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하고..광주일고 동창회 복학생환영 ‘페스티벌’=나의 운명
나는 대학 다니면서 소위 ‘미팅’을 많이 하지못했다. 하고는 싶었지만 미팅티켓 살 돈도 없을뿐더러 비인기단과대학인 ‘농대’에 대한 사회의 비호감과 차디찬 냉대때문이었다.
커트라인이라는 잣대로 대학서열을 확정해버리는 몰상식과 비합리.불합리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상식의 오류.
그러나 일반대중의 시선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소위 커트라인이란 것이 얼마나 단순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얼마나 잔인한지, 커트라인은 커트라인 이상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평가없이 도매값으로 넘겨버리는 것 아닌가? 대중은 그 깊은 사정을 따지지않았다. 우중은 커트라인 이상의 부분에서 우열이 천차만별로 가려지는 것인데도, 커트라인 즉 제일낮은점수하나로만 모든 커트라인 이상의 부분을 ‘한포장’으로 ‘똑같이 모두 낮다‘고 포장해버리는 것 아닌가. 비합리.불합리 그야말로 ’넌센스‘
(커트라인이 낮은 학과에도, 커트라인이 높다는 학과의 학생보다도 더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 심지어는, 커트라인이 낮은 학과에서도 서울대학 전체 수석이 나올 수 있는 것. 그런데 커트라인만 가지고 따지면서 학과의 우열을 가리고 서열을 만든다는 것이 진리를 탐구한다는 대학에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넌센스라고 하는 것이다. 웃기는 짬뽕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사회 상식의 오류! 나는 이를 입아프게 떠들고 주장하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차가운 시선.냉대 뿐....서울의대나 서울법대는 여전히 커트라인이 제일 높고 서울농대는 커트라인이 여전히 매우 낮아...서울농대의 우수학생들은 여전히 우울할 뿐이라는 것...이 콤풀랙스를 극복해야하는데 아직껏 나는 70살이 내일모레인데도 아직도 소아병적으로 아프고 힘들기만하다. 나는 그리 살라고 태어난 것일까? 나의 운명인가!!!)
(이화여대 메이데이 축제때, 가봉을 하러 이대찻집에 갔었는데 최종적으로 나는 초대받지못했다. 초대받지 못한 것이 양복정장이 아니고 서울대 교복을 입어서인지 구두를 신지않고 흰고무신을 신어서인지 비인기대학인 ‘농대’때문인지 알수 없지만 나는 그날 축제에 초대받지못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이화여대는 누구처럼, 홍준표가 말했듯이, 두 번다시 그쪽으로는 뭐도 누지않을, 다시는 보지않을, 나쁜대학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나는 소개팅이나 단체미팅을 거의 하지않았다. 아니 아예 참가하지않았다.
(나는 가정교사를 구하던 1학년때 그 차별과 냉대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몸소 체험한 바 있다. 일고 3학년때, 어려운 영어해석문제나 수학풀이 문제는 모두 나에게 가져와 도움을 받았던 타단과대학 출신들은 양손에 가정교사자리를 차고 앉아 일주일에 2탕을 뛰니 마니 하는데 그들보다 공부를 잘하고 반에서 1등을 하고 300여명중 4등을 했던 나에게는 가정교사과외자리가 하나도 들어오지않으니, 사회에 대한 냉대와 차별을 얼마나 야속하게 받아들였을까?)
수원에 내려와서도 마찬가지. 그래도 수원에서는 ‘식품공학과’가 농대에서는 제일 좋은 학과이어서 가정교사과외를 구하는데 서울에서처럼 어려움이 전혀 없었지만 서울소재여대생들과의 미팅에서만은 ‘비인기농대’의 차별이 존재했으므로 나는 미팅을 완죤히 외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광주일고 동창회가 주관하는 졸업생환송미팅엔 빠질 수가 없었다.
단순미팅이 아니라 파트너를 미리 확정해서 참가하는 졸업생환송행사였다.
가까운 후배하나가 특별히 나를 위해 서울에서 전남여고.전남대영문학과출신을 소개해서 데려온다는 것. 전남여고때 전교1등을 할 정도로 재원이라고 은근히 흥미를 자극하였다.
(이쁜여자는 술집에 가면 원없이 얼마든지 만날 수 있고 여자가 얼굴이 이쁘면 그 값을 한다, 여자는 2세를 위해서 머리가 좋은 것이 최우선이라고 했던 나의 평소지론을 염두했던 것.)
시큰둥해하며 행사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결과는 결혼까지 연결되는 계기가 되고말았다.
운명인가? 운명이었다.
나의 결혼은 우연찮게 아니 운명적으로 이렇게 만들어졌다. 가히 운명이 이끄는 인연이었다.
또다른 선택이 있었을까? 나는 그렇게 운명의 안내를 받게 되었다.
(만일 내가 그날의 선택이 아닌, 사회생활을 상당기간 경험한 후 소개팅이나 맞선을 통해서 배우자를 선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누구와 인연을 맺었을까? 모르긴해도 이런저런 조건들을 따졌을 것이다. 상대방 신부쪽에서도 나의 고향인 호남과 또 그놈의 ‘농대’디스카운트가 왜 등장하지 않았겠는가? 차라리 사회물이 아직 들지않은 순진.순수한 상태에서 결혼까지 일찍 결정하게 되었으니 인연도 큰인연이고 이것이야말로 운명 아니겠는가? 그것은 나의 운명!!!)
'대학.군대에서,1970-1977'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학하고...식품공학? 아니면 제3의 길? (0) | 2018.12.15 |
---|---|
복학하고....농대축전 ‘식품공학과 종합우승’ 그리고 하프마라톤 완주 (0) | 2018.12.15 |
복학하고...잠따로 밥따로 하숙 (0) | 2018.12.15 |
복학하고...가정교사과외 하지않고 큰형수에게 큰빚을 졌다. (0) | 2018.12.15 |
군제대 그리고 복학....1976년 3학년 후학기 (0) | 2018.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