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사이 ‘상사맨’이 되어있었다. '매사 부딪치고 봤다'
/나는 어느사이 ‘상사맨’이 되어있었다...매사 부딪치고 봤다.
‘젊은 사람이 패기가 없다’
내가 해태상사에 막 입사했을 때, 인사부와 축구경기중 다리에 쥐가 나서 도중포기했을 때, 우리박부장이 씨니컬하게 나에게 했던 말, 나는 그말에 자존심이 상하여 그에게 저항한 바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범생티’‘일류고.일류대티’를 나도 모르는 사이 내고 있었고, ‘농대’진학 후에는, 가정교사자리 구하면서 ‘농대디스카운트’를 알지도 못한채 사회의 냉대.수모를 받아오던 터라, 정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이유없이 모든 사회적 사안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소극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지않고 나도 모르는 사이 우선 부정적으로 또는 반대의견을 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수원에서 생활하던 때의 내 사진을 보면, 모두가 밝은 표정은 하나도 없고 무언가 불만.불평 가득한 모습 뿐이다.
내 마음 속 응어리져있는 사회적 냉대.홀대에 대한 가슴속 반응이 얼굴에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군대생활을 거치고 나서 조금 나아졌다. 군대에서는 깊은 생각을 할 겨를없이 매사에 당장 행동해야하니 머릿속에 가득했던 부정적 생각들이 마음에 담아놓은 겨를이 없었던 것.
군대 제대를 하고나서 다시 대학생활을 시작하면서 또 사회에 대한 ‘농대디스카운트’가 실감이 되니, 어찌해야할까 많은 생각들을 가슴속에 담아두었을 것이고, 그 문제가 어디 쉽게 풀릴 일인가? 도저히 해답이 없는 문제 아니었나?
금호실업에 들어가서도 보이지않는 ‘농대디스카운트’는 도처에 널려있었다.
‘외환과’ 전보조치에도 나는 선뜻 회사의 방침을 받아들이지못하고 ‘각서’를 요구한 것도 깊이 들여다보면 ‘농대콤풀랙스’에 대한 나의 감정적 반응 아니었을까?
이러한 잠재된 나의 ‘농대콤플랙스’성향이 우리 박부장과의 부딪침끝, 일본땅콩수출사업을 추진하면서, 무엇을 따지고 자시고할 겨를도 없이 나는 일본사업에 매몰되어갔고, 주변일들이 나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나를 통하여 해결되는 듯해지니, ‘농대디스카운트’같은 냉대.모멸은 어느사이 사라져버리고, 나의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일단 내 눈에 들어오면, 물불 가리지않고 나는 앞으로 돌진..정말 돌격앞으로였다.
일 앞에서는 ‘돌쇠’였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무조건 밀어붙이고 봤다.
소위 서울대생.범생타입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저돌적 공격형이 되어 있었다.
(언제나 우유부단하고 어찌 그리 생각이 많은지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는 넘어야할 단계가 너무나 많았다. 무슨 일을 하려면 오래 걸렸다. 답답 또 답답하였다. 그러던 것이 어느순간부터...모든일에 적극적. 매사 부딪치고 보는 성격으로 변해 있었다.)
(바람직한 나의 성격전환에는, 해태상사 입사 초기 우리의 박부장님에게 감사말씀을 드리지않을 수 없다. 의도했는지 아니었는지 몰라도 그는 나의 잠재된 뇌관을 건드려주었고, 나의 능력에 맞게 일을 맡겼으며 끝까지 아무 간섭도 하지않고 참고 믿어주었다.=나는 누가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면 하던 일도 하지않는 꼴통망나니였으니 어찌 누가 감당할 것인가 하핳)
이와같은 대대적인 나의 성격변화는 방콕지사장 부임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한.태구상무역 클레임 뒤치다꺼리하면서, 주재임원 ‘윤무관’과 ‘김이사’등과 꼬이고 본사 경영진과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나는 다시 옛성격으로 되돌아가는 듯하였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저항하고 반항하면서 방콕지사생활을 하였고 끝내는 2차 임기를 희망하지도 않고 본사복귀를 요구하게 되었다...
본사귀임후 대기발령 끝, 우여곡절을 거쳐 ‘농산부장’이 되면서 다시 능동적.적극적 성향으로 ‘부활’하게 되었지만..그 역정은 파란만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