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0.화.
17;56
드디어 세석대피소!!!
기진맥진!
기가 모두 빠지고 맥이 또 모두 빠진상태?
기진맥진의 사전적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싶었다.
세석대피소의 지붕이 보이고부터는 거의 기다시피하였다.
엉금엉금
질.질.끌.끌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하면서 세석대피소 사무실 앞에 섰다.
기진맥진나;‘나로 말할거같으면 ...그유명한 기부회의 누구누구이며 인터넷으로 오늘숙소 예약을 하여따따다...’라고 하고싶었지만...그렇게하지않고 '인터넷으로 예약한 누구요!'하여따.
대피소직원;????
대피소 직원은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고만 있었다.
내말이 혀에 꽁꽁얼어붙었는지 아니면 입술에 찰싹 달라붙었는지
그놈의 말이 생각같이 떨어져 나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입안이 바짝 바트고 말이 헛갈리는듯하였다.
다시, 간신히, 천천히 또박또박 한마디씩 끊어서 하니 의사전달이 되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내 얼굴이 지금 하얗다?’
대피소직원 그;(씩 웃으면서) 하얗지는 않은데요...아버님,저녁식사는 충분히 하시고 푹 쉬셔야겠네요!
나;탈진?
그;탈진은 아닌데요.. 거의 탈진임돠!
저녁식사를 충분히 하라는 그의 말이 맴돌았다.
‘고행’규칙과 모범생!!!
어찌할 것인가? 지켜야하는가? 아니면...깰것인가??
에라이썅 ‘고행’이고 나발이고...오늘 저녁식사는 충분히 해야한다고 하잖여시방!
굳어진 떡몇쪼가리, 아몬드땅콩몇개 그리고 육포쵸코랫하나로 때우려고했던 저녁식사계획을 무참히 바꿨다.
먹고보자!
우선 살고보자!
'파계'하기로 하였다.
대피소에서 햇반과 라면을 샀다. 감히 과감히...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코펠과 버너를 집에다 놔두고 오지않앗는가? '고행'한다고....
나;사무실에 남아있는 코펠과 버너 없수?
그;(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허허허허...대피소 역사상 이런일은 처음이네요...그런데 가스는 있어유?
나;가스통도 좀...
그;......(나원참참참...별일이 다있네...하였을 것이다) 나는 사무실에서 쓰는 코펠과 버너가스통을 받아서 불이야불이야 벌써부터 침넘어가는 얼큰한 라면밥을 지으러 취사터로 달려갔다.
또 새로운 문제가 나왔다.
햇반은 설익은 것이니 라면끓일때 한꺼번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라면을 끓이고나서 햇반을 넣으면 바로 라면밥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하면 햇반밥알이 울퉁불퉁하여 모래알씹듯해야한다는 것.
라면만 끓인다면 물의 양이 얼마정도일지 그정도는 내가 아는 문제지만 햇반을 넣어야한다니..그런 문제는 풀어보지못한 것.
전혀 예상을 벗어나는 어려운 문제앞에서 난감해졌다.
옆자리 누군가에게 물었다.
'라면끓일때보다 조금 더...'
다음 문제는 더 어려웠다.
버너를 켜야하는데 아무리 이것저것 만져보아도 어찌해야 버너가 켜지는지 알수가 없었다.
나는 우리집마님께서 알아주는 천하의 기계맹!
지리산세석대피소에서 또 그 명성을 날리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라면물붓듯이 아무렇게나 버너를 돌렸다가는 가스폭발위험이 있지않은가?
대충 용감할 문제가 아니었다.
나;모시모시.. 여보세용... 옆에 있는 잘생긴 아자씨, 에쓰오에스, 핼프미플리즈!
그아자씨;엉? 제옆자리 앉았던 그 분...그... 교수님 아닌교?
나;어 그렇네요..제 옆자리 앉으셨던...
구례버스터미널에서 성삼재행 버스의 바로 내 옆자리 대구산꾼마니아 아자씨였다.
지리산종주가 처음인 나는 조금 불안하였다.
그는 복장에서부터 배낭까지 전문산꾼냄새가 물씬 풍겼다.
그래서 그때 나는 초면인데도 염치불구하고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에 대하여 심문을 했다.
그는 초보의 잔걱정이 이해되었던지 잘 대답해주었다.
우린 성삼재에서 말없이 빠이빠이한 터...
이곳 세석대피소에서 만날 줄이야...세상에는 나쁜짓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왠 교수? 내가 교수연기를 했었나?
내 말투가? 천연의 내모습이 천상 교수같다?
나;(속으로..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서는...40년전 아니 까까머리 고교시절 내꿈자리를 어찌 그리 잘 보았을까? 그땐 교수는 뭔지 잘몰랐고 선생님되고자하였는데.....)
대구아자씨;(아예 본격적으로 나온다)교수님께서는 집에서 라면도 끓여잡수지 않나요? 아까는 라면물 얼마나 붓는지 물어보시더니...이번에는 버너켜는 것을 물어보시네요...
나;네? 네...그게..기계 만지는 것이 서툴러서요...
그;(이리저리 만지더니...)아...버너가 좀 구형이고... 또 오래되기도 해서...잘 쪼여지지 않네요...자 이제 됐네요...
그렇게 쉽게 조작되는 것을 나는 왜 그리 엉기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쉬운 조작을 나는 왜 하지 못할까? 미리 못하는 것으로 단정해버리기때문이 아닐까?
(교수? 내가 ‘교수’가 아니고 사업으로 빠진 이야기하면 길다...어디 운명이 그렇게 몇자로 간단히 말할 수 있남...다음에 또 하기로 하자...라면을 빨리 끓여서 빨리 어서 먹어야하니까...)
버너에 불도 들어왔고 라면도 넣고 햇반도 넣고...
대구아자씨 또 끼어든다 ‘이 김치도 좀 너시소!’
라면을 막 끓이는 데 김치를 넣으라고 하니 괜찮을까싶었지만 불감청고소원이었다.
김치가 없는 라면은 그 맛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날 것이므로 이게 왠 횡재냐싶었다.
라면이 잘 끓었는지 코펠뚜껑을 들었다놓았다를 몇 번을 했나?
아, 이 고소한 냄새!
그런데,...
아, 이 고약한 모양새?
내가 보아왔던 라면의 모양은 어디에도 보이지않고 대신에 어정쩡한 죽...그렇지 일컬어 ‘풋대죽’!
좀 심하게 말하면 바로 꿀꿀이죽이었다.
그래도 때가 어느 때인가?
이것저것 찬밥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후다닥 건더기를 걷어올려서 후후후 급하게 입안으로 불어넣었다.
어서 어서 뱃속에 집어넣어야했다.
꿀꿀이죽처럼 요상한 모습이어도 맛은 꿀맛이었다.
‘못생겨도 맛은 좋아!’
난리부르스를 치던 뱃속이 이제 조용하였다.
몇끼만인가?
오랜만에 김치라면밥을 푸짐하게 채웠으니 이제는 든든하였다.
'고행'규칙을 어겨 '파계'한 몸이지만 그래도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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