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웃픈‘ 골프 이야기...‘무슨 운동이든 잘한다더니, 파100도 못하고 귀국하다니@@@@’
/나의 ‘웃픈‘ 골프 이야기...‘무슨 운동이든 잘한다더니, 파100도 못하고 귀국하다니@@@@’
내가 골프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일본땅콩수출을 하면서 일본바이어들과 만나면서.
그들은 앉으면 골프 이야기를 하였고, 그때마다 자기의 골프가 잘 되지않는다고 투정부리곤 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골프가 무엇이길래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이해하지못하였고, 더군다나 골프가 야구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참 운동신경도 지독히도 없는 모양이야 하고 대수롭지않게 넘겼다.
방콕지사장 명령을 받고서는, 아 나도 이제 그 어렵다는 골프란 것을 하게 되었고, 골프가 얼마나 쉬운 운동인지 내가 보여주겠노라고 내심 작정하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골프를 우습게 보고있었는지는, 앞서 이야기했던 일본바이어 Mr.Ohgaki 에게 골프채를 가져오라했더니 7번아이언을 가져왔고, 나는 그것을 들고 동신아파트옥상에서 밤마다 스윙연습을 했다...렛슨을 받아야하는데, 나의 운동신경만 믿고 밤마다 7번아이언을 휘둘러댔으니 그때 이미 나의 골프스윙폼은 자리를 잡고 말았을 것. 지금 생각하면 웃프고 무식힌 이야기...결국은 돈이 문제였다. 렛슨비가 없으니 렛슨 받을 생각을 어떻게 할까?)
보통, 방콕지사에 생활하면 평균적으로 3개월안에 100을 깨고, 빠른사람은 1년안에 조금 늦은 사람은 3년정도 지나면 모두 싱글을 친다고 하였다.
(그래서 당시 방콕지사 주재원들은, 아파트한채를 거저 얻게 된다고 농담하였다. 골프비가 싼 방콕에서 싱글해 귀국하면, 한국에서 그만큼 하려면 아파트한채값은 들여야 싱글이 되는 것이니 돈을 그만큼 벌게 된다는 이야기)
(나는 속으로 늦어도 1년안에 싱글을 하겠다 싶었다. 야구와 비슷하다는 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4번타자에 포수를 주로 보았으니, 골프도 어려울 게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렛슨을 받아야한다고 주변에서는 조언하였지만, 나는 들은체 만체 하였다. 렛슨비 돈도 돈이지만 굳이 렛슨을 받아가면서까지 골프를 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만만하였기 때문이었다.)
방콕에 홀로 부임한지가 11월...곧 년말년시 연휴가 되었다.
가족이 아직 오지 않은 나는, 휴일동안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골프스윙연습이나 해야겠다 싶어서, 볼보을 끌고 연습장에 갔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한국에서 운전을 해보지 않은 ‘초보운전수’가 핸들이 오른쪽인 볼보를 몰고 갔으니, 온몸에 비지땀이 줄줄줄...주차하다가 볼보를 화단벽에 받아버리고 말았다.
혼비백산.
골프연습을 어찌 했는지 모르게 그날이 끝나고...
가족들이 오기전 3달동안에 골프기본을 만들어놔야 한다는데 나는 첫날부터 헛바퀴를 돌리고 있엇으니..벌써 어려운 길에 들어선 것이었다.
그때라도 렛슨을 받고 꾸준하게 3달정도 기본스윙폼을 만들었드라면 좋았을 것을, 내 고집은 알아주는 고집 아닌가?
더군다나,한.태구상무역의 클레임처리로 처음부터 동분서주하다보니 골프연습하는 것도 부정기적으로 하게 되었고, 집중이 되지 않았다.
(또 전임지사장 한이사를 미워할 수밖에 없겠다. 한.태구상무역 클레임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않은 채 귀국해버려 그 뒤치다꺼리를 내가 몽땅 해야했으니, 내가 한가하게 골프연습에 집중할 수 있었겠는가? 두고두고 미웠다.)
서울에서 가족이 왔고, 한.태구상무역 클레임은 계속 문제가 나왔고, 나의 골프연습은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3개월안 파100 그리고 1년내 싱글은 점점 멀리 가고있었다.
매월 상사협의회가 주최하는 한국상사주재원들끼리 골프대회가 열렸다.
나의 골프실력은 늘지않고 언제나 골찌근방에 내 이름이 있었고 그러나 가끔 ‘장타상’을 거머쥐곤 하였다.
남다른 운동신경으로 야구하듯 드라이버를 치면 가끔 홈런이 나왔다. 이름하여 ‘롱게스트’
뒷땅.오비.퐁당을 밥먹듯 해대니 좋은성적이 나올 수 없었고, 나의 자존심은 땅바닥을 기었다.
나의 골프는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나빠졌다. 기본스윙이 잘못되어 있으니 아무리 정신적으로 버틴다해도 오히려 어깨에 힘이 더들어가는 모양. ‘악순환’이었다.
그리고 남들은 본사 눈치봐가면서, 1주일에 두세번 라운딩을 하는데, 나의 원칙주의는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않았고, 오히려 한.태구상무역 클레임 뒤치다꺼리로 어느 날은 한달에 1번 라운딩도 쉽지않을때가 많았다.
이래저래 나의 골프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1989년 여름, 귀국했을때
나의 성적은 아마도 100타+- 즉, 파100을 못하는 수준이었다.
정말 창피하였고 억울하였다. 어쩌다가 내가 파100도 못하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돈을 아낀다고 프로가 쓰던 중고채로 시작하였으니쯔쯔쯧 그리고 렛슨도 받지않고 마구잡이로 스윙하엿으니 못된 습관만 몸에 입력이 되었을 것..운동 잘한다는 자존심 하나 가지고 골프 잘 칠수는 없는 것 아닌가. 더군다나 그 자존심이 오히려 나의 골프발전을 가로막는 제1의 적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