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운명을 믿는가?'(2)
6.....그대는 그대의 운명을 믿는가?
그대의 삶은 운명인가? 아니면 그대의 선택인가?
운명적 선택? 선택적 운명?
나는 가끔 그런생각을 해왓지만 오늘 들어 부쩍, 나의 삶은 운명인가? 나의 의지, 나의 선택은 어디까지 미치는 것일까? 바로 시원스런 대답나오지 않는 물음을 자주 하곤 한다.
특히나 지난 8월 수단산 챔깨가 한국시장에 다시 돌아오면서 풀리지 않는 화두!
지난 5년여동안 요지부동 꿈쩍하지 않아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잊어야 하는구나 싶었는데...오늘내일 이제는 문을 닫아야겠구나 싶었는데...다시 돌아왔으니 15년이나 지난 옛일을 되돌아보고...‘운명’, 운명적인 만남, 운명적 삶을 떠올려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난 것은 1993년 어느 가을날, 내가 근무하던 해태상사 농산사업부 사무실!
그때는 내가 한참 날리던 시절. 한국농산물수입시장을 쥐락피락하던 때.
동남아지역 농산물은 물론이고 중국산 농산물까지 국내입찰시장에서 해태상사읭 박부장하면모두들 부러워하던 때였다.
태국산 옥수수 타피오카, 중국산 참깨 팥 땅콩 녹두등등
영국에서 사업을 하던 그가 일본출장후 귀국길에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즈음 나는 인도산 사료곡물 공급업자를 찾고 있었다.
나를 통하여 어느 날 혜성같이 나타나 참깨등 중국산농산물을 한국시장에 수출하는 큰손이 된, 스타덤에 오른, 홍콩의 중국농산물 공급업자의 소개로 그가 찾아온 것이었다.그는 금융편의를 위해 스위스에 본사를 두고, 영업활동은 영국 런던에서 하는, 전세계를 무대로 하는, 주요생산지와 주요소비지를 연결, 수요공급 틈새를 이용하는, 국제농산물 전문무역상이었다.
나는 우여곡절을 거듭하면서 방콕지사장을 끝내고, (고지식하고 곧은 성격 때문에 오너와의 불화를 극복하지 못하고...방콕지사장직을 팽개치고, 자원하여 조기귀국, 1989년 가을, 사연많은 방콕지사생활 1986.10-1989.9....), 또 우여곡절끝에
88올림픽이 끝난 서울은 휘황찬란하였고 서울의 거리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3년여 태국생활은 나를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듯, 서울의 모든 것이 ,어리벙벙...눈을 더 크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나의 방콕생활은 나를 30년정도 뒤떨어지게 하였구나 싶었다. 거기에그룹총수의 동생과의 불화는 나를 마지막 선택의 길로 몰아넣었다.
나는 내뜻을 꺾느니 차라리회사를 그만 두기로 하였다. 방콕지사장을 그만두면서 본사원대복귀를 희망하였다.
운명의 순간이 온 것인가? 그것은 나의 의지에 의한 단순한 선택이었는가? 아니면 운명적 선택이었는가? 선택적 운명인가?
나는 본사조직개편에 따른 새로운 보직도 거부한채 회사를 떠나기로 하였다.
회사는 바로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그룹사 전출을 위한 대기발령을 내주었다.
대기발령은 보통 3개월 시한.
회사는 그동안의 공헌을 생각하여 대기발령을 내주고 나에게 3개월의 생각할 시간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월급쟁이 회사생활을 모두 접고, 내 회사 ‘동희’를 세워야 하지않을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룹사로 전출되어도 내뜻대로 내고집대로 회사생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어정쩡하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에서 내뜻을 접고 고개숙이고 회사생활을 하는 것이 마뜩찮았다. 정말로 싫었다.회사생활을 계속한다는 것이 끔찍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한참 자라나는 자식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이렇ㄱ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다른 생각이 들기도 하고..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바귀었다.
그래 못이기는 척, 나를 필요로하는 그룹사로 옮겨볼까? 더 늦기 전에 오라고 하는 곳이 있을때 그곳으로 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대도시생활에서 소시민이 제대로 독립적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더군다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길이 아니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한번 떨어지면 천길 낭떨어지, 자칫 잘못하면 영원히 버림받게 되어있었다.
생각을 더 정리하기 위하여, 아침에 출근하고 눈도장찍고는, 먼저 회사를 그만두고 자기회사를 운영하는 선배들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어찌 생활하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이런저런 조언도 듣고 내생각을 가다듬는 시간으로는 아주 적격이었다.
어느날은 인사동의 철학관을 찾아서 나의 운명이 어찌되는지 장난삼아 물어보기도 하엿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에...
무보직상태의 대기발령도 거의 3개월이 다되어가는 어느 날...
출근하자마자 사장실에서 급히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오너동생 사장님왈; 박차장, 아무말 하지말고...회사가 원하는대로 하시오! 박차장 마음 모두 이해하니 다른소리 하지말고...지금 당장 농산팀장으로 가서...나 좀 도와주시오! 자 그렇게 합시다. 자 다음에 또 봐요! 하면서 나만 남겨두고 사장실을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나;...............
내 머릿속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태초에 우주를 만들 때 세상이 혼돈스러웠다고 하는데....그때의 내머리속이 그러하엿을까?
‘어찌할까?’ 받아야할까? 거듭 거부해야 하는 것이 좋을까?
그동안의 수많은 일들이 왓가갓다 주마등처럼...이것저것 섞여서 가닥이 잘 잡히지 않았다.
혼돈상태였다. Chaos!
'자 다음에 봅시다. 잘 부탁합니다‘ 하면서 사장실을 나가지않고...앉아서 내 대답을 기다렸다면...나는 필시...내 성격상 나의 의사를 조단조단 하나하나 말하면서 거부의 뜻을 펴지 않았을까?
운명일까? 아닐까?
오너동생인 사장은 나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떠난 오너동생 사장덕분으로...나는 못이기는 척...그냥 사장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어찌할 일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사장과의 불화는 화해가 되엇고 나는 그동안 무슨일이 있었냐는 듯이 농산팀장이 되어 불이야불이야 업무파악에 들어갔다. 눈앞에 일이 산더미처럼 놓여있는 것이 눈에 밟혀 다른 생각할 틈이 없었다.
운명일까? 아닐까?
사장님이 그렇게 사장실을 나간 것이 운명일까? 아니면 짜여진 각본에 의해서일까?
나중에 곰곰이 그때를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사장비서실장과 나의 가까운 대학선배의 사전각본설이 유력하였다.
나의 꼴통기질을 익히 알고있던 그들로서는 역시 다혈질인 사장님에게 사전 시나리오를 주었지 않나 싶었다.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내가 말할 기회를 주지말고 그대로 사장실을 나가는 사전각본!
나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결과적으로는 사장뜻을 그대로 수용하는 모양새를 이끌어내는 시나리오!
그럴 듯하였다.
이것까지 운명일까? 아닐까?
그렇지 않았다면 나의 운명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이고, 복잡하다 복잡해! 케이어스!
지금 생각해보면 분에 넘치는 배려였고 특혜였다. 감사해야 할 것이다.
만일..그때...
내가 거부했다면??? 어찌되었을지???
이것이 나의 운명일까?
아니면 그것은 나의 선택일까?
당시 농산팀장이 부하직원들과 함께 개인회사를 차려 갑자기 나가게 되었다.
회사로서는 큰 사고였다.
농산팀에는 신입사원과 여직원만이 남아있었다.
누군가 긴급소방수가 필요하엿다.
마침 내가 회사에 남아있었다.
긴급 투입된 것이었다.
왜 그상황에서 농산팀장이 개인회사를 차려 나가게 되었을까?
누구를 위해서? 그를 위해서 아니면 나를 위해서?
정말,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것일까? 운명의 정교한 손이 있는 것일까?
만일, 당시 농산팀장이 개인회사를 차리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엉겁결에 떠밀려서 긴급소방수 노릇을 하게 되었지만...농산부는 나의 친정이었다.
나의 잔뼈가 굵어졌으며 방콕지사장으로 나가기 전 근무, 차장으로 승진하여 방콕지사장으로 나가게 된 자리였다.
낯익은 곳 익숙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새롭기도 하고 낯익기도 하였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생명이되어 살아난 듯 모든일들이 재미있고 잘 풀려나갔다.
비유가 맞을지...사약을 받아 죽음 바로 전에...누명이 벗겨져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고 할까?
그러나, 돌아온 농산사업부에0는 그 옛날 화려햇던 자국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겐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던 곳이었지만 몇 년동안 어찌 관리했는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고 잡초만 무성할뿐이었다. 모두 흔적없이 불타버리고 주춧돌만 남아있다고 할까?//2010.1.11정리.
(내블로그; 자연.자유.자존, 2010.1.11 수단출장여행기에서)
덧;
(위 농산사업부장은...개발팀장으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그때 당시의 상황은;
소위 ‘도이모이’ 정책으로 베트남시장이 개방되던 때, 1990년? 1991년?
전사적으로 베트남 시장개척을 위하여 수출촉진단을 파견하기로 하였는데...
갑자기 마땅히 단장할 만한 부서장이 없어서 나를 급하게 지명하여 임무를 부여하기로 한 것이었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것이 1975년? 벌써 15년이 지났으나 아직 한국상사들의 베트남진출은 미미하였다.
아무도 선뜻 베트남 시장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국교가 정상화되지도 않았고 민간인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적대감정이 있을 수 있어서 위험한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런데, 베트남 정부의 공식초청행사로 하노이에서 수출촉진행사에 참석하는 것이니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어서 반대하지 않앗던 것이다.
처음 가보는 하노이...
맨처음 도착한 사이공공항...
마돈나의 Like a virgin이 울려퍼지는 호치민공항....
늦은 오후, 저녁식사 전 시내 공원...여자 소매치기 시계...(나중에 정리하기로 하자...)
나; 차라리 잘 되었다싶었다. 집터와 주춧돌은 남아있으니...쓸데없이 이것저것 거추장스럽게 남아있는 것보닺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새롭게 내 마음대로 고쳐서 지어나가는데 더 좋을 것이었다.
옛날 좋았던 시절의 골격은 내 머릿속에 모두 들어있고 다만 어찌 내색깔로 칠하고 만들 것인지는 내 뜻대로 될 것이니 더 좋은 것 아닐까?
쓸모없이 덩치만 커져버렸다면 새롭게 뜯어고치려면 새집을 짓는 것보다 몇배 더 어렵지 않을까? 잘못 배워 못된 버릇만 잔뜩 가지고 있는 머리큰 고참사원들을 제대로 바로잡으려면 얼마나 힘들 것인가? 여직원 하나와 신입직원만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속모르는 사람들은 변변한 직원도 없이 신입사원만 있어서 얼마나 힘들까 걱정해주지만 오히려 나는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속설로 불난 집에 복이 들어온다고 하지 않던가?
실제로 불이 난 것은 아니지만 불이 난 거나 마찬가지로 하나도 남아잇는 것이 없으니 새롭게 새집을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 제대로 된 아이디어와 할 려고 하는 의지만 있으면 새집을 새롭게 잘 짓는 것은 문제가 아닐 것이었다.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옛날 거래선들에게 나의 본사복귀를 알렸다.
어느덧 옛날의 명성을 다시 회복하였다.
본사로 귀임하는 해외지사원들이나 신입사원들은 서로 다투어 나의 부서 농산사업부를 희망부서, 근무하고싶은 부서로 제일 먼저 신청을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고 잘 나가게 되었다.
운명은 어찌 고난을 헤쳐나가는 과정을 보고서 복을 주는 것인가?
나의 의지와 나의 노력이 운명을 끌어오는 것일까?
결국은 나의 선택, 나의 의지, 나의 노력하는 그것까지 운명일까?
운명적 선택? 선택적 운명?/2010.1.21.목,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