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태국산 옥수수 계약 성공!!!, '나는 또 스타가 되었다.'
/첫 태국산 옥수수 계약 성공!!!, '나는 또 스타가 되었다.'
당시 국내사료곡물사업은 국제 곡물상 즉 메이저들..토파.카길.콘티넨탈, 벙개등..이 독과점상태로 거의 독점하다시피하였다.
그 틈을 국내종합상사들이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들의 막강한 해외정보망.자금력을 뚫을 수가 없었다.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하였다.
그 틈새를 해태상사의 박과장이 파고 들었다. 식품원료.농산물을 주원료로 사용하는, 즉 실수요자격인 해태그룹의 배경을 발판으로 쳐들어갔다.
해태상사의 숙원사업의 하나이기도 했고 특히 한.태구상무역이 막 본궤도에 들어가고 있기도 하여, 태국산농산물의 수입에 착안하고 태국산옥수수 또는 태국산타피오카펫랫등의 한국수입을 추진하게 되었다.
한.태구상무역의 한축으로써, 태국산농산물의 대응구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모기업인 해태제과의 주요원료인 전분당.과당이 옥수수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식품공학전공’자가 아니라도 모두가 아는 사실.
나는 이 둘을 적극활용하여, 태국의 농산물 거래선을 유인하고 한국사료협회.옥수수가공협회등에 해태그룹의 잠재적 시장경쟁력을 선전하고 다녔다.
언제까지 해외곡물메이져들에게 한국의 곡물.농산물수입시장을 독점케 할 것인가? 애국적.비애국적이란 자극적인 언사가 아니라, 상사맨으로서 부끄러운 일 아닌가? 우리 해태상사가 그 선도적 역할을 할 터이니, 정부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수혜를 받고있는 귀 협회들도 국내소비자들에게 부끄럽지않게 국내상사들을 외면하지 말아달라고 반읍소.반호소하면서 사료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갔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첫계약은 태국산 옥수수였다. 한국사료협회의 국제입찰에 당당히 최저가응찰자로서 해태상사/태국의 Chaiyong Group 이 낙찰되었다.
해외곡물시장에 난리가 났다. 해태상사가 누구인가? 해태의 Mr.Park이 누구인가? Chaiyong group과 해태는 어떤 관계인가?
국제곡물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했다. 곡물소비지 시장으로서 일본 다음가는 큰손이 바로 한국시장이었는데, 국제곡물메이져들이 장악해왔던 한국시장에 해태상사가 첫계약을 체결하였으니 이는 빅뉴스였다.
(로이타 통신등 국제곡물마켓시장뉴스는 수시로 한국국제입찰공고와 낙찰소식을 실시간으로 중계하였다. 거기에 당연히 낙찰자.계약자의 상세가 보도되니 어느덧 해태상사 박과장과 태국산 옥수수는 그 중심에 서있게 되었다.)
태국산 옥수수 수입이 순풍에 돛단 듯 순항만 한 것은 아니었다.
첫 술부터 문제가 생겼다.
선적해야 할 때가 다 되어가는데도 수입신용장이 개설되지 않는 것. 2만톤급 선박에 몇백만불상당의 옥수수를 실어와야하는데 신용장이 열리지않으면 수출업자는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막말을 하자면, 옥수수는 실렸는데 신용장이 오지않으면 물품대금회수를 못하는 것이고 자금회전이 안되는 것이니 자금력이 부족한 회사는 부도를 각오해야했다.
심지어는 불량한 바이어를 만나는 경우, 물건은 갔는데 물품대금을 지급하지않고 줄행랑쳐버리는 ‘국제사기’에 걸리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는 게 국제곡물시장의 차가운 현실도 있는 것이 또 사실이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정보’였다. 매우 정확한 정보가 생명.
바이어가 어떤 상태인지...바이어의 신용상태가 불량해서 은행이 신용장을 열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사기’를 치려고 작정했던 것인지, 아니면 또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등등.
바이어 주변의 실상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야 하는 것이 바이어쪽에 있는 상사맨의 할 일.
나는 방콕지상장과 매일 매시 시황을 시시각각으로 전하고 뉴스를 공유하여 왔다.
신용장이 열리지못하는 것은 바이어인 한국사료협회와 한국정부사이의 수입쿼타할당량 때문으로 그 결정이 늦어지고 있기때문이라고 설명.설명했으나, 그때의 방콕지사장은 나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주지않고, 본지사간 권력투쟁 비슷하게 이해하려 하였다.
(당시 방콕지사장은, 고참부장으로 본사의 농산사업부장과 알력을 주고받고 있었다. 한.태구상무역의 태국측 창구역할을 하던 그는, 본사의 정책에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었다. 한국산 비료를 사주는 ‘지엄한’ 바이어인데도 본사가 그 ‘바이어’대접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다는 숨은 요지였다...오히려 국세청을 끼고하는 주정원료 타피오카수입권을 너무 과대포장하여 그의 공이 잘 보이지않게하고 줄어들게 한다는 것이었다...고래싸움에 나의 새우등이 터지게 생겼다. 나는 이럴때는 다짜고짜 정면돌파를 선택한다. 싸움은 너희들 고래끼리 하시오 나 새우는 내 살길을 찾아갈터이니 알아서들 하시라 였다.)
년말년초가 되면 한국정부기관은 새로운 정책으로 새제도.새규정이 나오는 게 상식이다.
옥수수 수입쿼타량을 결정해야할 농림부가 그 결정을 년말에 하지못했고 당연히 년초로 순연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농림부 양정과 담당사무관(운좋게도 그는 나의 농대70학번동기. 축산과출신인 그는 행정고시를 통해 농림부에 근무하고 있었다.)으로부터 직접 들어 알고있었다.
본사와 권력게임을 한다고 생각하는 그 방콕지사장(서울대상대65학번, 한국은행출신, 자존심이 하늘을 찔러대는 싸나이. 공주=공포의 주둥아리)은 나의 진지한 설명을 한 귀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상급자 부장이고 학교 대선배이지만, 일의 큰줄기를 놓치고 있는 그를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기다리다가는 큰코 돌이킬 수 없는 낭패를 보기에 딱 안성맞춤상태였다.
나는 급기야 Chaiyong Group의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아들 Mr.Boonchai가 통역을 하면서 나의 의견을 전달하였다.(방콕지사를 통하지않고 직거래를 시작한 것이었다. 방콕지사장은 노발대발, 난리부르스를 쳤지만 나의 태국산 농산물 비즈니스를 죽어나가게 그냥 놔둘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모든 텔랙스교신은 Chaiyong과 다이렉트로 하고 참조만 방콕지사장으로 해서 사업이 어찌 돌아가는지만 알수있도록 그래도 배려해주었다...그는 나중에 다른 큰사건으로 내가 방콕출장가서도 내 얼굴을 보지도 않앗고, 내가 문제해결을 하고나서는 더욱 내 인사조차 받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자존심’만 하늘을 찔렀을 뿐, 일머리는 정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대상대’니 ‘서울대법대’니 하는 자존심하나 가지고 다니는 선후배들을 존중하지 않는다....그는 나중에 그의 방콕지사장 자리를 나에게 넘겨주고 본사로 귀임하여 얼마 지나지않아 해태를 떠난다...인계인수를 하나도 해주지않고 본사로 들어가 내가 매우 힘들었던 기억도 있다.)
나; 신용장은 100% 열린다. 한국정부를 믿고 나를 믿어주라...그러하니, 무조건 현재 들어와있는 배에 옥수수를 전략 실어라. 문제없다.
아버지; 어떻게 너를 믿느냐?
나; 귀하의 아들에게 물어보시라...(나는 몇 번의 방콕출장으로 그의 아들과 형제처럼 친구처럼 사이가 가까워져 있었다. 오래 만나야 통하는가 한두번 만나도 진심이 통하면 금방 마음의 문을 열고, 그가 거짓부렁이 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숨소리.목소리만 들어도 알게 되지않은가?)
아버지;......(Mr.Park을 믿는다...이후 문제는 모두 내가 책임진다. 신용장없이 선적한다.)
결국, 태국산 첫옥수수는 신용장없이 먼저 배에 실렸고, 옥수수가 배에 실리고 며칠 후 신용장은 열려서, 태국산 옥수수의 첫 한국비즈니스는 성공적으로 끝내게 되었다.
(그 때 만일, 신용장이 열리기 전에는 죽어도 옥수수를 싣지 못하겠다든가, 방콕지사장 고집을 꺾지못해 내가 Chaiyong 회장에게 전화를 하지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2차, 3차...수차례에 걸친 태국산 옥수수선적은 없었을 것이고, 한발 더 나아가 다른 사료원료인 타피오카펠렛 비즈니스도 해보지 못했을 것 아닌가?
운명의 여신은 항상, 열심히 물불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자에게 문제의 열쇠를 주는 것 아닐까? 그러나 무작정 덤벙대면 촐딱거리는 자에게는 주지않고, 꼼꼼히 다져보고 정확하게 현황을 정리해가는 자에게만 그 열쇠를 준다고 나는 믿는다...
Chaiyong 과는 첫거래를 그리 어렵게 시작해서인지 하는 일마다 수시로 ‘안타’를 치며 해외곡물시장에 Chaiyong의 이름과 해태상사의 Mr.Park의 이름을 오랫동안..한동안 오래도록 뉴스가 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