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실무교육 5; ‘저녁먹고, 술마시면서’ 경력사원 뽑기
/직원실무교육 5; ‘저녁먹고, 술마시면서’ 경력사원 뽑기
내가 농산부장이 되고나서, 해태상사 농산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욱일승천의 기세가 되었다.
잃어버린 옛영토를 모두 다시 찾아오고, 새로운 영토확장에 도전해 나갔다.
여직원 1명, 신입사원 1명 그리고 해태제과에서 전입해온 신입사원비슷한 직원 1명이 전부였는데, 1-2년사이에 부서직원이 20여명으로 늘어났다.
입찰마다 계약을 해내니, 일꾼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신입직원은 회사가 공개채용을 할 때, 면접을 통하여 우수인력을 배당받아 충원하였다. 그러나 당장 현장업무에 투입할 인원은, 우선 닥치는 대로, 회사내에서 유휴인력들을 끌어들였다. 크게 인성이 잘못되지 않았으면 계급을 가리지않고 즉시 현장에 투입하였다.
좋은 예가, 서울대 수의학과출신인 정정0과장이었다. 화공부에서 의료기사업을 하다 부도를 맞고 곧 회사를 그만둘 처지에 놓였던 그를 다짜고짜 농산부로 와서 근무하라고 명령아닌 명령을 내렸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고, 내가 그의 대학선배이기도 하니, 서로가 좋았다. 나는 믿을만한 중간관리자가 생겼으니 좋았고 그는 퇴사후 막연한 생계를 걱정하지않고 회사생활을 계속할 수 있어서 좋았다.(그는 나의 기대에 100% 부응하여 더좋은 농산부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해주었다. 그는 나중에 L.A 지사에 파견나가게 되었고 지금은 그곳의 현지 대표를 맡고 있다. ‘왕초’=잡초는 잡초인데 왕같은 잡초라 하여 내개 붙여준 별명, 그는 잡초처럼 자랐고, 왕초처럼 성장하였다.)
그 다음은, 건대 축산학과출신으로 외환과에 근무하던 황기0과장. 유부회장의 군대시절 은인의 아들인데, 그 인연으로 해태상사에 들어왔고, 좋은 보직을 받지못하여 외환과에 있었는데, 유부회장이 특별히 나에게 그를 부탁하였다. 그의 전공을 살려 농산부에서 잘 성장시켜달라는 것. 아쉽게도 그는 인성이 좋기는 하였지만 업무능력이 미치지못하여, 성공적인 관리자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일부 경력사원은 회사내에서 보충하였지만, 그래도 정말로 전문분야의 경력사원은 별도로 찾아 나서야했다.
성적증명서. 자기소개서등 서류만 가지고 경력사원을 채용하기에는 뭔가 2% 부족하였다.
나는 그간의 형식적 면접심사를 탈피하여, 식사하고 술마시며 ‘면접’을 보기로 하였다.
통상 대기업들이 해오던 형식적 면접에서 ‘다면접’+회사밖면접을 실험해본 것이었다.
나 농산부장만 면접하는 것이 아니라, 전직원들과 회식을 하면서 당사자를 이모저모 따져보고 살펴보는 자리를 마련한 것. 때로는 회식을 연장하여, 직원의 집들이까지 확대하여 ‘고스톱’‘포카’도 치면서 그 당사자를 여러면에서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형식적 면접 관행을 탈피한 그 시도는 절대적으로 좋았는데, 결과론적으로 좋은채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당사자의 됨됨이가 우리농산부에 적합하지 못해 채용까지 이르지 못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또한편으로는 직원들 상호간 보이지않는 경쟁이 존재하는 것이어서, 직원이 동료 또는 상사를 면접평가한다는 것이 ‘부작용’화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시도, 회사밖 ‘다면접’ ‘술마시며 면접’은 더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내가 농산부장으로 있으면서, 사업은 물론 직원을 채용하는 면접문제까지 여러 시도를 하며, 많은 ‘도전’을 밥먹듯이 하였다. 그만큼 모든 것을 옛관행, 하던대로 하지않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을까를 항상 생각하면서, 매우 열린자세로 대응하였다.
매우 창조적인 ‘도전’이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종합상사의 부서가 3년.4년.5년 연속 ‘흑자경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우리 농산부의 창조적이고 열린 자세 그리고 무슨 일이든 밀고 나갔던 ‘도전정신’에 있었다고 감히 평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