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종;
군국주의 일본이 왜 이땅에 학교를 세웠을까? 조선사람을 위해서?
1.조선사람에게 황국신민이 되어 일본왕에게 자발적으로 충성하도록 하기 위하여/‘국민’은 본디 ‘일제천황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국민’...독립운동하는 조선인은 불량선인=비국민
-이 땅의 근대식학교는 애당초 조선사람의 정체성을 스스로 배반하고 일본사람이 되도록하는,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의 장이었다...마음의 통제/의식의 통제.
2.전시동원체제에 맞춰 일찍부터 총알받이로 만들려는 군사교육훈련장이 필요해서였다...몸의 통제
-미셀 푸코;몸의 통제가 의식을 통제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지...
3.식민지 중하급관리자, 즉, 식민지 관리를 위한 마름양성에 있었다. 계층상승의 기회가 학교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출세한 대부분이 일제부역자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학교구조도 ‘민주공화국’의 체제에 맞춰 바뀌었어야 했으나...일제강점기 시대 그대로이듯 대한민국의 공교육에 민주공화국 이념은 있어 본 적이 없다.
-교장교감 임용제도는 민주적인 공간이어야 할 학교를 권위주의, 관료주의 터전으로 만들었다. 또한 국가권력의 요구에 충실한 사람이어야만 교장교감이 될 수 있게 했다.
진정한 자유인인 교사는 교장교감이 될 수 없고 ‘평교사선언’이 말해주듯 스스로 교장교감이 되지 않는다.
한국의 각급 학교 교장교감의 속성은 자유인이 아니라 마름이다. 그들은 국가권력의 지침과 하달에는 매우 충실한 마름이지만 단위 학교에서는 봉건 영주처럼 군림한다.
학교의 자율화를 말하려면 먼저 학교의 주체가 누구인지 말해야한다. 학교자율화란 곧 그 주체의 자율화를 말하기 때문이다. ‘교육의 세 주체’인 학생, 교사, 학부모가 학교의 주인인가? 아니면 교장이나 이사장 도는 그들을 관리 감독하는 교육감이 학교의 주인인가?
우리에겐 역사상 군주제를 극복하고 근대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 싸운 경험이 거의 없다.
인류역사에서 근대 공화국의 건설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군주의 사적 소유물’로서의 군주국 체제와 사회 곳곳에 강고하게 자리잡은 기득권 구조를 부숴야 하는 그야말로 엄청난 과업이었다.
군주국과 결별하기까지 인류는 지난한 투쟁 과정과 담론형성 과정을 거쳐야 햇다. 우리에겐 그런 과정이 생략되었다. 이씨조선이 일제에 망하고 일제가 2차대전에서 연합국에 패한 결과로 거의 공짜로 얻은 게 우리의 민주공화국이다.
스스로 싸워서 획득하지 않은 제도는 아무리 좋은 제도라고 해도 빈껍데기로 남기 쉽다.
따라서 공교육에서 민주공화국의 이념은 더욱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공교육에서는 민주공화국의 이념이 아니라 반공,방첩,숭미와 질서, 시장, 국익, 경쟁, 기업하기 좋으 나라만이 강조된다...즉, 타율적 질서의식을 몸에 익힌다.
이 질서의식에는 자율성이 배제되었다. 강제성이 있거나 남이 볼 때에만 지킨다. 질서를 강조하지 않고 줄 서기도 하지 않는 다른나라 교실보다 질서를 강조하는 한국의 교실이 더 무질서한 이유는 자율성이 배제된 교육 탓이다.
자유의 반대말은 억압이다.
하지만 안보와 질서 이데올로기에 세뇌된 한국사회구성원들에게 자유의 반대는 억압이 아니라 무질서와 불안이다.
노동자들의 파업소식을 들은 사회구성원들의 반응은 '왜 파업을 일으켰을까?‘라는 물음이 아니다. 파업=무질서=불안이라는 정해진 등식에 따라 ’웬 파업이야!‘라는 반대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파업에 대한 공권력의 억압에 자발적으로 동의한다.
기존 질서와 체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사회구성원을 길러낸다는 점에서 오늘날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질서교육은 과거의 신분질서 이데올로기를 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회적 약자들의 사회정의 요구는 내면화된 질서이념에 의해 배척되고, 근대 민주공화국의 원칙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민주공화국의 학교에[서 자유와 평등을 강조해야 할까 아니면 질서를 강조해야 할까?
질서를 강조하는 대한민국의 학교는 일제 강점기 때처럼 지배질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노예를 기르고 있는 것이다.
안보, 질서, 반공이념으로 무장시킴으로써 자신의 처지가 요구하는 무상의료제도나 무상교육제도를 스스로 거부하도록 의식을 심어주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
한국사회는 구성원들에게 대학교육까지 받기를 강요하고 있다. 대학교육을 받지 않으면 사람대접 받기 어려운 사회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구성원들에게 대학교육까지 받을 것을 요구할 뿐 책임지지는 않는다.
유럽나라들이 대학교육을 무상 또는 준무상으로 한 때가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이전이었음을 돌아보면 우리 사회의 물적 토대는 무상교육을 실시하고도 남는다. 그럼에도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대학에 가길 강요할 뿐 그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구성원들 각자에게 부담시킨다.
그 뿐인가? 서열화된 대학체제에서 상위권 대학에 가기 위한 치열한 경쟁은 사교육의 창궐을 불러왓고, 구성원들은 매년 20조원이 넘는 사교육비를 지불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무상교육이 먼 꿈으로 남아있는 까닭은 국가보안법이 상징하는 안보의식을 통하여 무상교육제도를 불온한 사상의 요구인 양 의식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1948년 민주공화국이 선포되었지만 친일파로 불리는 일제부역세력은 청산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른바 민주공화국의 모든 공적 부분을 장악한 지배세력이 되었다.
정통성을 가질 수 없엇던 그들은 미국의 힘을 빌려 부족한 부분을 채웠고, 분단 상황에서 ‘보수’와 ‘민족’을 참칭하므로써 또 다른 부분을 채웠고, ‘지역’으로 채웠다.
민족을 배반한 사익추구 집단이 실질적인 지배세력이 되었으니 민주공화국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정도가 아니라 옷을 완전히 뒤집어 입은 셈이다.
민주공화국이 우리에게 신기루에 지나지 않듯이 민주공화국의 공교육은 애당초 없엇다. 공공성이 없는 제도교육은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 사익추구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전쟁터로 남았다.
-‘왜?’의 죽음;
서열화된 대학구조가 인문사회과학을 반학문으로 왜곡시킴으로써 학생들의 ‘자기생각과 논리’를 죽였다면, 각 가정은 아이들의 ‘왜?’라는 질문을 죽였다.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키케로
미국산쇠고기 수입에 반대의 목소리 내기 위해 촛불집회에 나온 사람들에게 ‘배후가 누구냐?’ ‘그 많은 초 값은 누가 지불했나?’고 묻거나 ‘너 좌빨이지?’‘너 반미지?’라고 추궁한다.
이런 추궁에 응수하기란 참 난감하다. 나 배후 없어 나 빨갱이 아냐 나 반미 아냐라고 답하는 순간 이미 토론은 불가능하다.
사람은 회의하는, 즉 의심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동물이다. ‘왜’라는 질문을 가져야 마땅하다.
우리사회 부모들은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한다’는 역지사지를 알고 실행한다면 절대로 해선 안 되는 대답을 주로 한다. ‘크면 다 알아!’가 그 중 하나다.
엄마아빠는 다 알고 있다는 데 왜 대답을 해주지 않고 그냥 넘어가나? 또는 ‘나도 몰라’‘몰라도 돼’라며 불성실하게 대답하다가 급기야 ‘바빠 죽겠는데...’하면서 야단을 친다.
우리는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려Td를 때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데 주눅들어야 햇고 결국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 죽였다.
‘왜?’라는 질문이 사라졌다는 것은 대화와 토론이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왜?’라는 질문을 통하여 논리를 끌어내고 그것으로 상대방을 설득하기보다는 힘과 권위로 누르거나 다수의 논리로 밀어붙이는 사회에서 합리성 추구나 토론문화는 설 자리가 없다.
사적 관계에서도 주로 명함이 가진 힘과 권위가 작용하는 것 역시 ‘왜?’라는 질문이 죽었기 때문이다.
정치가 합리적 보수와 건전한 진보 사이의 경쟁 게임이 되기 위해서도, 가정 폭력을 줄이기 위해서도 각 가정에서 ‘왜?’라는 질문을 살려야 한다.
-탈의식;
오늘날 노동운동, 시민사회운동이 대중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사회진보가 어렵고 느릴 수박에 없는 이유가 있다.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바꾸는 만큼 사회진보를 도모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은 지배세력이 주입한,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의식화나 계몽 대신 나는 ‘탈의식’을 주문한다.
지배세력에 의해 주입되고 세뇌된 의식을 벗고 발가벗은 존재가 되자는 것이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벗어내고 존재가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자본가는 자본가의 일상과 이해관계에 따라 자본가 의식을 갖고, 노동자 농민은 노동자 농민의 일상과 이해관계에 따라 노동자, 농민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자들 중 노동자 의식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노동자의식을 가진 극소수의 노동자들도 자연스럽게 그 의식을 가진 것이 아니다. 다른 노동자들과 똑같이 지배세력에 의해 의식화되었던 반노동자의식을 ‘반전’시킨 특별한 계기를 통해서 노동자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한국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이 존재ㅔ의 요구에 귀기울이기 어려웠던 것은;
분단상황 아래 안보의식화, 질서의식화, 숭미사대 의식화, 물신숭배 이식화, 지역주의 의식화가 강력하게 관철돼왓기 때문이다.
가령 집안에 병자가 생기면 ‘무상의료’에 비상한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다. 존재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상의료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혹의 눈길을 보내면서 스스로 거리를 둔다. ‘무상교육, 무상의료라...그거 좋긴 좋은데 그 비용을 어떻게 대나?’ 라면서 기득권세력의 편을 들어주는 것으로 논의를 끝낸다.
‘잡초를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뽑을 수는 있다’
잡초를 없앨 수 없다고 손놓고 있을 일이 아니라 우리부터 잡초 뽑는 일에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은 모순덩어리라 그 모순을 한꺼번에 극복할 수 있는 ‘태양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복잡하게 얽힌 사회 모순을 한꺼번에 해결해주는 권력은 애당초 불가능하며, 만약 가능하다면 그 권력은 무척 위험한 것이다.
그런데도 대중과 유리된 진보의식은 사회모순을 한꺼번에 해결하겠다는 조급증으로 권력집착증을 낳기도 한다.
대중의 구체적 삶에 밀착하여 어렵고 느리더라도 대중과 소통하면서 스스로 진보하는 진보의식이 요구된다./계속
'(68 기러기 카페 글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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