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1.1. 나는 수석부장이 되었다.
/1993.1.1. 나는 수석부장이 되었다.
나의 또다른 운명적 만남, Huyton 이야기는 다음에 더 하기로 하고(수단 첫출장, 동양글로벌 그리고 ‘대평원’창업후 오늘까지 계속된다), 잠깐 나의 승진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1985년 차장으로 승진하여, 1986년 11월 방콕지사장으로 부임하였고, 그 이후 박사장에게 꽤씸죄에 걸려 정치적 제재 또는 배제로 인하여 부장승진심사에서 해마다 낙방하였다.
88올림픽이 끝나고 1989년 9월 본사에 복귀한 이래, 1990.1.1 대기발령--1990.3.1.개발팀장--1990.9.? 농산팀장...
(농산팀장이 되면서, 새로운 역사가 또 쓰여지기 시작하였다...나를 농산팀장으로 발탁해준 박사장은 곧 퇴진하고, 그 자리에 나를 잘 아는 유부회장이 오셨고...그가 나를 부장으로 승진시켰다. 물론, 박사장도 나를 부장으로 승진시켜주었겠지만,---영업실적이 너무나 좋았으므로....박사장이 가고 유뷰회장이 오자 나는 날마다 안타를 치고 또 가끔 홈런까지 쳐댔다.)
정부의 국제경쟁입찰에서 매번 승승장구, 옛 영화를 금방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
‘대기발령’이 난지 꼭 1년만에 부장승진이 되었다.
(차장이 된지 6년만, 정말 늦깍이 승진이었다. 대기발령때, 3개월을 기다리지않고 성질을 내고 바로 나와버렸더라면?....3개월이 다 되어, 박사장이 ‘개발팀장’자리를 만들어 나를 전격적으로 '퇴사못하게‘ 나를 안아주지않았더라면?...'그들이 KS무역을 몰래 만들어 야밤도주를 음모하지않았다면?....'운명의 여신’은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
해태상사는 회사조직구조를 팀제에서 부서제로 다시 바꾸었다. 나는 ‘농산부장’이 되었다.
농산부의 실적은 욱일승천하는 기세가 계속 유지되었다.
정부=농수산물유통공사의 중국산 특용작물(참깨.땅콩.팥.생강.메밀등) 입찰참가하여 계약실적이 다른 종합상사를 제치고 연속 1위를 하였다.(해태상사 부서중 유일하게 흑자를 내는 부서가 되었으며 그것도 3년연속 흑자를 계속해서 내었다.)
수석부장 승진, 1993.1.1.
부장승진후 2년만의 특진이었다.(그동안 차장승진에서 누락되었던 날들을 모두 회복하고 오히려 동기들보다 1년 먼저 수석부장이 되었다. 어찌나 영업실적이 좋은지 곳곳에서 성과를 내고 부서중 유일하게 ‘흑자’를 내니, 회사에서는 여러모로 ‘수석부장’으로 승진시켜, 예비임원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내가 해태그룹의 임원이 되었을까요? 나의 ‘운명’은 어떻게 움직였을까요?)
해태상사의 수석부장제도는, 임원(이사)자리가 매우 한정되어 있으니 고참부장들을 바로 임원으로 승진시키지는 못하니, 고참부장들 중에서 향후 임원(이사)의 예비격으로 ‘수석부장제’를 운용하고 있었다.
인사적체를 일부 해소하고자 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곧 ‘이사’가 될 고참부장을 미리 선별하는 장치이기도 하였다.
(일단 수석부장이 되면, 빠르면 1년이내 늦어도 2년이 되면 임원(이사)으로 선임되었다. 말하자면, 수석부장은 예비임원이었다.)
그동안, 특히 방콕지사 근무 3년여의 ‘중세암흑기’가 드디어 활짝 개어 사라지는 상황이 되었다.
‘오래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인가?
참고만 있지 않았고, 불의함에 항상 대들었고 저항하면서 버텼는데, 우여곡절끝 다시 ‘광명’을 찾았으니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그동안 겪은 수모.좌절.냉대가 이제 모두 나의 ‘자산’이 되었다.
그러나, 언제 다시 비구름이 몰려오고 또 ‘비’가 아니 폭우가 내릴지 누가 어찌 알겠는가?
과거를 거울삼아 미리 비가 올지 모르는 앞날을 대비하는 지혜가 발휘될 것인가?
(1995.5.1....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나는 임원이 되지못했다. 그리고, 나는 동양그룹에 스카우트뒤어 동양글로벌의 농산사업본주장=등기이사로 해태상사를 떠나게 된다. 이는, 또, 운명이었다. 그러나 나의 자유의지가 그‘운명’을 불러들였다. 내가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것까지 그 ‘운명’이었다?---후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