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농장의 자유글(모두모음)

'아, 가을인가'----북한산 구기 계곡에서

햄릿.데미안.조르바 2004. 9. 19. 02:05
2004.9.19.일. 구기계곡을 다녀와서

어제 청계산을 다녀온 터라 오늘 일요일은 모처럼 집에서 마냥 늘어지고, 쳐지고, 죽치려고, 크게 작정을 하였었는데,
웬걸, 본의 아니게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져버렸으니 이 일을 어찌 한다?
아니, 아침잠이 벌써 없어지는 그 노인병이 나에게 찾아왔단 말인가? 아닐 것이다, 아니고 말고.
그러나 저러나 없어져버린 그 달콤한 일요일 늦잠, 늘어지게 즐겨야 하는 아침잠이 아쉬웠다.

생각지않은 일요일 아침시간이 널럴하게 내 앞에 쏟아졌다.
그렇지, 오랜만에 고교 동창회 불암산 등산모임에나 가자.
넉넉잡아 1시간 30분이면, 4호선 당고개까지, 10시 모임이니깐 그래도 1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이 남았다.
기러기방도 들락날락, 커피도 타마시고, 골프체널도 들어가 보고, 신문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 아침토론도 듣고,.....
갑자기 생긴 아침시간 죽이기 작전을 성공적으로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이코, 몇 시야 지금?
학교 앞 사는 학생이 지각을 잘 한다는 말처럼, 널럴한 시간 죽이기 하다가 자칫하면 모임에 제 시각에 맞추지 못하게 될성 싶었다.

허겁지겁 달려나가 마을버스를 기다리니 때마침 오시기를 하나, 택시를 잡으려 해도 때맞춰 오시기를 하나, 허둥대니 모두들 다 오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간신히 반대방향에서 택시가 오고, 돌아서 오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사당역 방향의 또다른 빈택시가 내 앞에 터억 서는 것이 아닌가.
건너편 돌려고 하던 허연머리 기사님께선 손을 흔들어 주며 나에게 양보를 보내 주었다.
‘좋은 아침, 좋은 사람, 좋은 세상’
허둥대긴 하였지만 그 늙은 기사님 덕분에 좋은 출발이 되었다.

아무래도 당고개까지 10시는 불가, 10시 30분도 못장담, 전화로 알려서 기다리게 할 것인가,
그런데 나 하나 때문에 최소 열 사람을 30분 이상 기다리게 하는 것은 예의도 아니고 분명한 잘못,
동창회 산행은 포기하고, 충무로에서 3호선으로 바꿔 북한산 구기계곡으로 방향을 틀었다.

구기파출소 앞, 10시 40분.
동창회 산행 포기는 잘 한 일이었다. 시간상으로는.

김밥은 싫고 그냥 건너뛰긴 ‘밥보’인 나에게 큰 고역이고,
어찌하나, 간단히 허기만 넘기고 산행후 즐거운 ‘꿀맛’ 식사로 하지, 그래서 어제 청계산에서처럼 단촐한 ‘콩떡’,
한 봉지는 많고, 반만 달라고 하니 이 아주머니 마뜩찮은 모양이었다.
‘한 개가 더 가버렸네’ 하신다. 어제의 청계산 할머니는 ‘그러슈, 더 가지고 가슈’ 하시며 사람냄새나는 넉넉함을 받았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남기더라도 한 봉지를 달라고 할걸 내가 괜스레 미안해졌다.
똑같은 일이었지만 사람에 따라, 말씀에 따라 넉넉한 마음이 실리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는 지, 그 넉넉함이 어쩌면 세상을 돌아다니며 다스리는 것은 아닌지, 그 넉넉함이 다시 그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비 온 뒤의 산은 역시 더 시원하게 푸르렀다.
어제의 청계산이 샤워를 막 끝낸 물기 머금은 여인이었다면, 오늘의 북한산 구기계곡은 샤워를 하고 알맞게 꽃단장을 끝낸, 맑게 피어나는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어서 서둘러 그 품 속으로 뛰어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좋은 일일수록 조금 느리게,
하나 둘 걸음을 세며 따박뚜벅 걸어 올라갔다.
초가을의 산, 비가 온 뒤의 가을 산, 그 냄새가 얼마나 향기로운지 한번 맡아보자.

구기계곡은 자연돌이 많다. 아스팔트길은 물론이고 맨땅을 오르는 것보다 더 편하고 좋다.
큰돌, 작은돌 그리고 어중간한 돌들 머리를 밟고 넘으면 오르막길도 호흡이 어느새 들어맞는다.
나와 산이 자연스럽게 만나지는 디딤돌이 되는 것이다.
오늘따라 어제의 빗물에 씻겨졌는지 말갛게 머리감은 돌들이 유난히 톡톡 들어온다.

문수사 가는 길로 들어섰다.
산속의 바위돌을 파서 부처님을 모셔놓았다는 데, 오늘 처음 보았다.
여기저기 산행객들이 모여 앉아 비빔밥을 먹고 있었다. 생각지 않은 점심공양.
점심을 어찌하나 막연하였는데 잘 되었지 싶었다. 나도 꾸역꾸역 공양줄에 섰고 드디어 푸근한 공양 비빔밥을 비벼먹게 되었다. 나무관세음보살.
어른말씀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 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누구 말을 잘 들었던지 누구에게 뭘 잘 베풀었던지 한 모양이었다. 앞으로도 남의 말을 더 잘 듣고 누구를 더 많이 베풀어야겠구나 싶었다.

생각지 않게 점심공양을 푸근하게 하고나니, 저멀리 또 가까이 초가을의 산이 살가운 햇볕과 함께 내 눈으로 들어왔다.
나뭇잎에 내려앉는 햇볕이 가을이 오고 있음을 소리내고 있었다.
오동잎 하나 섬돌 계단에 떨어지면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알린다 하였는데, 나무들 위로 떨어지는 햇볕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가을은 벌써 산 속에 가득하고 단풍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어제의 비가 더욱 확연하게 가을을 불러들였을 것이었다.
‘아, 가을인가, 물동이에 떨어진 나뭇잎 보고 물 긷는 아가씨 고개 숙이네.’
물긷는 처녀처럼 아직은 수줍은 가을, 초가을이었다.

아, 향긋한 냄새, 가을 냄새이런가.
알맞게 쪼이는 햇볕 사이로 낯익은 냄새가 바람에 실려 들어왔다.
커피, 막커피!
내 좋아하는 막커피가 아니던가.
기웃기웃 찾아간 곳은 조그만 사무실, 승방인가 다용도실인가.
몇 사람들이 두런두런 이야기 하고 있었다.
젊은 보살님도 함께 있었다.
‘저, 하도 커피 냄새가 좋아서...........’
‘죄송하지만 어디 한 잔.............’
염치 불구하고, 안면몰수하고 내 시커먼 속을 들어내었다.
‘그럼요, 잠깐만요,,,,,,,,,,,,’
선선하고 어여쁜 보살님은 순간적으로 더 예뻐졌다.
어린 중생의 못된 마음이라곤.........아니,.정말 아름다웠다. 몸도 마음도 얼굴도 모두 아름다웠다.
‘물 좀 더 넣어주세요. 전 살짝 엷은 커피가 더 좋거든요.’
이제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이왕지사 확실하게 내 뜻을 알려주었다.
그 기막힌 커피의 맛을 누가 알 수 있으리. ‘원더풀, 또 원더풀’
점심공양도 과분하였는데 거기에 커피공양까지, 오늘의 구기계곡, 문수사, 초가을 산행, 만만세였다.

평소에 난 종교의 헌금의식에 불만 가득하였다. 불신론자였다. 다른말로 달리 표현한다면 ‘깍쟁이’
그런데 오늘 문수사의 불전함은 그 깍쟁이로부터 푸른잎 하나를 받아들여야 했다.
비빔밥공양에 커피공양에 불심까지 얹어서.
마음이 마음을 부르고 또 불러내어 불리니 세상은 아름답고 인간도 살찌면 좋을 것이라.
어거지로 부르고 불러내면 한바탕 소란으로 끝날 것이지만,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 손이 모를 정도로 한다면 그것은 오래오래 이어질 것 아닌가.
문수사의 공양이 초가을 햇볕을 알맞게 불러들이고, 어리숙한 중생들을 편안하게 불심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주거니 받거니 그러는 것이, 돌고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운행원리요 섭리, 그리고 인생의 더부살이라 하지 않던가.
종교의 틀도 따지고 보면 인생의 한 줄, 인간이 사는 세상일 중의 하나 아닐 것인가.
우리가 종교 속에 있기도 하고 종교가 우리 속에 있기도 하며, 자연이 우리 속에 있으며 또 우리가 자연 속에 있기도 하니, 모두가 하나가 되고 하나가 모두가 될 수도 있다 하니,
그것이 우리의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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