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상사(주)에서(1980-1995)

해태상사에서, 감사원의 수출용땅콩원자재 재고조사. ‘법’이 무엇인지 그때 알게 되었다.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2. 22. 21:32

/해태상사에서, 감사원의 수출용땅콩원자재 재고조사. ‘법’이 무엇인지 그때 알게 되었다.

'나도 법대를 갔어야 했다?'

일본땅콩수출사업 초기, 일본바이어의 발암물질 ‘아프라톡신’ 검출을 빙자한 마켓클레임으로 해외시장의 엄혹함을 알았다면,

감사원의 수출용땅콩원자재 재고조사로 ‘법’의 엄중함을 알게 되었다.

(법대를 왜 가려고 하는지, 왜 고시공부를 하는지 그때서야 새삼 알게 되었다.)

 

정부가 가공수출을 장려하자 일부 악덕수출업자들은 해외에서 다량의 수출용농산물을 수입해서, 전량수출하지않고 일부를 국내반출하여 시세차익을 보기도 하였다. 아직 사후관리 제도가 엉성한 틈을 타서 악덕수출업자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아예 수출은 하지않고 원자재 전량을 통째로 국내시장에 팔아먹고 도망가버리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국내농산물가격이 고가인 고추.참깨.잣등 수출용원자재가 문제가 컸다.

정부는 급기야 감사원을 동원하여 수출용원자재 전수조사에 들어갔다.

우리 해태상사도 해당되었다.우리는 그룹사인 해태산업의 책임아래 원자재를 관리하고 있었으므로 수출용원료땅콩의 외부반출은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나오고 말았다.

(실무책임자인 나로서는, 수출용원료피땅콩인 중공산피땅콩과 국내피땅콩의 대체수출이 혹시 문제가 되지않을까 스스로 걱정하였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바 있지만, 일본바이어들이 한국산볶음피땅콩을 일본국내산과 비슷하여 비싼값에 사가기 때문에 우리는 편법으로 국내산피땅콩을 가공하여 일본으로 수출하고 대신 중공산피땅콩은 탈각하여 오징어땅콩용으로 쓰고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법적문제소지가 다분한 것이지만, 그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그런 법적문제를 따지지도 않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넘어갔다. 단지, 실무를 정통하게 꿰고 있는 나로서는 당연히 문제될 수 있다고 여겼던 차였다.

감사원의 재고조사가 나오니, 나는 괜히 대체수출한 것에 대해 걱정을 하다가, 수입량 재고조사결과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바로 이 사소한 것에서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해태산업에 보관되어있는 피땅콩은 수입한 중공산 피땅콩이 아니고, 대체수출할 예정인 국내산피땅콩이었다. 해태산업 자체가 자체소요 원료땅콩이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 터라 수출용원자재 재고가 부족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감사원 담당은 일부 수량이 부족하다고 확인서에 나의 서명을 요구하였다.

대체수출에 관심이 가지않게 하는 것만도 나에게는 큰일이라 생각되어 소소한 재고수량 부족정도는 확인서에 서명해주어도 큰 문제가 되지않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관련법규; 수출의무량, 95% 이상 수출하였을 경우, ‘수출이행’으로 간주 할 수있다.)

더군다나 부족량이 전체 1%정도 밖에 되지않는 소량이어서, 외환거래법상 5%? 인가 범위내 부족분에 대한 수출미이행은 ‘수출이행’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근거조항도 있으니, 큰 걱정없이 서명해주고 말았다.

문제는 바로 그 ‘임의조항’에서 나왔다. 감사원담당의 주장은 ‘~~용인할 수 있다’ 이지 ‘용인한다’가 아니다라는 것. 강제규정이 아니고 임의규정이므로, 감사원의 판단이 최종적이 되는 것이고, 따라서 1% 부족한 것은 ‘수출이행’이 아니고, 원자재유출에 해당된다는 것.

감사원은 바로 해태상사 법인과 담당인 나를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하고 말았다. 검찰은 이를 서울시경 경제반에 이첩하여 입건조사하게 하였다.

‘법’이란 것이 이렇게 이현령비현령 또는 권력기관의 평가에 의하여 죄가 될수도 있고 ‘유예’처리 될 수도 있는 것. 그 결정.판단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권력기관의 입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다...나는 한마디로 비참함을 느꼈다. 내가 이렇게 무력하다니...아무리 내가 똑똑하고 규정을 잘 안다해도, 그 판단.결정은 내가 아니고, ‘법’을 관리하는 정부기관, 감사원이 한다는데 어찌할 것인가?

그래서 힘있는 곳, 권력기관에 근무하려고 행정고시를 하는 것 아닌가? 이제야 깨달았지만 너무 늦었지 않은가?

(아무리 법의 적용이 그렇게 엄격하다해도, 우리 해태상사의 실정법상 잘못, 원자재 시중유출은 없지않느냐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 특히 재고조사 당시 단순확인하는 것이니 법적으로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으니 걱정말고 서명하라 하지않았느냐 하며 나는 끈질기게 감사원의 부당함을 오히려 문제삼고 감사원 본부로 쳐들어갔다. 감사원담당..연세대 행정학과 출신 70학번..나하고 통성명하며 서로의 직분에 대하여 충분히 존중하였다...을 찾아다니며 문제를 취하하라고 강하게 요구하였다. 그가 담당하는 감사현장까지 나는 쫓아다니며 ‘취하’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화살은 이미 활시위를 떠났으며 자기 손을 벗어났다는 것. 그러면서 비하인드스토리를 알려주는데, 해태상사 고위임원이 감사원에 괴씸죄에 걸렸다는 것. 수출용 잣을 해태상사가 수출대행해 주었는데 ‘잣’원자재를 수입한 회사가 그 원자재를 시중유출, 시세차액을 챙기고 도주해 버렸다는 것. 이의 확인서를 요구하였으나 해태상사 고위임원은 끝까지 확인서 서명을 거절했다는 것. 그 임원은 법률적 지식이 충분하고 사내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결코 서명하지 않앗다는 거. 서명하지 않은 채, ‘범죄혐의’만으로는 감사원도 어찌할 수가 없게 된 것이고, 따라서 유출된 ‘잣’은 고발되지 못했으나 오히려 죄가 없을수 있는 무고한 ‘땅콩’이 갑자기 ‘혐의’있음으로 검찰조사를 받게 되었다는 것....

이 점에 대해선 동년배로서 감사원담당으로서 개인적 미안함은 있지만 ‘법’적으로, 또 윗사람들과의 ‘괴씸죄’에 대해서는 실무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

감사원담당의 설명을 듣고, 나는 더욱더 허탈해지고 평정심을 잃게 되었다.

‘잣’수출대행을 한, 고형0 과장과 그 윗사람 우리의 박영0상무를 내가 왜 모르겠는가?

한동안 그 두사람과는 눈도 마주치지않고 말도 섞지 않았다.

열심히 일만한 순진한 과장 한사람을 자신들 보호를 위해서, 확인서에 사소한 실수로 서명한 것으로, 고생을 시키게 하다니, 인간적으로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끝내 나에게 사과를 하지않았지만, 무언으로 나에게 미안해 하였다. 지금까지 그들은 나에게 마음빚이 있음을 서로 알고 있다.)

 

나는 사표를 쓰고, 검찰.경찰조사에 당당하게 임했다.

1% 정도 원자재 부족으로 ‘수출미이행’으로 때리고, 형사입건 할 것인지 한번 따져보자고 하였다. 아무리 ‘법’이 엄혹해도 이정도 가지고는 ‘기소’할 수 없을 것으로 자체판단하였다.

회사는 법률고문단의 변호사를 가동하여 검찰.경찰의 조사에 조언해주었다. 서울시경 경제반의 담당형사가 몸소 회사로 출근하여 나의 조서를 받았다. 보통은 피의자인 내가 서울시경에 출석하여 심문조서를 꾸려야하나, 대기업에 대한 특혜였다. 개인 박동희라면 가당치도 않은, 특혜적 편의제공이었다. 재벌회사의 로비력이 이럴 때 숨은 힘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나는 전혀 압박감없이 조서작성에 임하였다. 형사가 혐의사항들에 대해서 ‘문’하고 혐의자인 내가 ‘답’하는 형식으로, 그들은 그것을 ‘조서’라 하였다. 학교에서는 배우지않는, 일반인들도 모르는 ‘법의 세계’의 초입이었다.

결국 감사원의 고발은 ‘혐의 없음’으로 종결되었다.

나는 혐의에서 해방되었고 나는 그날로 사표를 다시 내고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무력시위가 아니라 정말로 회사일에 재미를 잃었고, 땅콩수출사업에 갑자기 진절머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