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데미안.조르바 2003. 9. 23. 15:27

2003.9.23. 월. 퀴논호텔 302호,715a.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에, 가슴이 썰렁한 느낌의 꿈속에서 잠을 깼다.

새벽 5시. 서울 시각으로는 아침 7시가 되니까 그렇게 이르지는 않지만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여 아쉬웠다.

다시 잠을 청해 보았지만 비몽사몽, 잠이 다시 들지 않았다. 6시 30분 모닝콜이 쑥스럽게 되었다.

 

아침 6시의 퀴논 해변은 벌써 부산하다. 걸어다니면서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우리식 놀이공원에는 체조를 하는 사람, 제자리에서 걷는 사람, 놀이기구위에 온몸을 맡기고 몸을 비트는 사람, 제각각으로 운동을 한다.

주로 여인네들이 많다. 젊은이들도 있지만 중년 이상의 할머니 년배가 더 많이 눈에 띈다.

 

사는 것이 무엇인가. 비교적 말라빠져 궁색해보이는 몸매와 얼굴이 그렇게 밝은 모습은 아니지만 무언가를 생각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임을 느낄수 있다.

 

하릴없이 무작정 소일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하고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바닷가 모래밭은 온통 뒤집어놓아 사람의 내장을 꺼내어 벌려놓은 것처럼 볼꼴 사납고 어수선하다.

무슨 편의시설을 만들려 하는가. 백사장을 더 인간적으로 아름답게 꾸미려 하는가.

하여튼, 어찌되었든, 오늘은 꼴불견이고 나의 머리를 산발시켜놓은 것처럼 엉망이다.

 

호텔과 해변 모래밭 사이에 놀이터가 있고 또 도로가 있다. 아침 이른 시각인데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시크로를 몰고 가는 사람도 있다.

 

언제봐도 복면을 하고 모자를 눌러쓰고 긴팔소매를 하고 자전거를 모는 젊은 여인들이 아름답다. 매력적이다.

남국의 이국의 분위기임을 감안해도 특별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호치민보다 규모가 적은 중부도시여서인가. 오토바이보다 자전거가 훨씬 더 많다.

자전거가 다니는 남국의 해변가 도로, 아침 6시를, 서울에 옮겨놓고 내 몸과 마음을 함께 옮겨실을 수 없을까.

 

호텔의 아침부페는 너무 부실하다. 쌀국수만이 그런대로 입맛이 맞아 두 그릇, 그래도 점심과 저녁 식사가 어찌될지 모르니 막대기 빵 2 개, 볶음밥까지 양을 보탰다.

과일도 부실하다. 커피는 여전히 쓰다.

 

어제 준비없이 안디라의 새사장을 보고, 미세스 안의 복잡한 계획을 들으며, 부라부랴 퀴논행 비행기를 탄 것은 바로 복잡함 그것이었다. 점심을 왜 걸러야 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탑승전 비아그리멕스코의 츄안을 만난 것은 길조인가 아닌가. 머쓱한 그의 표정이, 당황해 하는 그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어야 했다.

 

Seagull 호텔에서 이멕스빈딘의 탐과 여직원, 안과 저녁을 하엿다. 어찌나 짜게 요리를 하였는지 배고픈 뱃속을 흡족하게 채우지 못하였다. 탐은 우락부락 녹녹치 않다. 국영기업체의 사장에 선임되었으면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 거기에 맞추고 일을 해야할 것이다. 오늘 그는 사장으로 승진하였다하여 건배를 제의했더니 베트남식으로는 ‘바톰업’을 해야한다고 햇다. 그래도 어찌할 것인가. 축하를 하려면 잔을 비워야 한다는데, 맥주잔 하나를 쭉 비워주면서 축하을 해주었다. 앞으로 비즈니스도 시원하게 잘 되기를 바라면서, 못먹는 술을 단번에 마셨다.

그는 내가 요구하는 모든 조건에 대하여 간단히 승낙하지 않았다. 까다로운 조건들을 쉽사리 승낙한다는 것도 어쩜 이상한 것 아닌가. 시간을 두고 기다려 보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 타피오카 사업을 어떻게 전개해야 하는가. 가는 곳마다 김상무와 부딪칠 것인데 마음 상하지 않도록 단단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내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잘 다스려야 할 것이다.

 

2003.9.23.화,120p, 퀴논호텔 로비에서

덥다. 정말 덥다는 것의 사전적 의미가 무엇인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덧칠이 되고, 가만히 있는데도 눈위로, 코위로, 목덜미에 송글송금 땀이 솟아난다.

 

땀을 흘리면서 새삼 또 인생을 되돌아 본다. 삶이란 무엇인가.

그를 어제 공항에서 만난 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행인가 불행인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는데 나를 돕는 것인가 그를 돕는 것인가.

 

요즈음 회사관련 좋지 않은 일들의 중심자리 하나에 그가 저지른 막대한 체선료가 있다. 약속을 하고도 제대로 지키지 않아 결국은 법정다툼을 불러왔고, 나를 불미한 경우를 피하려고 먼저 선주에게 정산해주고 말았다.

그런데도 김상무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 또한 나를 기피하고 있던 차였다.

 

오늘 아침 8시 약속을 다시 취소하려 했는데 가까스로 10시 반으로 약속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오늘 배웠다. 끝난 줄 알았던 일들이 다시 새롭게 태어나고 나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실낱같이 보인다.

더구나 포기하지 않는 자, 끝까지 기다리는 자,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하늘은 알게모르게 소리없이 도와준다는 것을 오늘 알았다.

 

새로운 계약을 통하여 조금씩 해결해가기로 하니, 망외의 소득이 덩달아 따라 나왔다.

김상무가 어렴풋이 못된 짓을 했다니 시간을 갖고 기다려봐야겠다.

 

Andira와의 인연을 생각해봐도 인연이란 무엇인지 새삼스럽다. 베트남 사업을 맨처음 시작할 때, 비오는 날 지방으로 물품확인차 갔다가 돌아오는길에 큰 일을 치를뻔 하였었다.

가 논에 뒤집힐 뻔한 사건이었는데 동네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고, 얼마간 보답을 했더니 그들은 나를 꽤 존경스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어려운 시기에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은 우연인가 행운인가. 누가 나를 도와주는가.

김상무가 어지러놓고 나간 자리가 만만치 않은데, 나 혼자 다시 시작하려면 쉽지 않은데,

그들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내겐 크나큰 축복이다.

포기해버릴까, 옛날하고 많이 다른데 나이들어서 할 수 있을까 고민하였는데, 그들이 있으므로 한번 더 재정비한다면 해볼만 하지 않을까.

손발을 묶어놓고 눈까지 멀게 해놓고 베트남 에이전트까지 야합해간 김상무가 불쌍하기만 하다. 15년 인간신뢰를 일순에 무너뜨려버린 그에게 어떤 보상이 갈까. 하늘은 그를 도와줄까. 나의 원칙이 그렇게 그를 힘들게 하고 그를 돌이킬 수 없는 배반의 유혹으로 몰았단 말인가.

 

땀이 송글 송글 솟는다. 하늘이 돕고 있음을 알리듯이 땀이 솟아서 콧등위로 떨어진다.

 

2003.9.23. 화.1645. VN 459, QN/HCM 1630-1755, 14D.

퀴논시에서 공항까지 약 1시간여, ATM은 차를 내주었다. 운전수는 5불의 고마움 표시에 어쩔줄을 모른다.

호치민까지는 1시간 20여분의 비행. 날씨는 산뜻한데 덥다. 대합실도 선풍기가 돌고 잇는데도 덥기만 하다. 땀이 끈적거리며 온몸을 휘감는다.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가는 공항의 활주로는 햇볕을 거슬러 따갑다. 강열한 태양이 있음을 실감하지만 몸은 반대로 가뿐하고 상쾌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땅은 아주 작다. 산도 작고, 논도 작고, 그 사이를 흐르는 강도 작지만 그래도 길게 흐른다.

언뜻 산과 들은 우리의 몸이요, 강은 핏줄이 아닐는지 연상해 본다.

비행기는 구름 위를 날아가는지 발 아래에 솜같은 구름, 새털같은 구름이 지천이다. 저 멀리는 바다의 수평선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늘 끝이 바다 위로 내려와 만나고 있는 것같기도 하고, 착각 속에 잠시 빠져있다.

형형각각의 구름들이 하늘 위에 떠있는 것인가, 바다 위에 떠있는 것인가 다시 착각 속에 빠진다.

 

저멀리 태양은 구름을 뚫고 빛을 발산하면서 여러 가지 그림작품들을 만들어낸다.

커다란 호랑이도 그리고, 코끼리 모양도 만들고, 말, 사슴, 토끼, 개같은 모양도 만든다.

내가 생각하는대로 그림이 그려지고 만들어진다. 나는 하늘 위에서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작가가 된다. 창조는 하늘의 몫, 창작은 인간의 몫이라는데 난 오늘 창작을 하며 인간이 된다. 갑자기 구름들이 병사들로 바뀌고 그들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칼싸움을 하는 것으로 그림이 바뀐다.

어느덧 태양은 구름 뒤로 멀어져가는 듯하고, 붉으스레한 구름들이 많아지면서 낙조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거대한 얼음산이 만들어진다.

 

하늘 위, 비행기 안에서 보는 세상은 또 다르게 아름답다. 땅 위의 것들을 작게 볼 수 있고, 하늘 저 멀리 구름들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릴 수 있으니, 세상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2003.9.23.730p, 르네상스 호텔로비에서

Yesterday의 감미로운 선율이 나를 맞이한다. Yesterday가 이렇게 감미로운 줄 예전에 몰랐다. 생맥주 한잔에 얼큰해지고 삼겹살 한접시에 꿀맛같은 된장, 마늘, 고추, 그리고 상추. 9만동에 나는 부러울 것이 없었는데, 어둠이 들어선 도시의 골목길을 더듬어 호텔에 들어서니 Yesterday의 감미로움이 맞이하더라는 것이다.

 

호텔방으로 바로 들어가기가 뭔가 서운하여 로비의 의자에 앉았다. Yesterday의 느낌이 사라지기전에 글로 남기고 싶었는데 악단은 벌써 호텔을 떠나버리고 빈 공간과 빈 마음만 내곁에 남아 허전하다.

방금 전까지 그 많던 투숙객들은 어디로 갔느냐. 시끌시끌하던 로비가 조용한 텅빈 적막공간이 되었다. 바글거리던 자리가 여느 초저녁의 한가함이 호텔로비를 감싸고 있다.

호텔 문밖 도로 위로는 불을 켠 오토바이들이 끊임없이 달려 지나간다. 도로 저편으로는 남국의 밤이 짙게 내려앉아 있다.

 

호텔 로비 라운지는 여행나온 것처럼 자유롭고 편안하다. 서양친구들 두 무더기가 맥주를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유를 이야기한다. 여행의 자유로움이 물씬 풍겨나온다.

나도 덕분에 더불어 여행의 자유를 맛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