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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역 오파상의 창업 7 주년 '자축' 기념사
햄릿.데미안.조르바
2019. 7. 30. 16:40
광복절
우리 모두들에게는 '다시 빛을 본 날'이다.
그동안 어둠속에서 빛을 보지 못하였는데
드디어 그 날 빛을 보게 된 것이라는 뜻
얼마나 감격적이었을까
8월 1일.
창립기념일,
오늘이 창립 7 주년,
그 날은 내게 '광복'은 아니었지만
'자유를 찾아서' 숨막히던 우리를 뛰쳐나온 날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감격은커녕 불안함 반, 두려움 반으로
살얼음 위를 걷기 시작한 날이었다.
뒤돌아보면 아득하다.
다시 돌아가서 새로이 다시 시작하라고 하면 감히 할 수 있을까.
지나온 길이 까마득하고 아찔하게 보인다.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결국은 포기할 것이다.
지나온 길의 험난함과 위험함을 너무나 잘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 그 상황이라면, 내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나로 말한다면 당연한 결정이었고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모두들
'바보짓' 하지 마라.
'미친짓'을 왜 하려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현실을 무시한 이상적인 꿈' 일 뿐,
제발 냉수먹고 속 차리라고 해댔다.
누가 말릴 것인가, '꼴통'이며 '독불장군'을.
나는 '옥떨메'를 들어서 저항하며 대항하였다.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같이 못생겼지만 '된장'은 누가 만들며,
옥상에서 몸에 기름을 붓고 '자유'를 외치며 산화하는 젊은이가 '몸값'을 따졌더냐.
좋게는 걱정스러움을 바탕으로 안타까워들 하였으며,
좋지 않게는 '그래, 한번 잘 해봐라' 하며, 비웃음과 고소함이 함께 배어있기도 하였다.
많지는 않았지만,
'잘 생각했어요. 까짓껏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용기가 대단해요, 존경해요.' 하는 얼치기도 있었다.
진정으로 마음속에서 격려하고 축하해주던 사람들도 조금은 있었다.
'자유를 찾아서'
그 때 나의 화두였다.
안정된 지위와 생활이 보장되었지만, 나만의 '그 자유'는 없었다.
이제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고팠고 마음이 아팠다.
내 스스로 자유롭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늘의 시각이 아닌, 10 년 후 20 년 후의 나를 위치시켰을 때,
결론은 '나의 생각'을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의 자유를 위하여'서는.
오늘의 편안함이
결코 앞으로의, 먼 훗날의 '자유'와 '행복'을 담보해주지 못한다는 것.
불안하고 험난하고 위험해 보여도
더 늦기 전에 도전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분식집 좋지 않아?'
돌팔이지만 식돌이 출신 아닌가.
'국.영.수 학원강사가 어때서? 좀 나이가 많지만....'
다른 건 몰라도 가르치는 건 차별이 없고, 등록금 마련하던 왕년에는 명강사였잖아.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서,
세끼야 담보될 것으로 믿고서,
그냥 저질렀었다.
선택은 외롭고 쓸쓸했으며 겁나는 것이었다.
아무도 새로운 나에 대하여 옛날과 같이 평가해 주지 않았다.
시장은 냉정하였으며 찬바람은 곳곳에서 불어왔다.
은행의 창구직원은 얼마 전 '대단하셨던 나'는 평범한 張三李四로 간단히 만들어 버렸다.
순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리쳤다, 나를 우습게 보는 거 아니냐고.
그러나,
그것은 괜한 자격지심이었고,
되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현실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나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였고,
두려워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신이 났던가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지 모르게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그리고 어느새 또 1 년이 훌쩍 지나갔다.
달리다가 넘어지는 것조차 재미있고 즐거웠다.
진흙탕을 밟기도 하였으며
길을 잘못 들어 외길에 맞닥뜨리기도 하였다.
그래도 견뎌내고 참아내고 받아내고 만들어 내었다.
이윽고 간신히 자그마한 집 한 채를 만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아이엠에프가 오셨다.
그는 내게 면죄부를 주셨고 또 축복까지 주셨다.
그는 나의 생각, 원칙론이 옳았음을 확인해 주셨으며,
옛 부하 동료들에게 지워졌던 나의 정신적 부채까지도 일거에 말끔히 해결해 주셨다.
그리고, 행운의 열쇠까지 주고 가셨다.
행운의 열쇠는 내게 좀 더 큰집을 마련하게 해주었다.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게 넓지도 않지만,
나의 자유는 이 집에서 지금도 숨쉬고 있다.
더 크고 강하게 만들고도 싶었지만,
그러면 나의 자유는 그곳에 있지 않을 것.
욕심을 내지 않기로 하였다.
욕심을 더 내볼까 지금도 가끔 마음속에서 충돌하지만
곧 욕심을 버리는 것으로 내 욕심을 채우는 것에 나는 익숙해 있다.
'비우기와 채우기'
어느덧 7년.
강하고 큰놈하고 어떻게 싸울 것인가.
정답은 '작지만 강한 놈' 이 되어야 한다.
'스몰 벝 스트롱' 은 살아남고,
'스몰 엔드 위크' 는 반드시, 곧 죽는다.
먼저 '작은 2 집'을 짓고서 살아남아 그리고 맞부딪칠 것.
그렇지 않으면 나의 자유는 더 이상 없다.
나는 곧 죽는다.
나의 원칙과 상식이 살아남는 길은,
남보다 많이 아는 것.
먼저 덤비지 않는 것.
그리고, 바닥을 만들어 놓고, 나가서 싸울 때만이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그렇게 해야 '나의 자유'는 존재한다.
3 년을 더 채우고 나서,
또 얼마를 더 할 것인지 물어볼 것이다.
다시 또 시작하는 마음으로 3 년을 시작하자.
새롭게 넓히지는 말고,
있는 것을 가꾸면서
'느리게' 시작하자.
자유는 더 찾아 나서고
공부하는 시간을 더 만들어내자.
자연스럽게 자연에 따라 자연에 맞추어
자연과 함께, 더 느리게 살아가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3 년 후,
다시 이 자리에 서서
다시 말할 것이다.
'자유를 찾아서'
ⓒ 2007 OhmyNews
우리 모두들에게는 '다시 빛을 본 날'이다.
그동안 어둠속에서 빛을 보지 못하였는데
드디어 그 날 빛을 보게 된 것이라는 뜻
얼마나 감격적이었을까
8월 1일.
창립기념일,
오늘이 창립 7 주년,
그 날은 내게 '광복'은 아니었지만
'자유를 찾아서' 숨막히던 우리를 뛰쳐나온 날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감격은커녕 불안함 반, 두려움 반으로
살얼음 위를 걷기 시작한 날이었다.
뒤돌아보면 아득하다.
다시 돌아가서 새로이 다시 시작하라고 하면 감히 할 수 있을까.
지나온 길이 까마득하고 아찔하게 보인다.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결국은 포기할 것이다.
지나온 길의 험난함과 위험함을 너무나 잘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 그 상황이라면, 내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나로 말한다면 당연한 결정이었고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모두들
'바보짓' 하지 마라.
'미친짓'을 왜 하려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현실을 무시한 이상적인 꿈' 일 뿐,
제발 냉수먹고 속 차리라고 해댔다.
누가 말릴 것인가, '꼴통'이며 '독불장군'을.
나는 '옥떨메'를 들어서 저항하며 대항하였다.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같이 못생겼지만 '된장'은 누가 만들며,
옥상에서 몸에 기름을 붓고 '자유'를 외치며 산화하는 젊은이가 '몸값'을 따졌더냐.
좋게는 걱정스러움을 바탕으로 안타까워들 하였으며,
좋지 않게는 '그래, 한번 잘 해봐라' 하며, 비웃음과 고소함이 함께 배어있기도 하였다.
많지는 않았지만,
'잘 생각했어요. 까짓껏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용기가 대단해요, 존경해요.' 하는 얼치기도 있었다.
진정으로 마음속에서 격려하고 축하해주던 사람들도 조금은 있었다.
'자유를 찾아서'
그 때 나의 화두였다.
안정된 지위와 생활이 보장되었지만, 나만의 '그 자유'는 없었다.
이제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고팠고 마음이 아팠다.
내 스스로 자유롭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늘의 시각이 아닌, 10 년 후 20 년 후의 나를 위치시켰을 때,
결론은 '나의 생각'을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의 자유를 위하여'서는.
오늘의 편안함이
결코 앞으로의, 먼 훗날의 '자유'와 '행복'을 담보해주지 못한다는 것.
불안하고 험난하고 위험해 보여도
더 늦기 전에 도전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분식집 좋지 않아?'
돌팔이지만 식돌이 출신 아닌가.
'국.영.수 학원강사가 어때서? 좀 나이가 많지만....'
다른 건 몰라도 가르치는 건 차별이 없고, 등록금 마련하던 왕년에는 명강사였잖아.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서,
세끼야 담보될 것으로 믿고서,
그냥 저질렀었다.
선택은 외롭고 쓸쓸했으며 겁나는 것이었다.
아무도 새로운 나에 대하여 옛날과 같이 평가해 주지 않았다.
시장은 냉정하였으며 찬바람은 곳곳에서 불어왔다.
은행의 창구직원은 얼마 전 '대단하셨던 나'는 평범한 張三李四로 간단히 만들어 버렸다.
순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리쳤다, 나를 우습게 보는 거 아니냐고.
그러나,
그것은 괜한 자격지심이었고,
되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현실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나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였고,
두려워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신이 났던가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지 모르게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그리고 어느새 또 1 년이 훌쩍 지나갔다.
달리다가 넘어지는 것조차 재미있고 즐거웠다.
진흙탕을 밟기도 하였으며
길을 잘못 들어 외길에 맞닥뜨리기도 하였다.
그래도 견뎌내고 참아내고 받아내고 만들어 내었다.
이윽고 간신히 자그마한 집 한 채를 만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아이엠에프가 오셨다.
그는 내게 면죄부를 주셨고 또 축복까지 주셨다.
그는 나의 생각, 원칙론이 옳았음을 확인해 주셨으며,
옛 부하 동료들에게 지워졌던 나의 정신적 부채까지도 일거에 말끔히 해결해 주셨다.
그리고, 행운의 열쇠까지 주고 가셨다.
행운의 열쇠는 내게 좀 더 큰집을 마련하게 해주었다.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게 넓지도 않지만,
나의 자유는 이 집에서 지금도 숨쉬고 있다.
더 크고 강하게 만들고도 싶었지만,
그러면 나의 자유는 그곳에 있지 않을 것.
욕심을 내지 않기로 하였다.
욕심을 더 내볼까 지금도 가끔 마음속에서 충돌하지만
곧 욕심을 버리는 것으로 내 욕심을 채우는 것에 나는 익숙해 있다.
'비우기와 채우기'
어느덧 7년.
강하고 큰놈하고 어떻게 싸울 것인가.
정답은 '작지만 강한 놈' 이 되어야 한다.
'스몰 벝 스트롱' 은 살아남고,
'스몰 엔드 위크' 는 반드시, 곧 죽는다.
먼저 '작은 2 집'을 짓고서 살아남아 그리고 맞부딪칠 것.
그렇지 않으면 나의 자유는 더 이상 없다.
나는 곧 죽는다.
나의 원칙과 상식이 살아남는 길은,
남보다 많이 아는 것.
먼저 덤비지 않는 것.
그리고, 바닥을 만들어 놓고, 나가서 싸울 때만이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그렇게 해야 '나의 자유'는 존재한다.
3 년을 더 채우고 나서,
또 얼마를 더 할 것인지 물어볼 것이다.
다시 또 시작하는 마음으로 3 년을 시작하자.
새롭게 넓히지는 말고,
있는 것을 가꾸면서
'느리게' 시작하자.
자유는 더 찾아 나서고
공부하는 시간을 더 만들어내자.
자연스럽게 자연에 따라 자연에 맞추어
자연과 함께, 더 느리게 살아가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3 년 후,
다시 이 자리에 서서
다시 말할 것이다.
'자유를 찾아서'
ⓒ 2007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