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독서노트 다시읽기

옛독서노트 다시읽기옛독서노트 다시읽기; 생각의 좌표/홍세화 에세이(6)='내소득의 일부를 떼내어 나보다 가난한 자들의 교육비.의료비등을 부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햄릿.데미안.조르바 2025. 5. 30. 21:11

-분노;

-쓴소리;

인간은 편함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나 특히 정의와 진실의 추구는 필연적으로 불편함을 요구한다.

일상에서 사회문제, 정의와 진실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사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소수가 한국사회에서는 극소수에 가깝다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될까?

급변하는 사회환경을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대처할 줄 아는 성숙된 시민의식을 가진 시민이 많지 않는 한, 시장의 요구와 한겨레의 지향이 배치됨으로써 생기는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겨레가 시민사회의 성숙과 왜곡된 시장의 억압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이다.

권력이 시장에 넘어가고 신문이 기업의 광고로 먹고사는 상황에선 한겨레가 스스로 흰배경이 되어 사회에 팽배한 회색과 검은색을 도드라지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회색의 사회에서 원칙과 상식은 애당초 불편한 것이다.

한겨레나 경향신문의 독자들까지도 그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시민으로서의 의식보다는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이다.

한국노동자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이 노동자가 아닌 소비자의 정체성인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노사간 균형이 아직 먼 얘기이듯,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독자들도 소비생활을 위한 제품을 구입할 때 삼성재벌의 반시민적, 반노동자적 행태를 감안하여 삼성을 보이콧하지 않는다.

한국사회의 신문은 진보신문 대 보수신문으로 나누어지는 게 아니라, 몰상식한 부자신문 대 상식적인 가난한 신문으로 나누어지는데; 상식적인 가난한 신문의 부수는 늘어나지 않았고 영향력은 커지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의 마름이나 머슴이 되지 않겠다는 늠름한 민중에게 생존의 한계선상에 서도록 강요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천박한 자본즈의를 비판해야 하는 신문은 그만큼 어려운 생존의 한계선상에 설 수박에 없다. 진보성을 일관되게 펼 수 있는 일간지는 진보의식을 일상성으로 확보한 시민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달걀;

옆으로 하나의 직선을 긋자. 그리고 그 횡선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삶의 조건이라고 부르자. 횡선의 위쪽에 있으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아래족에 있으면 인간의 존엄성을 지기 어려운 사회경제적 조건에 처한 것이라고 하자.

북유럽등은 달걀이 자연스럽게 누운형태...

한국사회는 아래부분이깨지고 종으로 서있는 콜롬부스의 달걀모습.

콜롬버스의 달걀=발상의 전환?

그러나 그것은 자연의 섭리에 맞선 인위적인 폭력이었다.

그 폭력적인 발상과 행위, 그것으로 피식민지 사람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시작되었고, 피식민지인들은 억울한 죽음을 당하거나 공포와 불안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채 굴종의 삶을 살아야 했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미래를 내다본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아직 오지않은 미래는 불확실하기 때문에 인간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하게 도모하겠다며 오늘을 끊임없이 저당잡히는 일이 벌어진다.

우리 사회의 청소년 학생들을 보자. ‘오늘을 저당잡힌 삶’을 살고 있다.

거의 모든 구성원들이 불안한 미래 때문에 모든 오늘을 저당잡혀야 하는 사회, 미래의 불확실성이 오늘의 불성실성을 모든 구성원들에게 강요하거나 합리화하도록 작용하는 사회, 이런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아름다운 삶은 애당초 거리가 멀다.

당연히 오늘의 삶, 오늘의 나에게 성실할 수 없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은 언제입니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톨스토이

‘당신에가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다’/2012.5.3.목.노트정리

-나눔과 분배;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려면 큰 폭의 나눔과 분배가 이뤄져야 한다.

우리 사회는 ‘분배’를 제도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은 채, 시혜.온정.선행의 ‘나눔’에 만 호소하려고 한다.

‘노불레스 오블리주’란 본디 ‘귀족이 스스로 의무를 진다’는 뜻인데, 역사는 귀족이 스스로 의무를 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귀족은 스스로 의무를 지지 않았다.

스스로 의무를 지지 않으면 지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지배하기 위해 의무를 져왔을 뿐이다. 그게 역사의 진실이다.

따라서 귀족이나 사회상층이 스스로 의무를 얼마만큼 지느냐는 국민의 비판과 견제능력과 정확히 일치한다.

지역에서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데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가당키나 한가?

이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귀족이나 사회상층의 손에 달려있는 게 아니라, 민중의 비판적 안목과 견제 능력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다.

우리처럼 사회환원의식을 기대할 수 없는데다가 국민이 제도교육을 통해 비판의식을 기르지못한 곳에서는 노블레스오불리주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큰 폭의 분배를 제도화한 뒤 나눔으로 보완하는 것이다.

사회양극화를 극복하려면 더욱 분배의 제도화를 우선해야 한다. 그렌데 바로 이 지점에서 벽에 부딪힌다. 조세를 늘려야 한다는 요구에 세금을 더 내야 하는 가진 자들이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세금을 낼 게 별로 없는 저소득층이 증세를 주장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가진 자든 그렇지 않은 자든 모두 조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왜 그럴까?

1정부예산낭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들 수있다. 별로 하는 일 없는 지자체 의원 한 사람이 연간 6천만원씩 세금을 축내고,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에 기지 이전비용으로 수조원의 세금을 쏟아붓고, 유인촌장관이 스포츠토토 기금을 제멋대로 쓰고, ...경영을 잘못한 건설사에 나랏돈을 퍼주는 것을보면서 기분좋게 세금을 낼 국민은 없다.

2조세형평에 대한 신뢰가 없다는 것이다.유리지갑을 열어 빈틈없이 세금을 내는 봉급생활자들은 의사.변호사 등 고소득 자영업자들이 탈세하고, 강부자들이 세금을 체납하는 소식에 스스로 바보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3.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세금을 낸 나에게 돌아오는 게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으니 단 한푼인들 더 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명박정부의 감세정책에 대해 70퍼센트를 넘는 국민이 부자들을 위한 정책이라고 말했는데, 그럼에도 50퍼센트 이상이 감세정책에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감세정책으로 부자들은 수백만원씩 소득세를 덜 내는데 비해 고작 5만원을 덜 내지만 그래도 덜 내기 때문에 동의한다. 내가 얼마를 내든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어차피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바로 이점이 유럽사회와 다른다. 사회공공성과 시민복지가 실현되는 유럽사회의 서민들은 경험을 통해 ‘서민인 내가 100유로를 더 낼 때, 고소득층은 천 유로, 만 유로를 더 내는 것이며 그 재원의 일부가 나에[게 돌아오므로 나에게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고 있다.

한국의 서민층은 사회공공성과 사회안전망 혜택의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조세는 그저 빼앗기는 것으로 인식한다. 조세에 있어서 서민층이나 부유층이 한편에 서게 되는 배경이고, 한국의 기득권층이 사회공공성 실현과 사회안전망 확충에 반대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유럽의 애국주의는 자발성이 있다.

애국주의는 본디 공화국 기본 가치인 사회 공공성과 연대의 실현에 따라 구성원들이 국가와 사회로부터 ‘위함’을 받는데서 자발적으로 생기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애국주의는 자발성을 기대할 수 없다. 국가는 나를 지배할 뿐 나르 위해 해주는 게 없다.

우리사회에서 ‘현실’은 ‘바꿔나가야 할 현실’보다는 ‘피할 수 없는 환경’이라는 뜻이 훨씬 강하다. 분배의제도화를 비롯하여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너무 몰라’ ‘너무 순진해’‘이상주의자’ 등의 말을 듣는다.

현실이 피할 수 없는 상황의 의미만 가질 때, 그래서 각자의 세게관에 반해 현실을 수용해야 할 때, 이는 거의 강자의 뜻을 수용함을 뜻한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점차 강자에게 관대해진다.

북한보다 미국에 관대하고, 대기업노조보다 재벌에 관대하고, 한겨레나 경향신문보다 조중동에 관대하고, 진보정치세력보다 현실 정치세력권에 관대하다.

그렇ㄹ게 현실의 벽앞에서 순응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들은 그 내면에서 반작용을 일으키고 그런 현실을 주로 같은 약자의 탓으로 돌린다.

사회적 약자들은 함께 연대하지 못하고, 현실은 바꾸어야 할 것이 아닌,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유럽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개인주의자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연대의식을 갖고 있다. 무상교육제도나 보편의료제공제도와 같은 사회안전망과 무관하지 않다.

개인주의자라는 점에서 결코 남에게 뒤지지않는 프랑스인들의 65퍼센트가 이렇게 말한다.

‘내 소득의 일부를 떼내어 나보다 가난한 사람의 교육비.의료비.주택보조비.연금 등을 부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오늘 우리 사회의 부유층.재배층에게0는 기대할 수 없는 연대의식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부유층.지배층은 본디 뻔뻔하게 태어났나? 그렇지는 않다. 연대를 하지않아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어도 지배할 수 있으니 계속 뻔뻔할 수 있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눈이 없어 견제력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2012.5.4.금.노트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