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글쓰기(모음)

'숲 속의 한증막을 아시나요?'

햄릿.데미안.조르바 2019. 7. 30. 16:36

사는이야기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제 다시 청계산을 찾았다.
무척 더운 날씨였다.
비가 온 뒷날인데도 쪘다.

15년 전만큼 더울까.
그 때 서울은 거대한 한증막이었다.
그날은 마음도 덥고 날씨도 더웠다.

하나로 마트에 가는 집사람의 차를 빌려, 청계산 입구에 쉽게 왔다.
집사람에게는 큰아들이 하늘. 내일 생일파티에 친구들을 초대했다는 녀석의 명령같은 부탁에 어쩔줄을 모른다.

덕분에, 바쁘게 시장보는 집사람을 청계산 입구까지 연장운행 시켰다. 두 남자가 한 여자를 괴롭히고도 모른다.

무엇을 해야 할까, 얼마나 해야 하나, 지난 밤 집사람은 내내 끙끙댔다. 녀석이 나오던 15년 전은 끔찍히도 더웠다. 그리고, 지독히도 가난한 신입사원이었다.

청계산 입구.10시 50분.

굴다리를 지나니 채소 파는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눈에 밟힌다. 옛 대인동 시장 골목이, 옛 계림동 자취방 앞 구멍가게 채소가, 옛 시골 마당의 텃밭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오늘은 어느 길을 만날까. 첫 좌회전길--헬기장--매봉--혈읍재--망경대--이수봉--옛골. 새로운 조합, 3 시간을 4 시간 산행으로. 청계산도 조합에 따라 얼마든지 '길게' 호흡할 수 있을 것.

어제 비가 와서인지 나무들이 씩씩하다.
나뭇잎들이 제 철을 만난듯 한껏 푸르고 힘차다.
샤워를 끝낸 여인들의 몸매를 지금 여기에 끌어다대는 건 야릇하고 맞지 않은가.

자연은, 숲속은 오랜만에 생기를 찾아 팔딱거리고 있다.
바람은 한점 없고 땀은 샘솟듯 한다.
어제 비가 왔다는 것과 오늘 시원해야 하는 것하고는 아무 상관없음을 강변하는가.

바람이 없으니 산속은 천연 한증탕이 된다.
도시의 한증탕하고는 땀내는 속도가 다르다.

패스트 푸드와 자연식품의 차이.
'빨리' 와 '느리게'
인간의 가공과 자연 그대로.

인간은 자연의 일부, 당연히 자연의 속성을 따라야 하거늘,
약삭빠른 인간은 참지 못하고 빠른 것을 좋아한다.
비가 온 뒷날, 자연한증막을 찾으시라. 숲속은 자연이 만들어준 한증막.
도시의 한증막하고 어디 건강을 비교할 것인가.

반신욕을 아는가.
느리게 천천히 땀을 빼면 인간의 몸이 자연같이 닮아가는 것이리라.
자연 한증막을 도시에 최대한 끌어들인 그나마 인간의 지혜일 것.

헉헉대며 헬기장,
집에서 가져온 얼음물통이 아직 꽁꽁.
털고 털어 간신히 목젖을 적신다.

매봉 582.5 미터, 12시 10분경.

오늘은 도시의 문명이 없다.
막걸리도, 아이스케키도 없다.
그냥 靑馬의 '행복'만 바위돌 위에서 웃는다.

'내 가진거 없건마는/ 머리위 푸른하늘 우러렀으매/항시 내마음 행복되노라'

올 때마다 읽어 보고, 또 정리해 두지만,
간결하게 행복을 옮겨 놓은 유치환님이 좋다.

혈읍재에서 잠시 갈등한다.
산행을 늦게 시작했으므로 망경대--이수봉--옛골을 가는 것보다,
혈읍재--옛골로 바로 떨어지는 것이 점심 시간상 적절.
그러나, 시작할 때 새로운 조합을 만나기로 한 것을 뒤집기가 쑥스럽다.

만경대 가는 길은 예상 밖,
왕 가파름에 바위 타기 그리고 미끄럼 각별히 조심 구간.
618 미터 정상은 온 곳을 모두 보여준다.
서울대공원, 과천, 성남, 서울,
그래서 만경대(萬景臺)인 것을.
혹자는 여말선초의 조견이 개성에 있는 임금을 그려 망경대(望京臺)라 하나,
나는 만경대가 더 현실적이다.

이수봉으로 가는, 내려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엄살을 붙여 '준유격훈련', 꼭 면장갑을 가지고 가시라.

그리고, 살짝 한마디.
'네가 나한테 해준게 뭐 있어?'류의 궁지에 몰려있는 남자는 반드시 이 길을 택해 보시라. 부부의 금실이 좋아질 것이다.
총각이 처녀의 손목을 응큼하지 않게 잡고 싶어도, 필답 코스.
미끄러지지 않게 실밧줄들이 있을만큼 비탈진 곳이 많다.
나는 옛날 총각시절 이런 것을, 이런 곳을 왜 몰랐을까.

이수봉은 어수선하다.
이런저런 도시의 장사꾼이 산행객의 자연을 훔친다.
막걸리도 있고 아이스케키도 있다.
정상이 힘들어 핑게거리를 찾아 버티는 어린이를 나는 거기에 아이스케키가 있다고 웃어준다.
아이는 '뻥'이라고 하면서도 엄마손을 뿌리치지 못한다.

이수봉 가는 길, 어느 한적한 곳, 팔자 좋은 남정네가 누워서 부채를 붙이며 '정말 놀고 자빠져 있다'
자리를 깐 옆에는 색안경을 쓴 여인네가 안마를 하는지,
부부 같지는 않은데, 심심산골에 출장안마가 등장했는가.
부부인데 내게 잘못 보여졌겠지롱.

이수봉---목배등---어둔골---옛골.
혈읍재--옛골에 버금가는 길, 좋고 또 좋다.

그늘의 어두움과 구름속의 햇살이 만들어내는 어둔골의 '꿈빛'
어두운 거 같으면서도 밝고, 밝은 거 같은데 또 어두운, 대낮 속의 어두운 해맑은 빛.
나무들 사이로 들어오는 구름 속의 햇살과 나무들 그늘 속의 밝은 어두움, 그 빛.
그리고 건강한 물소리,

산행객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누구는 탁족을 하고, 누구는 모여서 점심을 하고, 원두막같은 쉼터는 이미 꿈속의 한가운데에 있다.
나도 그 곳 어디 한 자리를 탐한다.

탁족의 시원할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으, 시원 시원'
내친김에 양말을 배낭에 넣어버리고 맨발이 된다.

오후 2시 30분경.

조심조심 자연을 밟으며 하산길을 재촉하는데,
금방 아스팔트 길이 맨발을 막아선다.

땅바닥과 발바닥이 만나야 자연스러운 만남이 만들어지는 건데, 난데없는 자연의 암(癌), 아스팔트가 버티니 더 재간이 없다.
김이 팍 새버린 맨발은 얼른 가까운 식당으로 피해 버린다.

맥주 하나 그리고 멍탕 한그릇.
오늘은 시원한 맥주도 산행 후 맛보는 그 맛이 아니다.
멍탕도 맹맹하여 멍멍하다.
모두가 아스팔트의 암 때문일 겨.

오후 3시 30분경.

오늘 산행의 마지막은 아스팔트로 꽉 숨이 막혀 버렸다.
옛골의 굴다리 할머니 채소가게도 오늘은 나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하여, 마을버스 405번은 양재역까지 떠들어대는 엉터리 젊은 산행객 셋을 태웠다.
비교적 젊은층인 이들은 입을 다물지를 않았다.
옛골에서 하나로 마트까지 차들은 얼마나 막히는가.
그들은 꼬박 3-40분, 피곤한 산행객들에게 소음공해를 선물했다.
선진국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노부부는 그 시끄러움을 나무라는 듯, 가로수 은행나무가 연푸른 열매를 가졌는지 아닌지 줄곧 세고 계셨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마주 보고 있다고 해서일까,
열매가 달린 나무도 있고 없는 나무도 있는데,
그래서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밀리고 있었다.

양재역에 내리자 내가 좋아하는 비가 세차게 내렸다.
마지막에 비가 오지 않았다면 오늘 산행이 찝찝했을 것인데 그나마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