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유공 직원들의 ‘갑질’ 그리고 ‘농대 디스카운트’가 아닌 ‘농대 프래미엄’의 위엄.
/ 농유공 직원들의 ‘갑질’ 그리고 ‘농대 디스카운트’가 아닌 ‘농대 프래미엄’의 위엄.
우여곡절끝, 무사히 ‘선적전 품질검사’를 마치고나서도 이런저런 문제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선적전품질검사 확인서’발급을 둘러싼 농유공직원의 소위 ‘갑질’ 때문에 나는 한바탕 ‘소리’를 내질러야했다. 뚜렷한 이유없이 ‘합격서’발급을 미적미적거리는 농유공직원에게 나는 또 비상수단을 동원하였다.
그들이 잘아는, 그들의 생사여탈을 쥐고있는, 농유공 ‘고위임원’의 이름을 빌리지않을 수 없었고, 그는 더 이상 ‘지랄’을 하지않고 순순히 ‘합격서’를 발급해주었다.
(앞서도 소개한 바 있지만, 중국산참깨와 수단산참깨의 국제입찰분쟁이 생겼을 때, 그는 나에게 ‘중재’를 요청하였고, 그때 나는 동양그룹에 ‘중재’를 맡아야하니, 동양글로벌 임원자리를 더 이상 맡을 수 없다고 폭탄선언을 하고..‘중재’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바 있다고 소개하였다. 그때 그는 나에게 덤으로 중국산참깨 수의계약을 선물하였고, 수시로 나의 농유공입찰비즈니스를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고 있었다...
그는, 나의 서울대농대 10여년 선배였다.)
내가 하는 국제입찰비즈니스(참깨.타피오카.옥수수.팥.땅콩등)는 큰물량을 취급하기도 해서, 정부의 조직이나 대량실수요자 단체나 조합과 관련되어있었고, 그곳의 주요담당자들은 직.간접적으로 나의 대학선.후배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서울대농대파워가 대단하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연결되고 있어서, 비즈니스의 중요대목에서는 그들의 보이지않는 도움이 결정적 역할을 하곤하였다.
(그들은 ‘농대 디스카운트’를 굳이 말하지않아도 눈빛만으로도 통했다. 뭘 바라지도 않으면서 소리나지않게 도와주었다. 마치 자기일처럼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서울대의 다른 단과대학의 선후배관계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서울대출신들은 이기적이고 개인주의라하는데, ‘농대’는 전혀 그렇지않다.) 호남사람들이 서로 어려울 때 아무것도 바라지않으면서 도와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냉대받아본 사람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그들의 동료를 그냥 도와준다. ‘농대 디스카운트’가 ‘농대 프래미엄’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나의 농산물비즈니스에서 만큼은 ‘농대디스카운트’가 아닌 정반대로 ‘농대 프래미엄’이 적용되고 있었다...인생의 아이러니였다. 나는 살아가는 내내 ‘농대 디스카운트’로 속앓이를 해왔는데, 실제로 비즈니스에서는 ‘농대 프래미엄’을 받으면서 사업을 하였으니, ‘아이러니’아닌가.
(내가 만일 '농대'를 나오지않고 '상대'나 '법대'를 나왓다면, 나의 농산물비즈니스에서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결과는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르지만, '카인의 후예'처럼 '농대'출신이라는 '낙인'이 오히려 내가 하는 비즈니스세계에서는 '갑'으로 통해지고 있었다.
세상사 들쭉날쭉하니 때로는 불공평하더니 또 언제는 그것이 반대가 되니 바로 ‘공평’해진 것 아닐까?)
세상 일이란 것이@@@ 약자에는 강하고 강자에는 턱없이 약하기만한, 우리 사는 세상의 ‘약육강식’
비즈니스 하는 고비고비마다, 나는 가끔 ‘폭탄’을 쓰곤하였다. 뭐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무적으로 꼬박꼬박, 절대로 위에서 내리꽂는 행위는 하지않으면서, 업무를 처리하였지만 때로는 ‘폭력’을 써야하는 경우가 생겼다. 난 그때마다 ‘가끔’ 사용하였다. 티나지않게....
(국내비즈니스와는 다르게, 해외비즈니스의 경우는, ‘폭력’을 쓰지않아도 제대로 하면, 열심히 하면, 실수를 하지않으면, 만사 잘 풀렸다. 뒷돈을 주거나 좋은술을 대접하지않아도, 일은 일대로 풀렸다. 내가 장수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비합리.불합리가 가득한 국내비즈니스보다는, 합리가 통하고 논리가 우선되는 해외비즈니스를 주로 하였기때문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