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 형민1; ‘그가 울면서 학교에서 돌아왔다’...‘아빠는 왜 그런 대학을 다녔어요?’
//큰아이 형민1; ‘그가 울면서 학교에서 돌아왔다’...‘아빠는 왜 그런 대학을 다녔어요?’
이야기를 하기전에 조금 부연하면...
(태국에서 귀국하고(1989.8?) 큰아이가 초딩5년이었는데 곧 중학생이 되어야하고, 그냥 역곡중학교에 보내기는 어쩐지 좀...그래서 소위‘강남8학군’을 가기위하여, 서초동 이모집에서 하숙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하였다. 여기서는..큰아이 이야기를 조금 하고 넘어가자)
서초동이모집에서 하숙을 하며 서초동 신중초교에 다니며, 주말만 되면 역곡집으로 오는데, 서초동이모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본인이 가장 힘들었겠지만 가족모두가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서초동 반지하전셋방을 구해 우리가 서초동으로 이사한 후로는, 주말마다 겪었던 힘든 일은 다시 일어나지않게 되었다.
서초동으로 이사온 후 어느 날, 서초중 1년?
(2004.9.4...다른 곳에 올린 글 ‘팔불출2’에서 일부 옮겨왔다.)
((---어느 날 큰애가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다시는 외국에 살다 왔다고 손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 아닌 선언을 비장하게 하였다.
왜 그러느냐고 캐물었더니, '태국도 외국이냐'라고 놀린다는 것이었다.
부자동네라 그런지 대부분의 아이들이 외국에서 살다가 왔는데, 미국 일본 유럽등 선진국들이라는 것,
아빠는 왜 하필 후진국인 태국에 나가서 이 아들님을 쪽 팔리게 하냐는 요지였다.
못난 애비에 팔불출 아달님이었다.
또 하루는 아빠가 나온 대학 때문에 무슨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왜 아빠는 그런 대학에 갔느냐(서울대에서 하필이면 ‘농대’를 갔느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아빠가 시골출신이기도 하고, 또 폼날 것도 같고, 또 풍족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거기에 갔는데 왜 그러느냐 하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이놈의 부자동네에 학교를 다니니깐 별일도 아닌 것이 별일이 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 폄하를 하고 곡해를 해도 그것은 내가 하루 이틀 겪은 것이 아니고 또한 '웃기는 넘들, 못난 넘들'하며 속으로 참고 넘기면 되는 것이었지만,
문제는 내 아들놈이 오해를 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기도 하고, 한편으론 잘못된 것은 고쳐 바로잡아 주어야겠다고 생각되었다.
급히 광주에 연락을 해서 나의 중고등학교 6년 성적표를 떼서 올리게 하였다.
(광주일고 졸업성적이 이과300여명중 4등, 반에서는 1등, 3년연속우등상을 탄, 빼어난 고교성적이었는데, ‘농대’를 선택했다는 것이 왜 아이들 마음까지 속상하게 만드는지 우리사회의 정서가 분통터졌다.)
큰 아이에게 성적표를 보여주고, 대학은 꼭 성적순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고 변명 같은 설명을 해주었었는데, 그 날 이후 어느 정도 이해를 하였는지, 학교생활에 늠름하게 대응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우리의 서울살이에서 겪어야했던 시골촌놈, 팔불출들의 촌극,
난 지금도 가끔 그 때를 생각하면 성적표를 꼭 보여줬어야 했는지 아직도 자신이 서지 않지만, 우리의 서울생활은 우여곡절이 많기도 하였다.
남쪽의 변방출신이 서울 중심부에는 들어왔지만 맴돌기만 할 뿐, 실질적인 중심에 들어가지 못하고 살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도 모르고 살아왔으니 정말로 팔불출이 아닐까, 어찌 알 수가 있단 말인가.
난 '비주류'임을 너무나 당연히 좋아하고 있으니 언제 '주류'에 편입될 것인가----))
1991년의 어느 날, 큰아이가 서초중 1년때의 일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