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헬렌 니어링) 중에서 '죽음에 대하여..'
오랫동안 스코트와 나는 죽은 뒤의 세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왔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알고 싶은 호기심이 있었고 죽음이 어떤 것일지 큰 기대를 가져왓는데, 이제 스코트가 삶의 마지막에 점점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해 많은 시간을 들여 이야기하고 책을 읽었다.
우리집 서재에는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에 관한 책이 수십권 있는데 그 가운데 희귀본으로 유명한 프랑스 천문학자 카미유 클라마리응이 쓴 세 권짜리 책, ‘죽기 전’‘죽음’‘죽은 뒤’가 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삶의 연속성과 의식이 이어짐을 믿었다.
우리앞에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믿는 더 많은 만남과 더 많은 기회를 간절히 바랐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종말이 아니라 옮겨감이라고 느꼈다. 그것은 삶의 두 영역 사이에 있는 출입구였다.
이 문제에 관해,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온 불가지론자 로저 볼드윈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코트는 이렇게 썼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끝으로 생각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변화지. 낮에서 밤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게, 언제나 다시 또 다른 날로 이어지지. 두 번 다시 같은 날이 오지 않지만 오늘이 가면 또 내일이 오네.
사람의 몸뚱이는 생명력이 빠져나가면서 먼지로 바뀌지만, 다른 모습을 띤 삶이 그 생명력을 받아 이어진다네.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변화는 우리 몸으로 보아서는 끝이지만, 같은 생명력이 더 높은 단계에 접어드는 시작이라고 볼 수 있지.
나는 어떤 식으로든 되살아남 또는 이어짐을 믿네. 우리 삶은 그렇게 계속되는 것이네‘
스코트는 오랫동안 스스로 의도하고 목적이 있는 죽음에 대해 얘기해왔다. 그이는 자신이 완전히 무능력자가 되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려고 했다.
요양소에서 두려움에 떨며 오랜 시간에 걸쳐 죽어가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앗다.
‘왜 우리의 마지막 날과 죽음을 그렇게 소란스럽게 만들어야 할까?’하는 의문을 가졌다.
쾌적하고 낯익은 환경속에서 조용하고 조화롭게 사라지는 대신에, 우리는 비싼 돈을 들여 우리가 사랑해온 이들을 병원이나 요양소로 보내어, 그 과정을 편안하게 돕기 보다는 자연스럽지못한 수단으로 막으려는 낯선 사람들에게[ 맡긴다.
우리는 불편함 속에서 울음으로 인생을 시작하지만, 떠날 때는 적어도 어느 만큼 우리의 목표를 이룬 가운데 위엄과 완전함을 지닌 채 갈 수 있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가 지향해서 일해온 우리 삶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과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스코트는, ‘하루 일을 마치고 집안이 잘 정돈된 문간에 서서 그 앞에 펼쳐진 넒은 들판을 바라보며 저녁을 맞이하는 남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스코트는 자기 힘이 아주 사라지기 전에 가고 싶어했다. 그이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가기를 원했고, 의식을 갖고 또 의도한 대로, 죽음을 선택하고 그 과정에 협조하면서 죽음과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그이는 죽음의 경험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기꺼이 그리고 편안하게 몸을 버리는 기술을 배우고 실천하기를 기대했다. 죽음으로서 그 자신을 완성할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사는지 배워왓는데 이제 어떻게 죽는지 배우고자 했다. 노자는 ‘생명이 열매를 맺고, 떨어지게 하라’고 말했다. 스코트의 삶은 완전한 열매을 맺게 되었으니, 이제 가도록 놓아둘 준비가 되었다.
다일런 토마스는 ‘이렇게 좋은 밤에 점잔을 떨수는 없잖은가’하고 노래했지만, 스코트는 자신의 죽음이 점잖고 목적이 있으며 아울러 평온하게 이루어지길 바랐다. 그이는 궁극적인 경험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몽롱하거나 의식이 없는 채로 가는 대신 죽음을 음미하고 심지어 즐기고자 하였다. 그이는 특히 소로와 웰즈 경우와 같은 평온한 최후를 좋아했다.
/1862년 소로의 누이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오빠가 오랫동안 앓고 있을 때도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불평이나 우리와 같이 남아 있으려고 하는 소망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오빠의 완벽한 만족감은 참으로 훌륭했으며, 생기와 기쁨으로 가득찬 것처럼 보였다....이윽고 숨이 점점 약해졌고, 아무런 저항없이 오빠는 우리를 떠나갔다.’
/기자가 웰즈와 마지막 날 즈음에 인터뷰를 하러 갔을 때 그는 지나치리만큼 기자를 소홀히 대접했다. ‘나를 방해하지 마시오. 내가 지금 죽느라고 바쁜 걸 보지 못하시오?’하는 말이 기자가 들은 말 전부였다.
이 두 이야기는 스코트를 즐겁게 했으며, 의심할 바 없이 그 자신이 떠나는데 좋은 모범이 되었다.
죽음에 맞닥뜨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데 얼마나 많은 방법들이 있는가? 죽는 사람 수만큼이나 많다. 죽음이 실제로 어떨지는 우리 자신이 갈 때까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뒤틀린 떠남 또는 꽝 닫힌 문처럼 만들 수도 있고 또는 조화로운 정점, 절정으로 만들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태도, 어떤 행동으로 죽음을 맞는가 하는 열쇠는 우리 손에 달려있다. 바람직하기로는 열린 눈과 감각을 가지고 떠나며, 옮겨감을 환영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준비하면 우리는 분별있고 평온한 마음으로 뜰을 걸어내려가, 문을 열고 그 길의 모든 과정을 눈여겨 보면서 갈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훨씬 더 위험하고 혼돈스러운 과정인 탄생의 과정을 겪었으며 그것을 넘어 살아왔다. 이제 우리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보아야 할 때다.
스코트가 아흔여섯이 되자, 나는 그이의 에너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이의 건장한 체격은 마침내 쇠약해지고 육체는 다해가고 있었다. 그 몸은 다 닳은 연장이었고, 그이는 물러서서 자기가 바라는 새롭고 더 생산적이기조차 한 경험의 세계로 갈 준비가 되었다. 프로이드는 죽기 전에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부지런히 일하며 살아온 뒤의 당연한 결과로서 나는 지쳐 있다네. 나는 이제 쉬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하네.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연결되어 있던 유기적 요소들이 이제 서로 떨어지려 하고 있네. 대체 누가 그 요소들을 강제로 계속 붙어 있게 하고 싶어하겠나?’
스코트는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평생에 한 순간도 따분해하거나 흥미로운 주제을 잃어버린 일이 없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나이먹음 The coming of Age'에서 ’노인에게 건강보다 더 큰 행운은 계획을 세워 바쁘고 유용하게 살면서 권태와 쇠퇴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고 말했다.
메인으로 이사온 1,2년 뒤부터 우리는 장의사에 돈을 주고서 미리 우리 자신의 화장에 대비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스코트가 ‘주위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내게 남긴 지침을 따르는 것인데, 이 지침은 1963년에 처음 쓰고 1968년에 그이의 이름 머리글자를 써 넣었으며 1982년에 다시 그렇게 했다.
1.마지막 죽을 병이 오면 나는 죽음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란다.
-나는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열린 곳에 있기를 바란다.
-나는 단식을 하고 죽고싶다. 그러므로 죽음이 다가오면 나는 음식을 끊고, 할 수 있으면 마찬가지로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2.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정제,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없다.
3.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하게 가고 싶다. 따라서,
-주사, 심장충격, 강제급식, 산소주입 또는 수혈을 바라지 않는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리를 함께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 위엄, 이해, 기쁨과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나누기 바란다.
-죽음은 광대한 영역의 경험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4.장례 절차와 부수적인 일들.
-법이 요구하지 않는 한, 어떤 장의업자나 그 밖에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의 조언을 받거나 불러들여서는 안 되며, 어떤 식으로든 이들이 내 몸을 처리하는 데 관여하여서는 안 된다.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내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 속에 넣은 다음, 스프루스 나무나 소나무 판자로 만든 보통의 나무 상자에 뉘기를 바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내가 요금을 내고 회원이 된 메인 주 오번의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어떤 장례식도 열려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죽음과 재의 처분사이에 언제, 어떤 식으로든 설교사나 목사, 그 밖에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나의 아내 헬렌 니어링이, 만약 헬렌이 나보다 먼저 가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스피릿 만을 바라보는 우리 땅의 나무 아래 뿌려주기 바란다.
5.나는 맑은 의식으로 이 모든 요청을 하는 바이며, 이러한 요청들이 내 뒤에 계속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되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에 관해 말한 30가지쯤 되는 인용구를 담은 쪽지를 만들어, 그이가 죽는 마지막날의 부고용으로 친구들에게 보낼 준비를 했다. 그 쪽지는 그이가 가기 전 해에 보여주고 허락을 받았다. 여기 그 몇 편을 옮긴다.
-당신은 배에 탔습니다.
당신은 항해를 했습니다.
당신은 해변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내리십시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160
-씨앗이 터질 때가 되면, 식물은 갑자기 낱낱으로 흩어진다.
그 순간 씨앗은 껍질 속에 갇혀 그렇게 오랫동안 좁게 누워 있던 상태가 파괴되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사실은 새 세상을 얻는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와 탄생의 관계는, 우리와 죽음의 관계와 같은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지금까지 삶을 가능하게 했던 모든 조건들이 사라짐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감이었던 것이다./구스타브 페이너, 죽은 뒤의 삶. 1836
-죽음이 개인의 발전을 지속시킨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때나, 자리에 없을 때나, 잠잘 때와 마찬가지로 죽음은 우리의 지각을 보존한다.
탄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죽음은 감각을 더 예민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없는 색깔을 보게 하고, 지금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게 하며, 우리 눈 앞에 있어도 만져볼 수 없는 신체와 대상물들을 알 수 있게 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다./에드윈 아놀드 경, 죽음과 그 너머.1901.
-죽음을 슬퍼하고 그럴 듯한 위로의 말을 던지는 사람이 불멸이라는 생생한 사실에 눈을 돌릴 수 있겠는가?
육체가 영혼을 가졌는가? 아니다. 영혼이 육체를 가진 것이다. 영혼은 육체가 제 할 일을 다 했음을 알고, 아주 엄격하게 그것을 한쪽으로 비껴놓은 뒤 얼룩이 묻은 옷처럼 벗어버린다./루시엔 프라이스, 영혼의 기도.1924
-우리는 죽음이 육체의 끝이라는 것 말고 모든 모험의 종말이라고 상상할 수 없다....아직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너무나 익숙하고 여전히 수수께끼이며 흥분을 가져다주는 우리 자신들이 바로 우리가 일하는 일감이다./메어리 오스틴, 죽음의 체험.1931
(여기서 잠시 3인칭으로 말하겠다.)
스코트는 훌륭한 일생을 살았으며 훌륭한 죽음을 맞았다.
그이는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았으며, 평온하게 죽었다.
그이는 바라던 대로 집에서, 약물이나 의사 없이, 병원에서처럼 제한을 받지 않고 헬렌이 함께한 가운데 갔다. 헬렌은 그이가 잘 해온 것에 기쁜 느낌을 가졌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0년에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보낸 삶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고 말했다.
어떠한 장애도 없었다. 그이는 헐떡이지 않앗고, 경련을 일으키거나 떨지도 않았다. 더 이상 숨이 남아있지 않고 더 이상 육체에 매여 있지 않을 때까지 단지 부드럽게 숨을 쉬었다. 그럴 수 없을 만치 순조로웠다. 아름답고 편안한 임종이었으며, 다만 생명의 숨을 멀리 보냇을 뿐이었다.
계획했던 떠남을 곁에서 도우면서, 헬렌은 슬픔없이 그이의 마지막을 지켜 보았다. 헬렌은 손실이 아니라 그이가 해방됨을 느꼈다. 헬렌은 그이가 그렇게 가서 행복하게 느꼈으며, 자기 차례가 되면 자기 또한 그렇게 하기로 작정했다.
헬렌은 삶을 마무리하고 자신의 출발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기가 기여할 수 있는 시간이 몇 해 더 남아 있었다.
스코트의 죽음은 자신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를 보여주었다.
중요한 것은 사라지는 인격체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느꼈다. 그이라는 존재의 정수, 실재는 죽지 않고 남아 있다. 덮개와 껍질은 어쩔 수 없이 단명할 수밖에 없다.
(스코트의 100세 생일인 8월 6일과 그이가 죽은 8월24일은 간격이 24일이 채 안되었다.)
(다시 1인칭으로 바꿔 말한다.)
스코트가 죽은지 6년이 지나 내가 여든다섯이 되었을 때, 나는 갑자기 내가 나이먹었음을 알았다.(헬렌은 스코트보다 스물한살이 어렸다....53년동안 함께 살았다.)
나는 오랫동안 빠르게 페달을 밟아왔다. 나는 이제 분명히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으며, 더 이상 예전에 쉽게 그랬듯이 힘있게 오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제 가야 할 때, 천천히 내릴 때가 왔음을 느끼고 있다. 그동안 해왔던 일은 거의 마무리되었다. 나는 걱정없는 행복한 여행객이었으며, 이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중이다. 모퉁이를 돌면 끝이다.
죽음 없는 삶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영원한 육체적 삶? 죽음과 소멸은 모두 하나로 만든다. 관계들은 뒤얽힌다. 저마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들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은 모두 영속하는 것이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과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과 섞이는 것이다.
죽음은 몇십년의 적당한 간격을 두고 우리를 느슨하게 한다. 죽음은 삶의 마감이다. 삶이라는 학교를 떠나 이제 그만 일하라는 통지를 건네주며 쉬라고 말한다. 이제 그만 끝이다.
죽음은 육체를 갖고 사는 삶의 휴가이자 새로운 전환점이다. 우리는 그것을 환영해야 한다.
하루 일이 끝나면 밤이 잠의 축복을 가져다 주듯이, 죽음은 더 큰 날의 시작일 수 있다.
아직 앞에 남아있는 가능성있는 날들을 내다보면서 일정표를 만드는 것이 내게 흥미로운 일이 되었다. 나는 마침내 노년을 경험하고 있으며 보상이 없지 않음을 발견하고 있다. 사람이 실제로 나이를 먹으면 더 깊이 보고 들을 수 있다. 당신이 저녁노을, 나무, 눈 또는 겨울을 아는 것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일지 모른다.
바다, 호수, 모든 것이 어린 시절처럼 마법이 되고 놀라움이 된다. 그리고 나서 처음으로,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으로 본다. 더 깊은 열락과 이해을 가지고 음악, 새의 노래, 바람과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세익스피어의 73번 소네트 한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내가 머지않아 떠날 것을 더할 나위없이 사랑하게’된다.
모든 것은 덧 없으며, 사라진다. 내일도 그 자리에서 언덕 뒤로 지는 해를 보고, 이른 아침에 새소리를 들으며, 깊은 밤 하늘의 깊은 침묵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없다면, 지금 그것을 깊이 맛보도록 하자.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끌어들여 잘 맛보고 소화하도록 하자.
스코트는 이상주의자였으나, 강인하고 실천하는 일꾼, 곧 실천하는 이상주의자였다.
또 타고난 종교인이었으나, 어떤 교회의 구성원도 아니었고 어떤 종교 집단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학식있는 사람이었으나 땅벌레같은 농사꾼이었고, 공적인 인물이었으나 운둔자로서 행복했고, 명망있고 우렁찬 웅변가였으나 보통 대화에서는 말수가 적었다. 학문적인 주제에 관해 간결하고 사실에 바탕을 둔 글을 썼으나, 일상 생활에서는 웃음을 머금게 하는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없이 변화하지만, 어떤 것도 이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은 인과율의 흔들리지 않는 법칙속에서 다른 모든 것과 이어진다.
나는 삶이 하나의 통일체로서, 일단 한 번 생겨난 사랑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느낀다.
내가 스코트에게 주고, 또 그이에게 받은 사랑, 그리고 내가 아는 수많은 여성, 남성들과 주고 받은 사랑은 이 세상에서 여전히 진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나는 사랑한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은 하늘의 영광을 더하는 것이다. 모든 나이, 장소, 시간에서 느껴온 사랑이 빛나고 있지 않은가! 영원히 진행되고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은 원천이자 목표이고, 완성의 도구이다.
사랑의 그물이 지구를 가로지른다. 미묘하게 빛나는 선들이 세상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가는 망을 만든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사랑의 끈들이 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진행되고 있다. 사랑에 참여하고 사랑을 주는 것은 인생의 가장 위대한 보답이다. 사랑에는 끝이 없으며 영원히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과 떠남은 삶의 일부이다.끝.2011.11.15.화.읽음(2012.3.13화 다시 훑어봄/독서노트2012.3.15.목)
*헬렌 니어링 1904년 미국에서 태어나서 1995년 죽었다.(스코트 니어링은 1883년 태어나...1983년 세상을 떠났다...21살 차이...53년 함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