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독서노트 다시읽기

‘무지개와 프리즘’/이윤기의 문화와 인간에 대한 생각==(1)

햄릿.데미안.조르바 2025. 3. 18. 21:44

독서노트/2010.9.25-10.2

‘무지개와 프리즘’/이윤기의 문화와 인간에 대한 생각

제1부; 내가 사랑하는 인간들/인문기행을 위한 야간비행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인이므로...‘/니코스 카잔차키스.

1.선학의 황금시대/육조 혜능

금강경;머뭇거리지 말고 그 마음을 내어라

‘사람에 남북이 있지 부처에도 남북이 있으리까? 스님의 몸은 이오랑캐의 몸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만, 부처 성품에야 무슨 차이가 있겟습니까?’

2.20세기의 오뒤세오스/니코스 카잔차키스

일정한 도덕률의 틀 속에서 온존하게 제 몫의 삶 누리기를 마다하고 떠돌이 앞소리꾼이 되어 영혼의 자유를 외치는 거인.

자기 내부에 잠재하는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드높이고, 그 드높이는 과정에서 조우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문학적 표정을 부여하는, 참으로 초인적인 작업을 시도하는 거인이 있다.

신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 삶을 풍부하게 해준 것은 여행과 꿈이었다.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

구체적인 체험으로서의 여행이 추상적인 꿈을 심화시키고 그 꿈이 여행의 무대를 확장시키듯이, 그의 삶이란 것도 육체와 영혼의 상호작용을 통한 심화와 확장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여행과 꿈이 상호작용을 통하여 늘 그의 삶을 풍부하게 하듯이, 영혼과 육체는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통하여 그의 존재를 드높이는 것이다.

카잔차키스의 삶은,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색과 행동 등등의 영원히 모순되는 반대 개념에서 하나의 조화를 창출해내는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루어진다.

영혼의 천사의 몫이고 육신은 악마의 몫이라는 가르침에 익을대로 익어 있던 그가 수도승들의 고통스러운 금욕의 투쟁을 싸고 도는 허실의 슬픈 공간을 목격한 것은 그때의 일이다. 그의 아토스 산 순례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종신형을 살기 위해 어두운 감옥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악마와 지옥의 불길과 피투성이 젖가슴을 한 매춘부 아니면 뿔이 달린 지옥의 괴물 그림이 벽면을 메우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겁을 주자는 교회의 갈망이 그대로 투영된 묵시록적 협박...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일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이 산에서 고행을 통하여 천국에 이르려는 무수한 거짓 수도승들을 만난다.

그 중에는 반미치광이 수도승도 있었다. 수도원 앞의 깍아지른 듯한 낭떠러지 아래에는 백골이 널려 있었다. 고행을 통하여 날개를 얻었다고 믿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본 미치광이 수도승들의 백골이다.

그는 이 산에서 ‘동굴의 마카리오스’를 만난다. 수도승 가운데서도 거룩함을 얻은 것으로 알려진 ‘성인’이었다.

....겨우 이런 대답이나 듣자고, 삶을 거부하고 육체를 부정하고 그 험한 바위 산을 기어올랐단 말인가...아직은 때가 아니다. 내 삶은 아직도 아름답다. 내 눈에 보이는 세계는 아직도 아름답다. 나는 이 세계를 증발시킬 수 없다...

‘천국에도 안부 전해주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시거든, 제가, 인간이 이렇듯이 죄악과 악마에 시달리는 것은 하느님 탓이라고 전해 주세요. 하느님이 세상을 너무 아름답게 만들어 놓은 탓이고요’

그가 아토스산에서 만난 마카리오스가 육체를 악마와 동일시하는 극단적인 영혼지상주의자였다면, 역시 아토스 산기슭에서 만난 파계승은 극단적인 육체지상주의자이다. 거드름을 피우던 마카리오스와는 달리 파계승은 청년 카잔차키스에게 고해하듯이 이런 고백을 했다.

...그 여자와 동침하던 날 밤, 나는 평생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가 부활하고 있다는 기가 막히는 느낌을 경험했답니다. 육신이 쾌락의 절정을 누리는 순간, 하느님이 두 팔을 벌리고 내게 다가오는 것 같더라고요, 나는 그날밤 난생 처음으로 날이 밝아오기까지 감사 기도를 드렸답니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아름답고 우아한 여자를 통하여 나를 잠시나마 천국으로 이끌어 주셨던 것이지요. 나는 단신이나 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자를 통해서 하느님을 뵙고 그 품에 안길 수 있었던 것이지요.

40년 전 그날 밤 이후로 나는, 죄 역시 하느님을 섬기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닐까...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속죄하라고요? 나는 안해요. 분명히 말하거니와, 하느님의 벼락을 맞아 콩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나는 속죄하지 않겠어요. 내게는 뉘우칠 게 없어요....

베르그송에 따르면 인간이 보편적으로 경험해 온 기나긴 진화으 역사는, 경화된 메커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를 창출하기 위한 ‘엘랑비딸(도약)’의 역사다. 따라서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부단한 창조의 영원을 향한 도약과 생의 충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베르그송에 경도된 것은, 인간 존재란, 신이 어떤 목적에 따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딛고 넘어가게 마련된 단계에 불과한 것, 따라서 ‘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 도약의 디딤돌로 인간이 창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자기의 예감을 베르그송의 생철학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때문이다.

기독교와 인연을 끊고 ‘삶’과 외로운 싸움을 벌이기로 마음먹은 호전적인 청년 카잔차키스에게 이 만남은 충격적인 시대사조의 체험이었다.

카잔차키스를 구축하는 정신의 피라미드 바닥에는 또 한 사람의 철학자가 있다. 그가 저서를 통하여 만나게 되는 철학자는 니체다. 니체의 ‘초인’을 인류의 희망이라고 부르면서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쓴다.

구원의 문은 우리 손으로 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우리에게 ‘초인’은 희망이다. ‘초인’은 대지의 종자이며, 해방은 그 종자 속에 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우리를 심연의 가장자리로 데려다 놓았다. 인간은 마땅히 저 자신의 본성을 뛰어넘어 하나의 초인이 되어야 한다. 신의 빈 자리를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 주인의 명령이 없어진 지금, 우리 의지로써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초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슈퍼맨’이라고 부르는 것, 혹은 니체가 ‘위베르멘쉬’ Ubermensch 라고 부르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의 초인은 초월을 완성시킨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호전적인 인간, 짜라투스트의 말처럼 ‘목적지가 아닌, 도상의 다리같은’ 인간이다.

그의 믿음에 따르면, 진정한 초인은 인간 조건을 극복하고, 베르그송의 이른바 ‘엘랑 비딸’을 성취시키는 인간이다.

그가 베르그송과 니체에 공감하는 분위기에는, 삶에 대한 일종의 비극적인 인식이 짙게 깔려있는데, 이것은 20세기초두 유럽정신 사조의 특징이기도 하다.

카잔차키스가 자기 영혼에 골을 남긴 사람으로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다음으로 꼽은 사람은 조르바이다. 그러나 그가 영혼의 편력에서 니체 다음으로 만난 이는 부처였다.

조르바와의 진정한 만남은, 부처와의 만남을 통한 ‘위대한 否定’의 경험 이후에나 가능했다.

부처를 만나고 있을 즈음의 일을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부처의 자비를 통해서 우리는 육체의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육체에서 해방되어 결국은 모든 것과 하나가 된다.....정복하라, 이세상의 모든 유혹 가운데 가장 무서운 유혹인 희망을 정복하라....

그가 산 삶의 여정은 신과 인간, 천사와 악마, 육체와영혼, 물질과 정신,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내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색과 행동 등등의, 영원히모순되는 반대 개념에서 하나의 조화를 창출하려는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루어진다.

카잔차키스가, 자기 삶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으로 마지막으로 꼽는 인물,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야생마같은 주인공 조르바는 실존 인물이다.

조르바라고 하는 호쾌한 기인이 있엇다.

‘새끼손가락 하나가 왜 없느냐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손 새끼손가락이 자꾸 걸기적거리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도끼로 내려쳐 버렷어요’

‘하느님요? 자비로우시고말고요. 하지만 여자가 잠자리로 꾀는데도 이거 거절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을 걸요. 거절당한 여자는 풍차라도 돌릴 듯이 한숨을 쉴 테고, 그 한숨소리가 하느님 귀에 들어가면, 그 자가 아무리 선행을 많이 쌓았다해도 절대 용서하시지 않을 거라고요’

‘도 닦는 데 방해된다고 그걸 잘랐어? 이 병신아 그건 장애물이 아니라 열쇠야, 열쇠’

‘결혼말인가요? 공식적으로는 한번 했지요 비공식적으로는 천번 아니 3천번쯤 될거요. 정확하게 몇 번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수탉이 장부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요?’

‘확대경으로 보면 물 속에 벌레가 우글우글하대요. 자 갈증을 참을 거요 아니면 확대경 확 부숴버리고 물을 마시껬소?’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그의 오랜 영혼의 편력과 투쟁은, 그리스도를, ‘온몸으로 대극을 초월한 전형적인 자유인, 의지의 힘으로 물질로부터 승리를 얻어낸 초인’으로 승인하게 될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극히 독창적인 해석은 그리스 정교회와 교황청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1953년 그리스 정교회가 ‘미칼레스 대장’ ‘최후의 유혹’‘그리스인 조르바’가 신성을 모독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작가를 파문하려 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거룩한 신부님들이여, 그대들은 나른 저주하지만 나는 그대들을 축복합니다. 바라건대 그대들의 양심도 나의 양심처럼 깨끗하고, 그대들도 나만큼 도덕적이고 나만큼 종교적이기를...‘

교황청이 ‘최후의 유혹’을 금서로 지정했을 때 그는 교황 앞으로 편지를 씁니다.

‘이제 하느님의 법정에 항소하리다. 주님, 당신의 법정에 항소합니다.’

그러나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이었다. ‘성화’한 인간 슈바이처의 배웅을 받으며 1957년 독일에서 이승을 떠난 그이 유해는 아테네로 돌아왓다. 그리스의 정교회는 저희 손으로 파문한 그의 아테네 매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 크레타의 이라클레온으로 실려가 그리스 신화의 거인을 연상시키는 한 거인의 품에 안겨 무덤으로 내려갓다. 바로 그가 이륙하는 순간이다.

생전에 그가 마련해놓은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노트정리2010.10.4

2녹색운동의 독불장군...헨리 데이비드 소로

인간이 문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이로써 자기자신의 중심을 되찾는 길은 ‘엘리멘탈리스트’ 4대주의자가 되는 길밖에 없다.

Eliment, 흙물불바람, 지수화풍...4대

-자연이 무엇인가? 스스로 그러한 것이므로 인위를 덧칠하지 않아야 하는 것, 무위 즉 인연의 사슬에 묶여있지 않은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 곧 자연이고, 노자와 장자가 인간의 이상향으로 믿었던 것이 무위자연이다.

-소로는 2천수백년전에 개화한 노장의 무위자연 사상을 19세기 미국에다 꽃피운 자연주의 사상가. ‘월든’의 작가...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내 인생을 오로지 내뜻대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죽음을 맞을때, 내가 산 삶이 참 삶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슬품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월든으로 들어간 그는 타의나 타인의 시선을 물리치고 자기를 중심에다 두는 소박한 삶에 뛰어든다.

그는 28달러를 들여 손수 집을 짓고 손수 지붕을 씌운다.

그는 월든에서는 밤중에 콩이 자라듯이 자신이 자라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가장 빠른 여행자는 자기 발로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나는 강제받으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방식으로 숨을 쉬겠다.

/간디는 비폭력을 앞세운 시민의 불복종운동을 통해 인도의 독립을 성취시켰지만, 이 아이디어늘 제공한 사람은 바로 9백권의 장서 중 7백권을 자기 저서로 채울 수밖에 없었던, 실패한 저자 소로엿다.

/한 나그네가 늪을 만났다. 그는 지나가는 소념에게 늪 밑바닥이 단단하냐고 물었다. 소년은 단단하다고 대답햇다. 그는 그 말을 믿고 늪으로 한 발은 내디뎠다. 하지만 곧 허리까지 빠져들었다. 이놈이 바닥이 단단하다고 하지 아ㄴㅎ앗느냐? ‘단단하다니까요? 절반도 들어가지 않고 뭘 그래요?’

44세에 세상을 떠난 소로의 삶은 짧지만 얼마나 강력한가?

3별로 떠난 왕자/앙트완 드 생덱쥐패리

/연착과는 거리가 먼, 무모한 동체착륙.

앞뒤 가리지 않고 연습기를 하늘로 몰고 올라간 후보생이 바로 생텍쥐페리.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의 인상에 대해서 쓰라’...나는 전쟁터에 나가 본 일이 없으므로 병사의 인상에 대해 아는 척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쓰고 싶지도 않습니다...생텍쥐페리/낙방

/자연주의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생텍쥐페리를 견주어보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전자는 무위자연의 무위라는 자리에 앉은 채 자연을 무찌르는 인간을 관찰하고, 후자는 기계문명의 총화라고 해도 좋을 항공기 조종사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 생존의 본질을 상실해 가는 인간을 관찰한다.

전자는 인간이 문명을 떠나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후자는 인간이 문명 속에서 어떤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관찰한다.

전자에게 자연은 오래된 문제로부터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 자리지만, 후자에게 항공기 조종석은,오래된 문제로부터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 자리가 아니라, 오래된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관찰하게 한 자리다.

/생택스의 견해에 따르면, 어린 아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어른들 문화에 적응하는 몸만들기 과정에서 이 앎을 상실함으로써 실낙원에 합류한다. ‘어린왕자’는, 아이의 마음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천국에 이를 수 없다는 성경 구절을 상기시키낟.

/죽음을 보상으로 여기라. 포구에 묶여 있는 배를 난바다로 풀어주는 것, 그것이 죽음 아닌가?

4왜 발분하지 않고/사마천

/사마천은 鼓子.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고자가 아니고 45세때 궁형을 받고 자지를 잘리는 고자의 운명을 선택햇다.

-당시의 형법중 5형;자자형/이마에 글자를 새김, 의형/코를 베어버리는 것, 월형/발뒤꿈치의 아킬레스 힘줄을 자르는 것, 궁형/자지를 자르는 것, 대벽형/목숨을 빼앗은 것.

-사마천이 궁형의 치욕을 당하면서까지 죽음만은 피하기로 한 것은 5년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의 약속때문, 하늘을 찌를듯한 憤氣를 누르고 단호하게 자기결심을 밝힌 글을 ‘발분지설’이라고 한다. 난국에 한번 되씹어볼 만하다.

-사마천은 궁형의 치욕을 오르지 분기로써 누르고 10년동안, 요순시대부터 한무제까지 2천년동아의 역사를 기록하니 이것이 한문문화권 문학의 거대한 濫觴남상노릇을 해왓고 역사기록으 典範으로 꼽히는 사기.

-방안에서 겨울을 난 알뿌리는 꽃을 피우지 못한다. 열대지방의 벌은 꿀을 모으지 않는다. 사마천처럼 우리도 발분해야 하지 않겠는가?

5베토벤이 행복했다면/루드비히 판 베토벤

-운명이나 합창 교향곡을 들으면서 운전을 하는 것은 베토벤에 대한 모욕이다.

-우리가 환희로 누리는 베토벤의 음악이그의 개인적인 고통과 불행의 소산이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베토벤이 귓병을 앓기 시작한 것은 1796년. 그의 나이 26세때. 그로부터 4년뒤인 1800년부터는 밤낮으로 귀가 윙윙거리면서 이미 절벽이 되어갔다.

-베토벤이 행복했다면, 우리가 그의 음악이 주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겟는가? 만일에 그가 자신의 운명을 비참하게 여기기만 했을뿐 그 벽과의 투쟁을 계속하지 않았다면 1824년의 저 감동적인 무대가 있을 수 있었을 것인가? 장엄미사곡과 합창교향곡이 초연되던 날이었다.

/‘무통분만의 시대’에는 걸작품이 없다?..노트정리2010.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