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평원농상(주)에서(창업1996-현재)

나의 ‘둥지’는 어디에 있을까? 가락시장앞, 제일오피스텔 1506호(1001호~2호를 거쳐, 지금은 1418호)

햄릿.데미안.조르바 2019. 4. 26. 13:26

/나의 ‘둥지’는 어디에 있을까? 가락시장앞, 제일오피스텔 1506호(1001호~2호를 거쳐, 지금은 1418호)

‘동양글로벌’에서 나왔고, 이제는 내 스스로 나의 사업을 하기로 하였으니, 그러나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니, 우선적으로 당장 해야할 일은, 사무실을 내야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어디 사무실 얻을 ‘돈’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나는 편하게 누구의 ‘사무실’에 잠깐 얹혀 살았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어왔다.

나는 ‘동양글로벌’을 그만 두고난 바로 다음날로 여기저기 ‘사무실’을 찾아나섰다.

 

‘창업’은 말처럼 그저 아름답고 찬란한 것이 아니었다.

냉엄한 현실이 눈앞에 있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서 어떻게 생활을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하였다.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은 사무실을 구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무실 얻을 돈이 없으니 사무실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고맙게도 두 군데서 나에게 사무실을 써도 좋다고 연락이 왔다.

한곳은, 해운사업을 크게 하는 친구였는데, 내가 농산물벌크비즈니스하면서 ‘용선’상담을 몇 번한 바 있었다. 언제든지, 그의 회사 사무실을 ‘부담없이’ 사용하라는 것이었는데, 그의 부하직원들 보기가 민망하여, 나는 고맙다고만 인사하고 실제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해운사업을 크게 하고 있다. 부산과 하까다를 왕복하는 여객선을 운영하는, 우리 동기생들중 사업적으로 매우 성공하였다. 그는 고1때 나의 짝꿍이었는데, 시험때만 되면 코피를 흘려가면서까지 공부를 열심히 하였지만, 성적은 그다지 오르지 않았고, 나중에 급기야는 나의 시험답안지를 보여달라하면서 성적에 급급하였던 친구였다. 그러나 그는 훗날 재수 끝에 국비장학생으로 해양대학에 진학하였고, 철두철미한 업무추진력으로 러시아자본가들과 협력하여, 해운사업의 기반을 만들어 크게 성공하였다. 학교의 성적과 사회의 성적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학업성적이 좋지못하는 학생이 학교의 우등생보다 더 사회생활을 잘하는 ‘모범사례’가 되었다.)

 

또 한곳은, 해태상사 농산부장때, 인도네시아산 타피오카칩 수입때, FOB로 계약하고 Chartering 하여 주정협회 회원사들에게 공급하였는데, 그때 나를 도와주었던 일고후배였다.(인도네시아산 타피오카칩 FOB 계약 관련, 블로그글 참조)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반대로 그는 내가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항상 나에게 감사히 생각하는...그런 관계였는데, 그가 ‘아무런 걱정.부담없이 그의 사무실을 당분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덕수궁. 경향신문. 이화여고.러시아대사관이 가까이 있는 ‘정동회관’이었다.

큰규모의 회사여서 직원들의 눈치가 보이는, 친구 사무실보다는, 오히려 더 부담이 적을 것이라 판단하여, 나는 ‘정동회관’으로 출근하였다.

 

정동빌딩, 그의 사무실로 출근하였더니, 그는 그의 대표이사 자리, 사무실을 나에게 쓰라하고, 그는 다른 자리, 일반직원들과 같이 근무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점심을 그와 함께 하고나서는, 바로 그날 오후부터 ‘나의 둥지’를 찾아 나섰다.

도저히 그의 대표이사 자리를 꿰차고 ‘새 사업’을 꾸려나간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싶었다.

그는 한사코 말리고 ‘부담 하나없이’ 내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사용하라고 하였지만, 말만 받고 나는 더 이상 ‘정동빌딩’으로 출근하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돈’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해도, 후배의 사무실을 뺏어가면서 ‘새사업’을 펼칠 수는 없었다.

 

정동회관을 나온 후, 나는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나혼자 ‘창업준비’를 할 수 있는 곳이면 가리지않고 방문했다.(많은 사무실이 있고, 대표전화가 있고, 전화받아주는 대행여비서가 있는, 작은 사무실을 임대해주는 빌딩도 있었다.)

몇군데를 둘러보고나서는, 가락시장 앞의 오피스텔이 눈에 들어왔다.

농산물비즈니스를 해야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국내외 농산물의 소비자와 가까이 있어야 하는데, 그곳이 바로 ‘가락동 농산물 시장’ 아닌가.

그때 우리집이 분당이었는데, 집과도 가까우니 ‘금상첨화’격이었다.

마침, 빈방이 하나 남아있었다. 바로 임대계약을 체결하였다.

(사무실을 임대하려면, 일반적으로는 최소 1달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였는데, 운좋게도 빈사무실이 있어서 바로 입주할 수가 있었다...이것도 ‘운명’인가? 내가 생각했던 ‘농산물비즈니스환경’에 맞는 가락시장과 가까운 곳에, 자그마한 소형오피스텔이 있다니 그것도 바로 입주할 수 있는 빈사무실이 마침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에게 다가왔으니 이 얼마나 ‘운’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었을까?)

‘동양글로벌’를 떠난지 딱 7일만인가?

입주일 1996년 7월21일. 제일오피스텔 1506호(?), 20평형...보증금 5백만원+월40만원?.

내 책상 하나와 직원들 책상 몇 개 놓으면, 꽉 차는 조그만 사무실이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우리큰아들 생일날이었으니까.)

 

내 사업을 시작하고나서, 나의 첫 고민이 무엇인지 아는가?

20평형 오피스텔 벽지를 새로이 할 것인가 아니면 있는그대로 사용할 것인가였다.

(뭐 그깐 것 가지고 고민씩이나 하시느냐 하실지 모르겠으나, 나는 나의 호주머니 사정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동양그룹의 임원퇴직위로금은 전액 집사람에게 주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란 것이 법인설립 자본금 5천만원 정도였으니, 얼마되지 않은 도배비용도 ‘큰비용’축에 들어갔다는 것.)

 

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큰마음써서, 사무실 도배를 하기로 하였다.

‘밝은 색상’의 벽지를 골라서 정말 ‘큰마음’먹고 하였다.(30만원? 50만원?)

나는 그렇게 나의 첫고민을 ‘큰마음’써서, 단칼에 해결하였다.

=====더 자세한 것들은, 내블로그 ‘창업전후 일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