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유한공전앞, 동신아파트로....‘왜 과천을 가지않고 가까운 곳, 새아파트로 갔을까?’
//다시 유한공전앞, 동신아파트로....‘왜 과천을 가지않고 가까운 곳, 새아파트로 갔을까?’
대흥주택에서 산지 얼마나 되었을까? 1년? 2년? 그리고나서 또, 대흥연립을 팔고 유한공전앞 역곡동신아프트 25평을 샀다. 나에게는 진짜 보금자리. 전셋집 구하러 다닐 필요도 없어졌고, 심야총알택시를 탈 필요도 없고...땅콩수출사업이 날로 바빠지자, 일본바이어와 함께 대전공단에 수출품검수하러 가든가 아니면 수출계약상담을 위해 일본현지출장을 가든가 하는데 역곡집은 나에게는 안정이었고 행복충만한 소시민가정집이었다.
(그런데, 왜, 친구들이 많이 몰려사는 과천으로 가지않고 그냥 가까운 곳 새아파트 ‘동신’으로 갔을까?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의 결정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았고 결코 실리적이지도 않았다. 우리가 새집을 좋아하였다? 아니면, 그것도 운명이었다? 그때 과천으로 갔다면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그러나 역곡에 머무르면서 경제적으로 한번 더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스스로 포기한 꼴이 되고 말았다. 방콕지사 근무후 본사 복귀때, 역곡아파트는 제자리걸음마를 하고 있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 식구가 서울로 재진입하는데 걸림돌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말하자면 선택의 길목에서 ‘운며의 끈’이 우리를 동신아파트로 이끌었다.)
(해태상사에서는 국내출장이든 해외출장이든, 출장경비정산하는 내규가 있다. 일당 얼마씩 출장경비를 정산해서 지급해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특정한 경비 몇을 제외하고는 내가 직접 지출하는 경비는 많지않다. 대부분, 대전출장의 경우, 해태산업에서...일본출장의 경우, 일본바이어가 내 경비 상당부분을 카바해준다. 내물을 쓴다는 것이 아니고 같은일을 같이 하게 되니, 지출되는 비용은 손님인 내가 내는 것이 아니고 접대하는 그들이 부담하게 되는 구조...출장을 보통 1주일 길게는 10일 정도...돌아오면 출장비정산이 고스란히 나의 호주머니로 들어온다..모두 우리집사람의 손으로 들어가고 그 돈으로 아이들 학원보내고 가장용돈에 충당했을 것이다. 내월급의 절반은 이미 어머님께 매달 송금해 나가버렸으니...세상은 참 재미있지않은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생긴다 하지않던가? 생각지않은 월급외 수입으로 우리집은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누구들처럼 업자들 등치고 삥땅쳐 얻은 돈은 아니니 고맙고 고마울 뿐이었다. 우리집사람은 남편인 내가 출장을 많이 가면 갈수록 역설적으로 좋아하였다. 부수입이 많이 들어왔으므로 하하하. 금호실업에 다닐때는 사업상 출장하는 경우도 교통비까지 내돈으로 써야했는데, 해태상사에서는 밥값.술값도 회사가 내주고 교통비까지 내주고...거기에 목돈으로 적지않게 출장비까지 보태주니...우리집사람왈, 금호때보다더 월급이 2배정도 많이들어오는 것같아요 하는 것이었다 하하하. 사람 인심이라니..돈앞에서 변화무쌍한 사람들 마음이라니...우리집사람도 어쩔 수 없는 평범한 아낙네였다. 돈많이 갔다주는 남편이 좋고 그 회사가 좋은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된다 하하하.)
그런데 하루는 광주넷째동생이 역곡동신아파트로 찾아왔다. 아직 변변한 직장이 없는 그는 광주에서 여러 사업을 한다고 바삐 돌아다녔다. 머리는 좋지만 배운 것이 나보다 훨 짧고 기술이 없으니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당구장을 새로이 하기로 하였고 자본이 많이 딸리니 셋째형이 조금 보태달라는 것.
어머니와 큰누나까지 합세해서 나에게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셋째형은 이제 새집까지 마련하고 살길이 편해졌으니 이젠 집안 동생들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
(이 대목에서 나와 우리집사람은 할말이 참 많고 또 많았다. 금호실업 첫월급부터 이날까지 월급의 50%를 집안살림하는데 보태왓는데 이제 더 이상 또 어떻게 더 하란 말이 정말 말이 되는가?
그동안 월급의 반을 시골어머님께 송금하느라 집사람은 옷같은 옷도 사입지못하고, 아이들은 배우고싶은 학원도 가지못했는데...그런 와중에 아끼고 또 아끼고 머리 굴려서 지금의 새집아파트를 서민아파트를 마련하게 되었는데 이제와서 또 은행빚을 내서라도 도와주라고? 우리살림은 어찌하고? 언제까지 집안살림 도와야하는데? 지금 내월급의 절반이 뚝 짤려내려가고 있잖아? 그위에 무엇을 더 하란말이느뇨? 제발, 쑥쑥 자라나는 어린나무인 나를 가만히 좀 놔두라. 크기도 전에 자꾸 손을 대면 나무가 자라다가 성장이 멈추게 된다. 왜 그걸 모르나...나 좀 더 크게 자라도록 좀 내버려두라응?)
화가치밀었지만 참고있는 나; 나는 더 이상 도와줄 수 없다. 지금도 월급의 반정도가 내려가고 있지않느냐?
억지부리는동생; 그래도 형은 살만하니, 아파트담보하여 당구장사업비좀 대주세요넹?
한번마음먹으면 그대로 고집통나; 절대로 안된다. 노노노~~~노노.
내가 안된다고 하니, 또 내가 월급의 반정도를 지금도 내려보내고 있다는 것은 가족 누구나 하는 현실이니 이를 부정할 수 없고, 그에 더해 은행빚을 얻어 보태라는 것은 그들도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더이상 진도가 나갈 수 없었다.
울면서 애걸복걸해도 나는 꿈쩍하지 않았다. 가족들 모두 함꺼번에 망할 수는 없었다. 나만이라도 생존해 있어야 우리가족의 장래가 그래도 기대되지 않겠는가?
성공이 담보되지않은 당구장사업에 나까지 함께 뛰어들 수는 없었다.
가족들은 나를 보고 독하고 또 독하다 하지만, 서울에서 살아남으려면 나모든 것을 가족들에게 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고 마누라가 있고 어린 두아들이 있는데 이들의 생활은 누가 꾸려나가야한단 말인가?
(우리집사람은 지금도 가끔 이야기한다. 우리남편 참말로 대단하다고...안되는 것은 끝까지 안된다고 하는 배짱, 심약해서 가족들 형편을 들어주면 어찌하나 걱정을 했는데 잘 버텨주더라고...아들들에게 조언한다. 친구에게나 친가족에게나, 사업자금은 빚내서 빌려주는 것 아니다. 여유가 있으면 그냥 빌려주고, 여유가 없으면 거기서 감정털고 끝내야한다고...사업이라는 것이 흥하고 망하고는 당사자 실력.운에 따르는데...확률상 거의 몇프로 수준에 그치고 종국에는 공동투자한 모두가 망하는 길이기 쉽기때문이다라고...)
셋째동생의 당구장사업을 간신히 뿌리치고나니, 이제는 막내동생이 우리집에 하숙하게 되었다.
광주전남대 4년학비를 책임졌는데 다시 서울대보건대학원에 응시하여 합격을 해놓고 셋째형에게 다시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얄밉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여, 큰소리로 야단을 쳐봤지만 어찌할 것인가 이미 물은 엎어진 것이고 서울대보건대학원은 이미 시작된 것인데...누구는 합격을 못하여 난리인데 우리는 합격을 했는데도 힘들었다.
나와 우리집사람은...막내동생이 졸업을 하면, 학비대주지않아도 되니 좀더 우리집경제에 여유가 생길 것이고 거기에 막내동생이 교사생활을 시작하면 어머님 빚도 일부 감당할 터이니, 내월급 반정도 송금하는 것은 그 절반으로 또 줄어들지않을까 내심 고대하고 기대하고 있던 차였는데 마른하늘에 웬날벼락이었다. 청천벽력이라더니 내 앞에 그것이 찾아왔다.
(밀어붙이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내 막내동생이 그러하였다. 셋째형 형편은 안중에 없고...셋째형은 큰회사에서 매우 잘나가고 있으니, 얼마든지 그는 대학원 가서 하고싶은 공부를 더 하겠다는 데 하등의 잘못이 보이지 않았던 것.
그도 어렵게 공부하였지만 결국은 보건대학원에서 박사학위까지 얻고, 승승장구 일이 술술 풀리더니 외국유학가지도 않았는데도, 방송통신대학교 교수직을 거머쥐게 되었다.
장하고 축하할 일이었다. 대단한 일이었다. 형으로서 내가 하지못한 대학교수를 그가 해냈으니 정말로 기쁘고 잘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데 우리집사람은 교수가 된 막내시동생이 전혀 달갑지않다.
어렵사리 박봉을쪼개어 학비를 도왔는데, 아들들 학원도 보내지못하고 도와줬는데..셋째형의 어려움은 생각하나없이 대학원에 가고, 또 역곡집에서 하숙뒷치다꺼리까지 시켰으니, 기본이 전혀 되지않았다는 것. 아직도 우리집사람은 막내시동생을 그리 크게 평가하지않는다. 나에게는 열심히 연구활동하고 그 틈을 내어 시민단체 활동까지 하는 그를 보면 대견하기 그지없다. 내가 하지못했던 일들을 하고 있으니 과거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웠을 때 생각하면 눈물날 정도지만 지금 이만큼 잘 해냈으니 참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에게도 운명인가? 전남대 사대를 나왔으니 평범한 고등교사를 할 수도 있었는데 박차고 어려운 서울생활을 시작하고 끝내는 대학교수가 되었으니...외국박사학위를 받지않고도 국립대 교수가 되었으니 그에게는 행운이라는 ‘운’이 따라다녔다고 해야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