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훗날, 나의 손자들, 성준과 윤서,이 커서, 우리 할아버지는 왜 '농대'에 가셨을까? 고교성적이 좋지않아서, 소위 '밀려서' 마지못해 '농대'를 가셨는가?
대답은, '그렇지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7순의 나이가 들어서도, 아직 그 분함, 농대에 대한 사회적 불합리한 평가=폄훼 심지어 냉대를, 아직도 7순의 나이에도 '그러려니'하면서 받아들이지못하고, 중언부언하기로 하였다.
서초동주민센터에서 팩스로 나의 모교인 광주제일고등학교에, 고교3년간 성적표를 신청하니 2-3시간후 바로 발급해주었다. 비오는 날, 성적표를 받아들고...먼훗날 사랑하는 나의 손자들 성준과 윤서의 이해를 돕기위하여, 어쩌면 '변명'으로 들릴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생각나는대로, 앞뒤 선후없이, 이미 나의 블로그에 비슷한 이야기들이 쓰여있을 것이지만, 성적표를 받아드니 50여년전 그때가 새록새록 들어왔다. 우리집사람은 못마땅해한다. 아직도 그 분함, 그 한을 '삭여내지못하고' 못난 사람이 또되어서, 나는 못나지않았고 주장하지만 결과적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너는 못났다'라고 소리치는 것 아니냐는...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리치고 싶다. '나는, 지금은 잘났는지 못났는지, 잘모르나, 그때는 잘났었다'라고...
-나의 고교(광주일고 15회, 1967년 입학, 1970년 졸업) 3년 성적표(3개년 우등상);
1학년(1967년); 반 6/63(5반, 김정기선생님, 우등상), 전체 30/501
2학년(1968년); 반 3/57(7반, 김영원선생님, 우등상), 전체(이과) 13/289
3학년(1969년); 반 1/60(7반, 강태풍선생님, 우등상, 반장), 전체(이과) 4/293
성적표 유감1; 며칠전부터 나의 고등학교 성적표를 받아서 블로그에 올려놓아야겠다 생각하였다. 왜? 무엇 때문에 굳이 오래전 고등학교성적표를 받아서 뭐 하겠다는 것이냐며 엉뚱하기도하고, 생뚱맞기만 할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모두들 의아해할 것이고 본인인 나자신도 굳이 고교성적표를 블로그에 올릴필요까지 있겠느냐 많이 많이 쑥쓰러운 일이라 자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얄궂다’싶은 이 행위를 그래도 하는 것이 좋겠다싶었다.
(말이 길어지고 중언부언하는 것이 바로 굳이 성적표를 올릴 필요가 있겠나싶기도 하지만, 그러나 또 그반대로, 이렇게라도 해서, 오랫동안 내 마음속깊이 웅크리고 속상해했던 ‘열등감’을 풀어내서 터트려버리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싶었다. 이렇게해야했던 큰이유, 유일한 이유는, 나의 사랑하는 ‘손자들’에게 할아버지는 세상사람들이 평가해왔던 것처럼, ‘비인기학과’를 입학한 것이 반드시 ‘성적’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해주고싶어서였다. 할아버지의 고교성적표(특히 3학년)를 보고, 성적 때문에 ‘비인기학과’를 지망한 것이 아니었구나라고 평가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지질구질하게 설명을 늘어놓는 것 자체가 참 구차스럽긴하지만, 그래도 구차하긴하지만 이렇게라도 ‘나는 그렇지 않았다’고 소리쳐보고싶은 것이고 나의 사랑하는 손자들이 할아버지의 이런 구차함을 널리 이해해주기를 소망해본다.)
유감2; 이왕 이렇게 구차하게 구질구질하게 고교3개년 성적표를 블로그에 올려놓았으니 우리 손자들의 이해를 돕기위하여 그때 당시의 대학입시상황(일류고와 일류대의 일반적평가)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해보고자한다.
고등학교 평준화(1980년? 전후)전에는 소위 명문 고등학교가 존재했었다. 명문학교의 기준이 매우 불합리하고 비합리적이긴해도 그때당시에는 얼마나 서울대학교에 많은 졸업생들이 합격하느냐에 따라 명문고교의 순위가 결정되었다.
그에 따라, 1.경기고 2.서울고 3.경복고 4.5.6. 경북고.경남고.부산고 7.광주일고 8.9.10.대전고.전주고.인천제물포고.용산고등이었다. (1.2.3위는 거의 변동이 없었으나, 4.5.6 위 그리고 7.8위는 그때그때마다 순위가 업치락뒤치락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의 모교인 광주제일고(광주일고)의 경우는, 서울대에 한해 70-80여명의 현역을 합격시켰고 재수.3수 졸업생까지 하면 120-150여명까지 서울대에 합격시켜왔었다.
내가 졸업하였던 1970년도에는 서울대에 70여명이 합격하였으니, 반에서 10등 내외의 성적이면 서울대에 갈 수 있는 성적이 되었다. 물론, 성적순으로 모두 서울대를 가는 것은 아니고, 가정의 경제력과 개인의 취향에 따라, 서울대를 가지않고 연.고대를 가기도 하고, 서울유학에 대한 경제적 부담 때문에 전대의대를 진학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의 경우, 반에서 1등을 하고 이과전체 300여명중에서도 최상위급인 전체4등의 졸업성적이었으니, 서울대 이과전공분야의 어느 학과를 가도 합격가능한 성적이었다.
(학과에 따라서, 반에서 10여등 하는 성적도 서울대에 합격가능한 성적이니 반에서 1등을 하였던 나는 서울대 어느학과에 가도 넉넉히 합격할 수 있었다. 소위 당시 최고인기학과였던 서울대공대의 전자공학과.화학공학과.기계공학과도 나의 성적이면 충분하였다. 솔직히 그때는 의대에 대한 일반학생들의 인기는 그다니 크지않아서, 요즈음은 상위급 성적의 대부분이 서울대의대를 지망하고있지만 그때는 의대에 대한 인식이 요즈음처럼 절대적이지않았으면 소위 커크라인으로 말하자면 서울대공대 최상위 학과의 커크라인보다는 아래에 있었다.===여기서 커트라인에 대한 일반상식의 오류.허상이 있다해도, 커트라인이라는 ‘최하위성적’으로 해당학과의 모두의 성적을 평가한다는 것이 매우 불합리.비합리적이긴하지만, 그렇다해도 커트라인 보다 더 ‘간단하게’ 더 ‘편리하게’, 집단의 순위를 결정하는 기준이 현실적으로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일단 인정하고 넘어가자.)
(커트라인이라는 괴물이 학생들의 성적을 거칠게 난도질해버리는 입시사회에서, 우리 교육현장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하겠다. 커트라인이라는 괴물이 나오게 된 배경은, 그때 우리학교의 성적이라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장에서는, 사지선답형 문제를 누가 더 잘 푸느냐에따라서 학교성적이 결정되는 ‘비합리.불합리’한 우리교육의 현장때문이었다. 주관식 문제가 아닌 넷중 하나를 골라내는 객관식 문제에서는, 학생의 능력이 객관식문제를 누가 더잘 푸느냐에 따러서 결정되는 것이니, 여기서 비롯된 ‘커트라인’이라는 비합리적 ‘잣대’로 학과의 순위를 결정하는 것이니 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비합리적인 것인가!!!
그런데도, 우리사회는 불합리.비합리 투성이인 ‘커트라인’이라는 잣대로, 학교와 학과의 순위를 결정해버리니 커트라인이 낮게 비교되는 ‘비인기’대학이나 ‘비인기’학과에 속하는 학생들은 어디에 호소해야할까?
지금 이글을 쓰고있는 내 나이 70이 거의 다되었는데, 더욱 더 뼈저리게 느껴지는 것은, 어떤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전혀 가능하지않다고 이해하게 되었지만...(나도 대학 다닐때나 사회초년병때나 사회생활을 왕성하게 하던때에도 어떤 사람에 대한 평가를 매우 부적절하게 해왔던 것을 고백하지않을 수없다. 그러나 지금 이나이에는 어떤 사람을 무엇으로 절대, 절대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자신있게 말해야한다.)
인간을 어느 기준으로 간단하게 평가할 수 없는 것인데도, 우리는 우리사회는, 학교성적에 대하여, 4지선답형인 넷중 하나에서 정답을 고르거나 둘중 하나에서 맞는 것을 골라내는 O.X, 기회주의적 안목으로 '성적‘을 주고...입학시험에서는 ’커트라인‘이라는 괴물 잣대를 통하여, 당락을 결정해버리고 대학이나 학과의 순위를 결정해버리는 불합리.비합리적 평가를 그동안 조금의 반성도 없이 자행해 왔다는 것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유감3; 왜 ‘농대’를 갔느냐라고 나에게 물어오면 나는 이런 예를 들어준다. '국산차를 타면 부자가 아닌가? 외제차를 타야만 부자인가요?'. '농대'를 갖다고해서 꼭 성적이 나쁜것은 아니라는 빈정투 항변인데, 그래도 마음 속으로는 정말 속상하고, 괜히 나의 마음이 그냥 오그라들곤한다.
‘왜냐하면...’이라고 설명을 해야하는데, 아무리 내가 설명을 한다해도 그것은 ‘억지처럼’들릴 게 뻔하고, 상대방의 선입관은 이미 만들어져있기 때문에, 왜 농대르 갔느냐고 물엉ㄹ때마다 나늠 매우 궁색해진다. 나는 나의 이런 형편이 대단히 불만스럽고 화가 나고 속상해서 말문이 막히고 만다. 변명처럼 들리고 변명을 해야한다는 것이 정말 속상하다.
설명을 많이 해야한다는 것은 약자이기 쉽고, 설명은 변명처럼 들리기싶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울화통이 불불 끓는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서는, 조금 얼굴이 두꺼워져서, 왜 농대가 갔느냐면...하고 설명을 하기전에...나는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말로 시작한다. ‘어, 그때는 공부 제일 잘하는 학생이 농대를 갔어요. 나처럼 반에서 1등을 해야 농대에 도전할 수 있었지요. 지금은 모르겠지만....하하하’ 왜 농대를 갔는지 구차하게 여러 설명을 변명처럼 하지않아도 좋았고 오히려 은연중에 나는 공부실력이 조금 못미쳐서 밀려서 농대에 간 것이 아니고 명문고에서 1등을 했었다는 자기자랑을 은연중 하였으니 꿩먹고 알먹고 아니겠는가 하핳)
(법대나 의대를 졸업한 사람은 굳이 설명을 하지않아도, 변명은 당연히 할 필요도 없고...상대방이 이미 먼저 ‘규정’을 해버린다. 질문자체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내가 해줄수 있는 설명은, 그래도 변명처럼 들리지않겠다 싶어서 ‘’국산차를 타면 품격이 떨어지고 외제차를 타면 품격이 올라가는가?‘’
벤즈를 타면 우리사회에서는 더 높이 평가해주는가? 국산차를 타면 왠지 격이 조금 떨어지는가?
우리사회의 평가가 그렇지않은가? 맞다. 그러나 국산차를 타는 사람들중 상당수는 불편하고 불만스럽다.
국산차를 타는 사람은 정말로 돈이 없는 것인가? 외제차가 괜히 싫은 사람도 있기도하고 국산차를 사줘야 국내자동차산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싶은 충정도 있을 수 있는데 우리사회는 시시콜콜 따지지않고, 일방적으로 도매값으로, 외제차 타는 사람을 더 평가해준다.
유감4; 내가 서울대의 비인기대학인 ‘농대’를 선택하게 된 것은 '운명적‘이었다. 비인기대학인 ’농대‘에서 그래도 인기학과인 ’식품공학과‘를 선택한 것은 운명이었다. 나의 자유의지가 작용한 ’선택적 운명‘ 또는 ’운명적 선택‘이었다.
앞에서 그당시 서울대에 졸업생을 많이 합격시키는 소위 명문고등학교의 존재가 있었으며 그중 광주일고에서 반에서 1등을 하고 전체에서도 최상위성적이면 어느 학과를 선택해도 무난한데도 굳이 ‘농대’를 선택하고 ‘식품공학과’를 선택한 것은 ‘운명’이었다는 말외에 더 마땅한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나의 블로그에서 이미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지만, 다시 이곳에서 정리하자면, 고3 후학기가 되자 나는 이과에 대해서 급하게 ‘회의’에 빠지기 시작하였고, 그 탈출구로 4년 전액장학금으로 유혹하는 고대 안암장학생에 도전하였지만 어찌된 노릇인지 나에게는 ‘합격통지’가 오지않았다. 배달사고인지 아니면 무슨 이해못할 사고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능 ‘운명적’으로 고대안암장학생이 되지못하였다. 나는 이것도 ‘운명’이라는 말고 풀어보고싶다.(고대 안암장학생 신청자격은 최근3개 학기의 성적이 전체 3%내의 우수학생이어야 가능하였는데, 보통 명문고의 우수학생들은 안암장학생 신청을 하지않고, 소위 서울의 2류나 지방의 일반고의 성적우수생이 지원하는 것이니, 나처럼 명문 광주일고에서 매학기 3%안에 드는 성적을 가진 학생은 당연히 수석을 하고도 남는다는 것이고 덧붙여서 왜 굳이 안암장학생이 되려고하는지, 서울대와 고대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너는 잘 이해를 하지못한다하면서 나의 고대안암장학생지원을 극구 말리셨던, 나의 고3담임선생님...그는 내가 수석 안암장학생이 된다해도 당연한데 왜 합격통지가 오지않느냐고 의아해할 정도였다)
나는 이과에서 문과로의 탈출이 좌절되자 급하게 서울대의 다른 문과로 가느냐 아니면 이과전공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했다.
어쩐일인지 ‘공대’는 그냥 가기싫었다. 괜히 삭막하고 여유가 없을 것같아서 처음부터 선택지에서 제외되었다. 그당시 사람들은 ‘서울대공대’는 이과생들중 최고인기대학이었는데 나는 전혀 아니었다. 잘되어봐야 ‘공장장’일 것인데 어린생각에 ‘공장장’정도는 눈에 차지않았다.
(나중에 사회생활을 해보고 나의 시야가 넓어지고서는, 공대출신들의 진출분야가 매우 다양하고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공대졸업생들이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공장장’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공대졸업생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진출분야가 무궁무진하고 특별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사회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공대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다. 다만, 나는 다른 과목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물리.화학등 과학과목에 크게 흥미를 갖지못하였으므로 공대진학을 하지않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타고난 ‘기계맹’이다. 집안의 전기제품등에 대해서는 아예 손도 대지못하는 100% 기계맹이다.)
(또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고교성적기준으로해서 그때 인기학과인 전자공학과.화학공학과.기계공학과등을 그냥 무작정 선택해서 일단 입학을 하고 그이후는 그 상황에 따라서 나를 맡겨두었다면, 비인기대학인 ‘농대’를 선택한 불합리한 사회적 냉대.폄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니 정신적 건강에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ㅇㄹ 해보고, 만일 공대에 입학하고 맞지않으면 전학을 하거나 새로이 입시를 치러 다른 대학이나 다른 전공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않은가? 지금 사회적으로 유명한,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민주당 대표인 ‘이해찬’등 서울공대에 입학후 다시 시험을 보아서 서울대 문리대에 진로를 바꾼 사례도 있고...나의 일고동기동창중에도 서울대공대에 입학후 법대나 상대로 전과 또는 전학 또는 졸업후 '학사편입'을 하여 대학원을 가고 해외유학을 갔다와서 대학교사가 된 친구들이 여럿있다...나도 그렇게 할 수도 있었는데...실제로는 재수하는 것도 그때는 '불가'하다는, 가정의 경제형편때문에, 이러한 특별한 경우의 수를 고려할수는 없엇을 터이지만.... 나는 아예 처음부터 ‘공대’는 기계맹인 나에게는 절대로 맞지않는다 미리 판단하고 ‘농대’를 선택하여 그많은 사회적 냉대를 감수하는 ‘운명적 선택’을 하였으니 이또한 운명이란 것 아닌가?)
내가 커서 되고싶었던 것은 ‘학교선생님’이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사대를 가야하는데, 모든 선생님들이 극구 말려서 어린마음에 ‘사대’는 가서는 안될 곳으로 알고 금방 포기하고말았다. (돌이켜보면, 그 선생님들께서, 직업으로서 지금의 교사자리는 비록 사회적으로 크게 대접받지못하고 또 경제적으로도 충분치 않긴 하다해도, 후학을 가르치는 위치는 그 무엇보다도 비교하고 바꿀 수 없는 매우 귀중한 직업이니, 너처럼 최우수학생이 사대를 지원하는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다. 다만, 지금의 교사에 대한 평가가 매우 박하므로 이를 극복할 큰 용기가 필요하다. 너의 교사에 대한 꿈이 계속 커나가길 바란다...라고 조언해주었다면 나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한발 더 나아가서, 그때 선생님들이 '사대'는 중고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곳이지만, 사대를 가야만 후학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학교수'가 되면 대학생들을 가르칠수있는 길이 있다. 대학교수가 되려면 꼭 사대를 가지않아도, 각전공분야별로 대학원을 가고 또 해외유학을 가면 보다 한차원높은 교육자로서의 길이 있다라고...폭넓게 교육자가 되는 길을 사회를 아직 제대로 보지못하는 어린 제자에게 설명해주었다면 어찌 되엇을까? 나는 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길목, 대학입시를 앞두고, 대학을 선택하는 또 전공학과를 선택하는데 어떤 결정을 하였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운명의 손길'이 있는 것같다. 물론 나의 자유의지가 선택을 좌지우지하지만 그것 또한 '운명'이 아니겠는가 하는 '운명적 선택' 또는 '선택적 운명'아니냐는...)
당시 인기가 좋았던 ‘공대’는 기계맹인 나로서는 생태적으로 싫고 또한 당연히 선택지는 안되었고 그 다음, ‘사대’는 입달린 사람은 모두 장래성이 크지않아서 ‘비호감’으로 금방 포기하게되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의대’가 남았는데, ‘의사’에 대한 교과서적인 상징성이 다가와서 의대가는 것이 좋겠다싶어서, 가족들에게 내 뜻을 밝혔더니 금방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다’였다. 빨리 대학졸업해서 집안경제를 보살펴야하는데 6년이나 학교를 다녀야하고 또 거기에 의대학비가 만만치않다는 것. 나는 가족들의 반대에 크게 이의를 달지않고 의대가는 것을 선택지에서 또 제외하였다.
그러다 보니, 남아있는 대학이 없었다. 또다시 문과로 전향해서 법대나 상대에 도전해볼까 하였지만, 서울대의 문과는 이과에 비하여 합격이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어서 재수를 각오하지않으면 안되었다. 그당시 우리가정형편상 서울에서 재수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수없었다.(나는 고교1년과 3년때 입주가정교사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농대’를 가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어찌된 일인지 ‘농대’에 대한 좋은 점들이 줄줄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자연과 가까이 함께 하는 것이고, 목장.과수원등 전원생활도 목가적으로 들어왔다. 더하여 내가 농촌에서 나고 자랐는데 지금의 농촌환경을 개선하는데 ‘큰일’을 해야하고 할수있다는 생각도 들어왔다.(광주유학생활중 자취를 하면서 도시가구와 농촌가구의 불평등에 대하여 몸소 느꼈던 바도 있었다. 광주에서는 집한채 가지면 아들딸들을 교육시킬수있는데 농촌에서 도시로 자식들을 공부시키려면 나처럼 자취하고 왜 고생해야하는지 그때는 나중에 이를 개선시켜야겠다는 생각을 어린마음에 한바도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농촌환경을 개선하고자 하였다면, ‘농대’가 아닌, 법대나 상대를 가서 행정고시를 해서 고위행정공무원이 되거나 또는 정치계로 진출하여 힘있는 자리에 있으면서 농촌환경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일을 할수있었는데, 농촌환경 개선을 위하여 ‘농대’를 선택한 것은 그당시로는 비현실적 접근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내가 '농대‘를 선택하게 된 결정적 생각이었는데, 수석합격을 하면 5.16장학생을 받고 대학생활을 걱정없이 할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이 크게 다가왔다. 우수학생들이 몰리는 인기대학.인기학과에 가지않고, 상대적으로 우수학생들이 오지않는 비인기대학인 ’농대‘를 선택하면, 나의 성적정도이면 수석입학이 그리 어렵지않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이 들어온 것이었다. 그래서 위와같은 이유로, 단과대학별 호.불호,장래 사회진출 또 가정경제형편등을 고려해서, 나의 선택지는 급기야 ’농대‘로 끌리게 되었으며 그 다음, 그러면 전공은 무슨학과를 할 것이냐였고, ’식품공학과‘를 선택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않았다.
(우수한 학생들과의 힘든 경쟁을 피하여, 비교적 경쟁이 심하지않을 분야에서 머리 역할을 하고자 한 것은, 참...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모르는 결정이었다. 힘든 곳에서 우수학생들 사이에서 경쟁하면서 성장하는 것인데 미리 경쟁을 피해 안일하게 안전을 추구하였다는 것은, 아무래도 수동적이고, 모든일은 정면돌파하면서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발전이 있는 것인데, 우수학생을 피하여 농대를 선택한 것은 큰 잘못된 결정이었다 할 수 있다.)
‘식품’이라는 분야가 먹고 살아가는 인간의 기본생활이니 아무도 무시하지못하고 배불리 먹고살수있다는 초보적 생각이 들어왔다.(순진하게도 나는 식품공학과 졸업후 ‘두부공장’을 운영하면 먹고사는데는 지장이 없고 사회적으로도 충분히 대우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얼마나 순진하고 어린 생각이었던지@@@@)
그 위에 ‘식품공학과’는 신설학과로서 선배가 없으니 바로 나만 잘하면 앞길이 무한정으로 열려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크게 들어왔다. 비인기대학인 ‘농대’에서는 최고인기학과였으며 ‘공대’의 인기학과와 비교하여 전혀 나쁘지않은 평판과 커트라인이 나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듯 보였다.
중언부언되었지만 위와같은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나는, 우수학생들이 결코 ‘일반적으로’ 많이 선택하지않은 비인기대학인 ‘농대’를 운명적으로 선택하게 되었으며, 대신 농대에서 제일 인기학과인 ‘식품공학과’를 선택하므로써, 손상된 자존심을 달래고 위안삼게 되었다.
‘운명적 선택’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농대 수석입학을 하지못하고, 임학과를 지망한 마산고 출신의 임수태가 차지하였고 나는 식품공학과 지망한 다른 2명과 함께, 입학수업료 면제를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수석을 하지못하였으니 나에게 5.16장학금은 나의 차지가 되지않았다. 여담으로, 수업료 면제를 받은 식품공학과의 다른 2명(나포함 3명)중 하나가 자기는 ‘차석’입학하였다고 떠들고다녔는데 내가 아는한 공식적으로 입학성적에서 수석은 공개적으로 알려졌지만 차석입학은 발표하지않았다. 그래서 단과대학별 차석은 술좌석에서 잘났다하고싶은 수업료면제 입학생 상당수가 차석을 하였다고 떠들고다녔다...농대 수석입학한 마산고의 임수태는, 순수농학을 열심히 하였고 졸업후 농촌활동엥 매진하여 진보정당활동을 하면서 농대진학때 가졌던 꿈을 펼치고 살았다. 이 글은 쓰는 지금, 나는 그가 부럽고 존경스럽기만 하다. 나는 농대선택 당시 품었던 꿈과는 거리가 먼, 개인읭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농촌사회개선을 위한 활동은 하지못하고, 개인의 안위를 위하여 종합상사생활을 거쳐서 소규모 무역회사를 운영하고있으니, 나 개인생활에 불만은 없지만, 임수태 그처럼 농촌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보탬이 되지못하여 아쉬움이 있는 것이고 그가 부럽고 존경스러운 것이다.)
(‘농대’를 선택한 결과에 대한 내가 겪은, 마음으로 이겨내야했던 것은 또 있다. 입학후 내가 겪어야하는 불편함과 불만의 출발점이 되었고 사회생활 하는 내내 계속 따라다녔다. 사회적 열등감이었고 당연하게도 사회적 열패감이 내내 따라다녔다. 입학후 광주를 떠나 서울생활을 하면서 나는 가정교사 그것도 입주가졍교사를 해야하였는데, 서울대생이면 가정교사 구하는데 어렵지않다는 일반론이 비인기대학인 ‘농대생’에게는 해당되지않았다. 아무리 일간신문에 가정교사 광고를 내도 전화한통 오지않았다. 고교때 우리반에서 나에게 영어.수학 어려운 문제를 물어왔던 3학년7반 다른 서울대입학생들은 가정교사 구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고 때로는 2탕까지도 뛰었는데, 그들이 풀지못하는 영어.수학을 도와주었던 농대생인 나에게는 전화한통 걸려오지않은 사회현실에 나느 그때부터,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않았으며 나중 점점 서울생활이 늘어나고 사회를 더많이 겪어나서는, 이것이 엄연하고 냉혹한 사회였다. 아무리 내가 ‘눈.코.입.귀’가 신체의 각부분이 모두 그나름의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처럼, 어느 것이 상위이고 또 하위인 것이 아니라 모두 똑같은 가치로 신체의 본래기능을 소화하는 것처럼, 대학고 마찬가지로 어느 단과대학이 더 상위에 있고 또 하위에 있는 것이 아니지않느냐, 왜 ‘농대’를 폄하하느냐고 아무리 항변하고 소리쳐 아우성을 쳐봐도 돌아오는 것은 찬바람 뿐이었다...나는 시도때도없이 불만이 찾아들었고 왜 우리사회는 이렇게 불합리하고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지 의구심 속에서 나이를 먹어나갔다.
그러다보니, 대학다니는 내내 나는 진보이념써클활동을 하면서 운동권활동을 하였으며, 먹고살기위해서 회사에 취직하고서도 회사내 불합리한 결정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저항하면서 회사생활을 하게 되었다...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