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글로벌(주)에서(1995-1996)

동양글로벌’에서 2; ‘새 집’을 짓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햄릿.데미안.조르바 2019. 2. 15. 14:11

/‘동양글로벌’에서 2; ‘새 집’을 짓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해태상사의 농산부를 ‘멋지게 다시 만들었던 것’은 과거의 주춧돌이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그 위에 건물을 새롭게 단장하고 살림살이들을 하나하나 채워나갔던 것이었다면, ‘동양글로벌’에서는, 내가 주춧돌부터 새로이 만들고=집터를 새로이 다지고, 건물도 올리고 살림살이 하나하나까지 모두 내 손으로 장만해야 하는 일이었다.

몇 십배 정도 힘이 더들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 거대한 일을 내가 하겠다고 약속하였으니, 누구에게 말도 하지못하고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 되었다...내가 왜 이 지난한 일을 하겠다고 하였을까? 내가 왜, 나의 입속으로 들어온 ‘본부장’을 내뱉고서는, 이 독배를 들겠다고 하였을까? 후회되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열심히 하는 길 밖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경력사원 채용광고를 냈으니, 동종업계의 경험있는 경력사원을 채용하고, 또 한편으로는 신입사원을 뽑아서, 해태상사에서 했던 것처럼 ‘훈련’을 시켜나가면, 곧 ‘좋은 조직’을 만들 수 있을 것,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얼마나 경쟁력있는 해외공급선들을 확보할 수 있느냐였다.

다행히도, 홍콩의 Wide Source의 Mr.Wong은 종이회사, E&S를 다시 ‘동양글로벌’의 해외공급자로 등록시켜 주었다.(맨처음 해태상사의 농산부를 재건할 때, 편법으로 활용했던그 E&S 였다. Wide Source는 이미 해태상사의 해외공급자로 공식적으로 등록되어 있으므로, ‘동양글로벌’의 해외공급자가 될 수 없었다. Wide Source 입장에서는, 신설 종합상사인 ‘동양글로벌’보다는 아직 해태상사의 네임벨류가 훨씬 높으니 당연히 해태상사가 그의 공식적 한국시장 에이전트였다. 개인 ‘Mr.Park'보다는 ’해태상사‘라는 거대조직이 우선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곧 농.유.공과 한국사료협회등에 E&S를 동양글로벌의 해외공급자로 입찰등록시켰다.

 

태국의 Chaiyong Grouup과 인도네시아의 Dharmala group 도, 공식적으로 ‘동양글로벌’을 한국의 에이전트로 지정해주었다.(Chaiyong 과 Dharmala는, Wide Source와는 입장이 달랐다. 개인 Mr.Park이 해태상사보다 더 우선하였다....)

 

참깨 해외공급자의 다른 하나인 Huyton은 아직 의사표시를 하지 않고 있었다. 수단참깨가 아직 한국시장에 본격적으로 재도입하기 전이었으니, 특별하게 바로 결정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만일, 누군가, 어느 특정개인이 새회사로 옮기거나 새로이 개인사업을 할 때, ‘담당자 개인’과 ‘조직’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해관계의 속셈이 치열하게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해외공급자이건 국내거래선이건, 양자택일을 해야하는데, 보통은, ‘개인’보다는 ‘조직’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 냉엄한 비즈니스 세계였다. 그런데도, 나의 경우는, 나의 해외거래선들이 ‘나’를 선택해주었다. 훗날, 내가 다시 ‘대평원’을 창업할때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정말 다행히도, 나는 ‘동양글로벌’의 농산.식품사업본부장으로서의 ‘얼굴’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중국농산물 시장의 큰손 Wide Source를 해외공급자로 등록시키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종이회사인 E&S를 동양글로벌의 해외공급자로 등록시켰고, Chaiyong과 Dharmala를 또 ‘동양글로벌’의 해외공급자로 등록시켰으니, 새로운 종합상사인 ‘동양글로벌’의 한국시장 ‘등판’은 일단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정부의 국제경쟁입찰(농.유.공)이나 한국사료협회, 주정협회의 입찰이 뜨면, 다른 ‘선배’종합상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정정당당한 경쟁을 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