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출장여행기

베트남에서(2)---상전벽해

햄릿.데미안.조르바 2003. 9. 29. 12:36
어찌할까. 방에서 죽치며 잠을 자? 지난번처럼 걸어서 시내구경을 해버려? 땡볕에 살을 구우면서?
그래, 더위 속을 걸어보자. 10여 년 전 옛날을 더듬어 가보자. 그 유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상담약속을 오후로 밀어낸 손님 덕분에 예정에 없던 시내 구경할 시간이 생겼다. 호텔 방에서 딩굴딩굴 하다가 잠을 자는 것보다는 덥지만 움직이면서 무언가 하나라도 눈에 넣어두자.

‘서늘한 까만 눈의 베트남 아가씨를 만나 사이공 강가를 거닐 것 같은 분위기. 기대된다. 그러나, 그랬다 한들 가슴에 묻어놓고 안 쓰겠지?’
명칼이 벌써 칼을 휘둘러대니 어찌할 것인가.
안 쓰면 내숭이라 할 것, 사이공 강변은 나중에 쓰고, 시내 구경을 하면서 옛날 이야기를 해야 여자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호텔의 프론트 도어를 휙 하고 밀어버렸다. 내 몸은 이제 완전히 호텔을 나와 호치민 거리에 속해 있었다. 카페트처럼 약간은 눅눅하고 에어컨 공기처럼 조금 답답하기도 했던 나의 기분을 프론트 도어 깊숙히 처박아 버렸다. 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느껴보자, 열대꽃향기 같은 호치민 거리의 냄새, 앗 그리고 이것은,,,,,,,,,,,,,,,,’
영희는 계속 강펀치를 날리며 나를 재촉하였다.

나는 정말 호텔의 도어를 확 밀고 나왔다. 나의 답답함을 침대 속 저 깊이 묻어버렸다. 옛날 10여 년 전 일들이 가득 묻혀있을 호치민의 거리를 어서 만나보자.

르네이샹스 호텔-랙스 호텔-시청 앞-성당-공원-콘티넨탈호텔-동코이 거리-서울식당-호텔.
2시간 여 걸릴까.

도로는 여전히 메뚜기 떼들로 점령되어 힘있게 한 방향으로 달린다. 서울의 자동차/오토바이 숫자와 호치민의 오토바이/자동차 숫자는 거의 같다고 보면 될 것이다.
버스는 눈에 띄지 않고 자동차가 오토바이의 눈치를 보며 느리게 달린다.

호치민의 오토바이는 도로와 거리를 점령한 실력자이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복면을 하고 손과 팔뚝에 긴 장화 같은 싸개를 한 젊은 여인들.
모자까지 깊숙이 눌러쓴 그들 앞에 무서움이나 두려움은 없다.
태양이여 길을 비켜라. 햇볕을 쳐부수자.
자유는 우리의 것, 젊음은 물론 우리의 것. 태양은 물러가라.

랙스호텔 앞의 쉼터 벤치에 잠깐 앉아서 옛날을 반추해 본다.
햇볕이 자리를 피해주고 땀이 달아나고 더위가 잠시 숨을 죽이는 사이 옛일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桑田碧海.
어린 거지 떼들은 없고 대신 젊거나 중년의 오토바이 호객꾼들이 끈질기다.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마사지? 차이나타운? 워 뮤지엄? 사이공 리버?
쉴 사이 없이 떠들며 따라온다.
더위와 함께 거리를 걸어가면서 시청 앞 성당 앞 그리고 공원.
옛날은 컸었는데 오늘은 작다. 내가 커졌는가.
10여 년 전, 정확히 13년 전 그 날은 제법 넓었고 나무가 울창하게 서있던 크고 조용한 공원이었다.

그 때는 젊은 여인이 순진한 외국청년의 혼을 빼내면서 손목시계를 나도 모르게 나꿔채 갔다.
오늘은 중년여인이 복권을 들고 와 행운을 사라고 할 뿐 혼을 빼지는 않는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삶의 밑바닥에서는 무슨 일이든 부끄럼 없이 자유롭고, 삶의 윗 바닥에서는 어떤 일만 한정하여 자유로운가. 먹고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가치란 없다는 것인가.
10여 년의 시간차가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바꾸어 주었는가.

흘러가는 강물에 발을 담그면 발을 스치는 물은 절대로 똑같은 그 물이 아니다 하잖은가.
그런데 어린 거지 떼들은 지금 오토바이 호객꾼이 되었나, 젊은 여인은 중년의 복권파는 여인이 되었느냐. 시간의 흐름은 인간을 바꾸었나.

역사에 가정법이란 없다. 역사에 가정법이 성립하고 인생에도 가정법이 있다면 재미있을까. 나는 정말 재미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 내 손목시계를 가져간 여인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지금 다시 이곳에 다시 와서 그때를 추억하는데 그녀는 복권 파는 딸을 두었을까.

그 수많은 어린 거지 떼들은, 손을 내밀며 돈 달라 돈 달라 하면서 밀치고 넘어지는 사이 순식간에 주머니를 털어 갔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건장한 청년이 되어 지금 오토바이 호객꾼이 되었는가. 최소한 지금 호치민 거리에는 어린 거지 떼들은 보이지 않는다.

10여 년이 지난 호치민은 말 그대로 '뽕밭이 푸른 바다가 된 것처럼‘ 많이도 변해 있었다.
텅 비었던 도로는 오토바이의 물결로 채워져 그 동안 시간이 많이 지났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2시간 여의 거리 여행.
오늘 호치민의 땡볕은 나의 얼굴에 또 하나의 추억거리를 새겼다. ‘바알갛게 익어버린 얼굴'
햇볕 차단제를 가져가라던 마누라의 말씀을 귀찮아하며 차갑게 거부했거든요.

‘여러부-우운, 마누라 말씀 잘 들으세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