냐,
오늘 토요일 서울의 공기는 상큼하게 가을이었다.
어릴 때 소풍가는 기분이 되어 청계산에 어서 닿고 싶었다.
어제만 해도 비가 왔었고, 주말에 또 한차례 비가 올지 모른다면서 일기예보는 우중산행을 각오해야 한다고 알려왔었는데,
완연한 가을바람과 가을하늘을 주시니 내 마음 또한 가을마음이 되어 풍성해졌다.

어서 가서 우리 68 기러기 방 암수장난꾸러기들과 함께 이 맑고 상큼한 가을을 주고받아야 하는데,
다들 우리처럼 오랜만에 청계산에 소풍 가는지 좀처럼 차가 빠지지 않았다.
마음만 바빠질 뿐, 오히려 더 느리게 차는 움직이고 시간은 더 빠르게 흐르고 말았다.
토요일에는 비교적, 일요일에 비하여, 다닐만하였는데 오늘따라 받쳐주지 않는구나.
내 마음이 조급해져서인가, 빨리 가을이 찾아온 청계산을 만나고 싶은데 차들이 막고 서서 자리를 비워주지 않았다.

가까스로 오후 2시, 청계산 입구.
수남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뭔가 열심히 이야기하고 수남의 집사람도 뭐가 재미있는지 싱글벙글, 내가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정자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깨를 쏟아내고 있었다.
예상외로 차가 밀려서 모두들 늦을 것이라, 수남부부의 깨 쏟는 것을 성질 나쁜 나는 두고만 볼 수 없어 무참하게 허물어버렸다.

하나둘 기러기들이 날아들었다. 찬규, 상숙, 영희, 용환, 차가 밀리고 버스가 시원치 않아서 모두들 시간을 도로에 버리고들 찾아왔다.
결혼식 참석하고 오면 많이 늦을 것이라 하던 인옥이도 언제 도착했는지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웃옷에 모자가 서구식으로 '찬손 부르튼손'을 닮아 멋있었다.F와 M을 새삼 알게하여 기러기방을 활기차게 한 숨은 공로자인데, 오늘 명칼이 없어 서운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부부. 모두 아홉이 2시 40분 경에 산행을 시작하였다.

참석이 여의치 않을 것이라 하던 상숙이 모처럼 산행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모스크바에 딸을 두고 왔으니 마음 속에 눈물이 고였을 터인데 오늘 청계산에 훌훌 묻었으면 싶었다.
가족과 함께 부산에 가야하는 명숙, 토요일에도 영업을 해야하는 찬웅, 가족행사로 광주에 가야하는 동원, 학회일로 원주에 가있는 상태, 지방에서 연락이 되지 않아 올라오지 못하는 종상, 아픈자를 버릴 수 없는 누렁정희가 함께 산행을 못하는 것은 아쉬움이었다.
영신과 영애는 하산 길 뒷풀이에는 얼굴을 보여줄 수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찬규와 영희는 훨훨 날아다녔다. 어찌나 빨리 오르는지 그들을 따라잡으려다간 숨이 넘어가는 수가 보여서, 꾀를 내어 아예 천천히 가능한 한 많이 쉬는 곳을 찾아내었다.
배도 깎아먹고, 용환이가 가져온 새알같은 귤맛도 보고, 오이도 통째로 아작아작하고,또 영희가 만들어온 커피는 끝내주었다.
그리고 산에 왔다는 것을 증명해주기 위하여 찍기 싫어하는 사진도 몇 방 찍어야했다.
나는 사진 찍는 솜씨가 훌륭하니 손이 흔들리면서도 크게 염려할 필요없다고 큰 소리로 넘어가려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은 눈치였다.
나중에 사진을 보면 알겠지 뭐.

오후 3시 30분 경. 벌써 매봉 정상 584.5 미터. 수남의 집사람이 처음이라 조금 힘들어 했지만 정상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힘이 나는 듯, 좋아하였다.
오늘따라 매봉 정상에는 왠 사람들이 바글바글, 온통 시장바닥이 되어 소란스러웠다.
수남은 집사람에게 주고싶었는지 모두에게 아이스케키 하나씩을 입에 물려주었다.
지난번 맛 보았던 막걸리가 생각되었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니 더 마시고 싶었다.

하산 길은 오히려 더 힘들었다. 내려가는 길에 여기저기 만들어 놓은 나무계단들이 우리의 보폭과 엇박자가 되어 무릎에 부담이 되었다.
천천히 따박따박 내려가는 것이 정답. 덕분에 올라올 때는 보지 못했던 높아져가는 가을하늘도 우러러 보고, 가을색을 띠어가려는 나무들도 들여다보고, 이제 솔솔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맞으며, 가을이 얼마나 익어가나 냄새 맡으려 해보았다.

막힌 도로 위 차 속에서, 늦게 날아오는 기러기들을 기다리며 산 입구에서, 바라다 보이던 청명한 초가을 하늘은 벌써 사라지고,
오후 5시가 넘어가니 산 속은 땀에 젖은 옷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여름의 그것은 아니었다. 가을, 초가을의 냄새가 몸에 배어들었다.

산 속의 시계는 빨리 가는가. 벌써 6시가 다 되어갔다.
영신이와 영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서둘러 ‘솔밭’ 우리콩 순두부집으로 달렸다.
토요일에도 일이 있는 영애는 산행은 함께 못해도 뒷풀이는 빠지면 병난다하니 어찌할 것인가,우리가 참아야지, 영신은 아직 출발전이라고 해서 오지 말라고 해버렸다.

해물파전을 뒤집고 있는 아줌마의 손길이 바쁘고, 누르스름하게 익어가는 파전의 몸매가 먹음직스러운데, 그 냄새가 허기진 우리의 눈을 홀리고, 우리의 코를 후벼대는데,
주문받아야 하는 다른 아줌마들은 나와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주문을 받지 않으려고 애쓰는 웃기는 장면이었다.
맥주를 어서 빨리 들여마셔 뱃속을, 마음속을 시원하게 칠해야 하는데 와야할 맥주도 우리들 마음을 더 태워야 했는지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았다.
급한 놈이 뛰고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 했었다고 수남과 용환은 학교에서 배웠겠다, 그들은 오지 않는 아줌마들을 대신하여 주방으로 달렸다.
쏘주가 빠지면 큰 일 나는 것, 찬규와 상숙도 덩달아 뛰어 들었다.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영신이 어둠을 뚫고, 차 속을 뚫고 날아들었다.
우리들 밥값과 술값과 안주값까지 모두 계산해주려고 왔다는 것이었다.
나라면 오지 않았을 터인데, 영신은 나하고 달라도 많이 달랐다.
그러니까 좋은 신문 만들어내는 칼럼도 쓰고, 얼마전에는 더 높은 ‘수석’논설위원이 되었다는 것 아닌가.

음식을 기다리다 지쳐서 영희의 선창으로 처음에는 물잔을 높이 들고 ‘위하여’를 하였는데, 드디어 마침내 해물파전이 오고, 두부김치도 오고, 맥주와 소주, 막걸리도 와서, 다시 ‘위하여’ 하다가 나중에는 구호가 ‘진달래’로 바뀌었다.
그 뒤로 한 번인가 두 번인가 ‘진달래’, 시도 때도 맞지 않은 진달래를 우리 순진하기만한 암수 기러기들이 뜻도 모르고 소리쳤다.
나는 짓궂게도, ‘택씨’로 맞받아 치면 더 재미있다고 너스레를 떨며 악담을 부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청계산 ‘솔밭’에서 ‘놀고 있었다.’
우리집사람은 너무 천방지축 떠들어대는 자기 '남방'이 위험하고 미워보이는지 자꾸 그만 하라는데 나는 잘 들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ㄴㅏ는 용환이 핸드폰을 몰래 가지고 가려다가 막판에 인옥이의 재치때문에 들켜버렸다. 왠 들어보지 못한 칼러링소리가 내 주머니에서 나다니, 당한 줄도 모르고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지라고 별 수 있어?

용환의 금요강좌 클린턴 이야기가 너무 야릇하게 이중플레이 하는 것 아니냐, 또 최소 일주일에 두 번은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그리고 지난 7월 제헌절날 산행 뒷이야기까지 복습하다보니 3시간은 너무 부족하였다.
분위기 잘 띄우는 동원이가 없으니 조금 허전하였지만, 오늘의 기러기들은 언제 그렇게 재미있어졌는지 모두들 한 솜씨하는 선수들이었다.
처음에는 글쓰기가 서먹서먹하였지만, 못쓰면 못난대로 올려버릇하니 편하고 점점 솜씨가 늘아난다는 영애의 말은 '씩씩하게' 자라나는 우리의 꿈나무 같았다.
기러기방의 게시판 꼬리말들이 재미있는 사연들을 재생산하는 듯 하였다. 쉽지는 않겠지만 찬규와 영신, 상숙 그리고 다른 기러기들도 사랑방 게시판에서 언제 곧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주위는 벌써 캄캄해지고 암기러기들은 집에 가는 통행금지시간이 있대나 없대나, 밤 8시 반이 넘어가니 더 떠들며 버티기가 미안해졌다.
당장 다음달에 한번 더 산행을 하자는 걸, 귀한 것은 서로가 아껴 가면서 봐야 하는 것이라 하여, 11월 15일, 토, 오후 2시 다시 청계산 입구에서 만나서, 매봉을 거쳐, 이번에는 옛골로 내려가기로 하였다.
북한산에는 언제 가볼까, 내년이나 가게 되는 것인가.

당장 다음달 만나는 대신, 순천에서 이정희가 박주인군 둘째 결혼식 참석차 올라온다니, 10월 5일, 12시, 서울대 근처, 낙성대 또는 서울대 구내식당 어디에서 ‘번개팅’을 하기로 하였다. 공교롭게 마침 연휴 끝이라 선약이 잡혀있을 기러기들에게는 미안하였지만, 우선 순천에서 올라오는 정희에게 맞추기로 하였다. 선약이 이미 되어있는 기러기들은 또 다음 언제 자리를 만들면 되는 것이니 서로 편하게 있는대로 움직이기로 하였다.

다음에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버티며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을 웃기는, 정말 웃기는 암수 기러기들을 오늘 나는 보고 말았다. 앞으로 시도 때도 없이 '번개'하자고 하면 이 일을 어찌 감당하나 걱정이 되었다. 나는 본래 쓸데없는 걱정을 남들보다 먼저 하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지만..............................
오늘 토요일, 청계산의 기러기들은 산뜻한 초가을 하늘을 신나게 날아다녔다.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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