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상사(주)에서(1980-1995)

쓸만한 해외공급선 어디 없소?’...‘E&S'=Excellent Supplier', 중국산 녹두 ‘첫계약’

햄릿.데미안.조르바 2019. 1. 10. 09:39

/‘쓸만한 해외공급선 어디 없소?’...‘E&S'=Excellent Supplier', 중국산 녹두 ‘첫계약’

 

농산팀에 복귀하자마자, 해외거래선들에 내가 농산부에 돌아왔다는 안내장을 돌리고, 모든 거래선들의 Telex 파일을 읽어내는 작업이 모두 끝났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쓸만한 해외거래선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과거에 한국농산물 시장을 주름잡았던 홍콩의 거래선들은 모두가 옛날의 그들처럼 막강전력이 아니었고, 그나마 경쟁력있는 거래선들도 다른회사(옛 해태홍콩지사장이 창업한 회사)와 협력하고 있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것이 내가 개발해놓았던 태국의 농산물공급자들이었고, 해외사료곡물공급자는 Peter Cremer등이 KS 무역과 함께 나갔으니, 해태상사 농산팀의 해외거래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 어떻게 해야 경쟁력있는 해외공급선을 확보하느냐 였는데, 그게 그리 쉬운일이 아니었다. 남대문시장에 가서 바로 콩나물장수를 만나 콩나물을 사오는,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사료곡물공급자는 시간이 되는대로 천천히 나중에 찾기로 하고, 우선 시급한 것이 참깨.땅콩.팥등 국내물가안정용으로 정부가 국제입찰로 수입판매하는, 중국산농산물 공급자를 찾아내야 하는 것.

나는 홍콩지사에 파견나가있는 장종0과장을 불렀다. 마침 그와는 땅콩과장때 부터 곡물과장때, 나와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어 개인적으로 매우 가까웠다.(그는 경희대 중문학과 출신으로, 한국에서 화교학교를 졸업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당연히 중국말이 능통하여, 삼성에서 스카웃하려는 것을 홍콩지사로 보낼만큼 회사가 관리하는 인재중의 하나였다...그렇지만 홍콩지사 나가기 전에는 곡물과에서 나처럼 찬밥이었다. 소위 K대 인맥에 막혀서, 특별한 실무가 없었다. 나는 그를 커피원두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일본어까지 가능한 그를 일본의 UCC 원두커피와 연결해주어, 내가 땅콩가공수출을 이끌었던 해태산업의 커피사업에 동참하게 해주었다. 또 하나, 그는 모든 운동을 잘 하였는데 특히 축구기량이 남달라서, 사내 축구대항전에서는 그와 나는 중심역할을 하였다. 그는 센터포드로 나는 전방과 후방을 잇는 리베로역할인데...어찌나 그는 볼에 대한 집착이 강한지 볼을 잡으면 골까지 연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꼴통...아무리 싫은 이야기를 해도 막무가내...그래도 그와 나는 게임이 끝나면 허허허 잘 통했다. 그래도 그는 고집불통. 조금만 수틀리면 그는 다른사람 말을 듣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했다. 회사내 K대 출신들과는 매우 적대적담장을 쌓고 살았다...나는 그런 그를 한편 받아주고 또한편으로는 대의를 위한 곳으로 살살 이끌어내서 함께 일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와 내가 다시 중국농산물비즈니에서 만났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부의 농산물 국제입찰(현 농수산식품유통공사=농유공)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였다. 본사의 곡물과 근무시절 바로 옆에서 입찰진행과정등을 어깨 너머로 완전히 이해하고 홍콩지사에 파견된 것이니, 나와는 입찰사업에 대하여 두말 더 할 필요가 없었다.

홍콩지사의 장과장이 현황을 파악한 결과로는, 농유공의 농산물 국제입찰에 경쟁력있는 공급자는 현재로서는 없으며, 경쟁력있는 새공급자를 찾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릴 뿐아니라 찾아질지 가능성이 심히 의문시된다는 것.

우리는 대안으로, 한국에 이미 진출해있지만 경쟁력은 충분이 있지만 아직 계약실적이 없는 어느 공급자에 눈길이 갔다. 계약이 없는 것은 그들의 공급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 국내에이전트의 정보능력등 활동이 부실하여 비롯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고, 그 공급자를 공략하기로 하였다.

마침 그 공급자는 우리회사 자원사업부와 석탄비즈니스를 하고 있었는데, 홍콩지사의 장과장이 톡톡히 큰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 공급자는 Wide Source 이름도 거룩하고 뜻이 깊은 ‘무슨 자원이건 폭넓게 공급해준다’는 뜻 아니겠는가? 중국중앙정부='양유공사'의 숨은 지원을 등에 업고, 석탄등 광물자원의 해외수출에 상당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해서..그러면, 광물에서뿐아니라 농산물공급능력까지 보여달라고 요청하였는데....

한국시장의 공식에이전트로는 이미 쌍용종합상사에 계약되어 있다는 것 아닌가?

(쌍용은 아시다시피, 쌍용시멘트를 자회사로 갖고있어, 석탄을 수입하는 바잉파워가 막강하였다. 그러나, 식품.농산물사업은 실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날 내가 절대로 아니었다. 심플하게 제안하였다.

편법이긴 하지만, Wide Source 가 아닌, 다른 회사이름을 쓰면 대외적 법률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니, 새회사=종이회사를 만들어 농유공의 농산물 입찰에 참가하자고 꼬득였다.

(우리 해태상사의 농유공입찰에 대한 정보관리 능력과 농유공관련업무 하는 것을 일단 지켜보고, 해태의 업무추진력이 별볼일 없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없던 일로 하면 되는 것이고, 만일 잘한다고 평가되면, 그때가서 쌍용과의 문제는 다시 논의해도 늦지않으니, 새회사 하나 만들어 해태상사의 공급자로 등록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진퇴양난 또는 복잡한 관계정립에 놓이면, 나는 바로 매우 합리적인 듯 보이는 대안과 전개방향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상대방의 불안요소를 일거에 제거해주는 순발력이 상당하다고 자부한다 하하하.

 

그들이 우리에게 만들어준 새회사(소위 요즘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종이회사=페이퍼캄퍼니)이름이 E&S였다. 나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오, Excellent Supplier 아닌가? 앞으로 중국산 농산물의 농유공입찰은 모두 E&S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야, 하고 가까운미래를 포튠텔러처럼 말해 버렸다.

그들은 박장대소하며 박수쳐대며 좋아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E&S를 해태상사의 중국산 농산물 공급자로 농유공에 공식으로 등록시키고, 첫 입찰에 참가하였다.

녹두 1000톤?(내 기억으로는 크지않은 물량이었지만, 녹두소비물량으로는 엄청 큰물량이었다.)

첫 입찰, 모든 면에서 첫입찰(내가 농산팀에 부임한 이후 첫입찰이며, E&S의 첫입찰이고, 더군다나 최근 3년여 해태의 농유공 낙찰계약은 한톨도 없는 형편이었다.)이니 만큼, 나는 집중또 집중하며 입찰준비를 하였다.

입찰당일, 응찰시간에 맞추어 응찰가격을 받았다. 솔직히 그 가격이 경쟁력이 있는지 아닌지 나로서는 가름되지 않는 가격수준이었다. 과거의 데이터도 없고, 서울에 있는 내가 어찌 중국시장의 흐름을 알수 있단 말인가?

농유공 입찰장소로 막 나가려는 찰나, 담당직원에게 어떤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직감적으로 경쟁상대의 하나인 어떤 상사로부터온 전화로 생각되어, 그들의 통화내용을 하나하나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 통화가 끝나고 우리담당직원에게 물었다. 어디서 온 전화냐? 무슨 말을 하더냐? 하였더니, 효성물산의 농유공입찰담당(신정0)이 해태상사의 포지션에 대하여 물었다는 것. 입찰당일 그것도 응찰가까운 시간에 경쟁상대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가격수준등을 건들어봤다는 자체가, 나는 효성물산이 본 입찰을 따고자 하는 의지가 대단히 강하다 아니 필사적으로 따내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의 다른표현이라고 읽혔다.

나는 즉시 나가는 직원의 입찰서를 수정하여 작성토록 지시하였다. 우리해태상사의 코미션이 들어간 응찰서에서 우리회사 코미션을 한푼도 넣지않은 새응찰서을 만들어, 농유공에 제출하였는데....

아,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우리 커미션이 빠진 가격이 효성물산가격보다 불과 몇불 차이로 우리해태상사가 낙찰되버린 것. 이렇게 우리는 첫 농유공 입찰에서, 중국산 녹두로 첫계약을 하게 되었다.

홍콩에서는 속된말로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막말로 ‘난리부르스’

어떻게 서울해태상사의 Mr.Park은 농유공입찰가격을 알아낼 수 있느냐, 농유공의 고위인사와 무슨 비밀체널이 있는거 아니냐, 서울의 해태본사 농산부장의 과거가 심히 의문스럽다는등, 온갖 찬사가 밀려들어왔다.

당연하게도, 빼버린 우리회사 코미션은 다시 살아돌아왔고, 또 이 한건의 농유공 계약으로, E&S는 정말로 Excellent Supplier임이 증명되었다.

그후, 몇 번의 다른 입찰을 통하여, 우리해태상사의 농유공 입찰비즈니스의 업무추진능력이 검증되어, 중국중앙정부가 지원하는 Wide Source 의 공식 한국시장 에이젼트가 되었고, 내가 해태를 퇴사하는 후에도 그들은 Mr.Park에게 공식.비공식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나중에 내가 동양그룹의 해외창구인 ‘동양글로벌’에 스카웃되어 농산사업부장=이사가 되어서도 또다른 페이퍼캄퍼니를 만들어 나를 도와주었다...그러나, 내회사 대평원농상때는 차일피일하다가 지원을 끊었다...더 자세한 이야기는 ‘후술“)

 

나는 이 일이 아니고라도, 평소에 직원들에게 큰소리로 전화받고 큰소리로 상담하라고 요구하였다.

첫째는 무슨일이든 적극적 자세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목소리가 잦아들면 안되고 목소리라고 크게 힘있게 해야 듣는 상대방의 신뢰를 끌어올 수 있다고 교육시켰고...

더 중요한 것은, 그래야 담당직원들과 부서장인 내가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대응하기가 더 좋다는 논리. (이미 내가 뒤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었으니, 따로 물어보고 또 대답하지 않아도 되니, 불러서 또 물어보는 시간을 절약하니...바쁜 해외사업에 즉시 결정해야하는 경우가 많은데, 직원들과 나의 동선을 짧게 가져가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좋은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나름 그동안 내가 터득한 합리적.논리적 근거였다..나와 직원들과는 최소한 업무에 관한한 의기투합되는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그래야, 승부가 쉽지않은 국제상전에서, 특히 국제입찰싸움에서 승률을 올리는 유일하고 최선의 방법 아닌가?

이런 기본적인 나의 방침덕분인지, E&S의 탁월한 공급능력때문인지, 얼마 지나지않은 짧은 시간안에, 1년? 2년?, 우리해태상사는 과거의 화려한 실적을 뛰어넘어섰고, 다시 옛날의 영화를 모두 되찾아오게 되었다.

대단한 성공이었다. 국내외 곡물.농산물시장에서는, 다시금 해태상사의 Mr.Park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