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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어 좋은 날....점심시간의 막 커피 한 잔

햄릿.데미안.조르바 2019. 7. 30.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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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제는 비가 왔고, 오늘은 바람이 오고, 내일은 행복이 올 것인가?

    비가 오면 혹 마음 속 찌꺼기를 내다 버릴 수 있을지, 바람이 오면 혹 닫힌 마음이 열릴까, 철모르는 소년처럼 들떠서 왔다갔다 한다.

    비가 오면 난 그냥 좋다. 어제같이 늦가을, 어둑어둑할 때 살짝 바람과 함께 내리는 비를 난 어찌할 수 없다. 마냥 만나고 마냥 떠들고 싶어진다. 어제 같은 늦가을 늦은 비는 더욱 말릴 수 없다.

    오늘은 바람이 바람같이 온다. 오늘 바람이 왜 이리 거센가. 사무실 창들이 심하게 떠들어댄다.

    긴급하게 중요한 해외 전화도 올지 모르니 점심 게으름을 피워볼까, 그래 귀찮으니 사무실에서 간단히 때우지, 하다가 바람소리가 날 사무실 밖으로 내쫓는다.

    조금 걸어서 바람도 맞으면서 조금 멀리 가서 점심을 하면 어떨까, 더 좋을 것이다.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그러나 많이 멀지는 않은 곳, 가락시장을 지켜보는 곳에 아주 빈약한 공원이 하나 있다. 일컬어 '비석거리 공원’

    옛날 관리들의 선정비 내지는 송덕비가 모여 있는데 이곳 도시인들의 휴식처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곳.

    여름 한 철에는 노숙자들이 점령하여 낮잠 자는 자리이기도 하고, 나처럼 사무실 근무자들은 점심후 ‘막커피’ 한잔을 들고 잠깐 긴장을 늦추는, 휴게실이 되기도 하는 곳.

    가끔 난 터덕터덕 걸어서, 제법 먼 곳까지 가서 점심을 하곤 한다.

    사무실 가까운 곳에서 간단하게 빨리 해버릇하지만 가끔은 어쩐지 일탈하고프기고 하고, 정신건강상 육체건강상 부러 멀리멀리 걸어가서 점심을 하면 더 좋을 것 같아 가끔 그렇게 해왔다.

    이 때 가는 단골집은 비빔밥을 잘하는 수더분한 광주집 아줌마거나, 팥칼국수를 감칠맛나게 하는 역시 전라도집 할머니집이거나, 더 멀리 가면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청국장집이거나 이다.

    오늘은 특히 바람이 제법 원래의 바람이고자 보여주고 싶어하고 있으니 그 바람도 인정해줄 겸 가끔 멀리하는 그 점심을 하기로 했다.
    오늘은 비빔밥 집.

    오랜만에 비빔밥 아저씨가 왔네 하는 눈치다. 여종업원들이 벌써 알아차리고 비빔밥을 갖다준다.

    뉴스를 들으면서 신문 둘을 훑어나가면, 광주 토박이 고추장에 된장국을 곁들이며 비벼먹는 점심은 끝이 난다. 그러면 말하지 않아도 거의 자동으로 내가 좋아하여 기다리는 ‘막커피’가 턱 내 앞에 놓인다.

    난 물을 조금 넣어 찐한 맛을 순하게 하여 막커피를 들고 비석거리공원으로 간다.

    바람이 여간 아니다. 바람 노릇을 톡톡히 하려든다. 나를 멈추게 할 수도 있다는 듯 힘으로 밀어붙이기도 하고, 공원 위 낙엽들을 들었다 놓았다 공중으로 쏘아 올리기도 한다. 회오리 놀음을 하면서 주인의 몸을 떠난 나뭇잎들을 더 쓸쓸하게 흔들어댄다.

    오늘 유난히 노란 은행잎들이 처량해 보인다. 봄날 나비들이 떼지어 날아다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시절이 겨울을 앞두고 있으니 그들이 춥고 외로워 보인다.

    공원 위 벤치는 오늘 아무도 없다. 그 흔하던 노숙자들도 보이지 않고, 송덕비들만이 바람 같은 바람과 맞서고 있다. 낙엽들은 바람에 몰려 이리저리 휘둘리며 갈 곳을 찾아 떠돌아다닌다. 나뭇잎들이 눈발처럼 날리다가 어느 한쪽에 쌓인다.

    난 벤치 위에서 막커피를 쓰다듬으며 얼마 전 한여름을 되새긴다. 벤치 위에 노숙자들이 잠을 자고 있었는데, 더위를 피해 그늘진 곳에서 ‘막커피’를 마시면서 오늘 오후는 무엇을 할까 얼마나 더울까 잠시 생각을 고치기도 하였는데, 오늘은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또 점심시간을 마무리하고 있다. 나의 막커피가 끝이 나고 있다.

    이제 가을이 다 가고 또 새로운 겨울이 올 것이다. 새로운 해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어제 비가 오고 오늘 바람이 왔으니 내일은 행복이 올 것이다. 새로운 날이 새롭게 올 것이다. ⓒ 2007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