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생각의 좌표2/홍세화....학습.선택과 집중.사형제도.반학문.서열 등
-학습;
‘지적 인종주의’
두뇌의 용량과 기능은 사람마다 다른데 오로지 문제풀이와 암기능력이 뒤떨어진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억압하는 인종주의와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학생을 평가할 때 감수성이나 사람됨에 대해선 거의 무시한다.
어린 학생들에게 등급과 석차를 매기는 것은 반인권적 폭력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과 ‘공부 못하는 학생’의 차이=시험 본 다음에 잊어버린 학생과 시험보기 전에 잊어버린 학생의 차이.
-선택과 집중;
왜 우리는 만점이 100점일까? 다른 나라들처럼 20점이나 10점이 아니고?
학생들에게 석차나 등급을 주지않고 합격/불합격 기준으로 절대평가만 하면 안되는 걸까?
10점이나 20점이 합격과 불합격을 가르는 기준이므로 그 이상의 점수를 받은 학생은 그 시험 영역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
그 이상을 얻은 학생은 그래서 책을 읽고 토론하고 연애하고 여행하고 자연과 벗한다.
그 과정에서 적성을 발견할 수 있고 적성에 맞아 흥미을 느끼는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 ‘선택과 집중’이 가능하다.
우리 학생들은 88점이 아니라 99점, 심지어 100점을 받아도 그 시험 영역을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한다. 한 등수라도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학생이 모든 과목의 모든 시험영역에서 끝까지 해방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자발성. 능동성을 기대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자기 적성을 찾을 수도 없다. 설령 찾는다해도 모든 과목에서 일등을 해야 하므로 자기 적성과 관련된 과목에 집중할 수도 없다. ‘선택과 집중’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을 이해하고 사회를 보는 눈 뜨기를 위한 학문인 인문사회과학에는 원래 정답이 없다. 정밀과학인 수학이나 자연과학과 다른 점이다.
가령, ‘사형제도는 폐지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폐지되어야 한다’도 정답이 아니고 ‘아니다. 존치되어야 한다’도 정답이 아니다. 다만, 각 자의 견해가 있을 뿐이고, 그 견해가 얼마나 풍요로운지, 나름대로 정교한 논거를 갖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이처럼 인문사회과학은 생각과 논리를 요구하는, 정답이 없는 학문인데도, 학생들을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우도록 요구하며 ‘반학문’으로 왜곡시키고 말았다.
학생들에게 생각과 논리를 물어서는 일등부터 꼴등까지 정확하게 줄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인간과 사회, 사물과 현상에 관해 묻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자기생각과 논리를 갖도록 요구하는 대신 객관적 사실에 관해 암기하도록 요구할 뿐이다. 생각과 논리의 학문을 암기과목으로 바꾼 것이다.
-사형제도;
사람이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인다.
전쟁과 사형제도는 합법적 살인에 속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사형제도는 전쟁만큼 역사가 길다.
죄의 대가를 치르라고 개인을 죽이든, 전쟁의 이름으로 적대 집단을 죽이든, 사형제도와 전쟁은 합법의 탈을 쓰고 행해진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인다는 사실에 경악하지 못하는 인간이성은, 합법적으로 사람을 집단적으로 죽이는 전쟁에 경악하지 못하는 인간이성이다.
사형제도 존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가해자의 인권만 생각하지 말고 피해자의 인권도 생각하라고 말한다.
과연 가해자를 죽임으로써 피해자의 인권을 보듬을 수 있을까?
우리들의 심성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복수를 통해 마음이 편해지도록 훈육된 탓이 아닐까?
또 사형제도가 끔찍한 범죄를 줄여주는 효과가 있을까?
재범의 위험은 종신형을 현실화하는 방법으로 막을 수 있다. 행형편의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사형제도에 찬성하는 사람은 대개 낙태에 반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거꾸로 반대하는 사람은 낙태에 대해서는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다.
이 모순은 결국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범죄행위를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는가, 아니면 사회의 책임도 고려해야 하는가?
나라마다 극우파들이 사형제도 존치에 집착하는 공통점을 보이는 것도 개인의 탓만을 강조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사형제도가 개인의 책임만을 물어 사회에서 제거함으로써 그 범죄를 낳게 한 사회의 책임까지 없애려 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할 것이다.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느 사람을 정확하게 한다.’
-반학문;
L로 시작되는 단어 중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단어는?
사랑Love, 자유Liverty 그리고 노동Labor.
우리 학생들에게 노동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노동이란 육체노동, 공장노동으 뜻하고 그래서 ‘하지 않은 게 좋은 것’으로 인식하는 수준에 가깝다. 대부분 노동자가 될 학생들이 일찍부터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남다른 교육자본을 형성하여 사회 상층을 차지한 사람들은 인간과 사회를 보는 눈뜨기라는 점에서 볼 때, 올바른 생각, 풍요로우면서도 정교한 생각을 검증받은 게 아니다.
오로지 암기와 문제풀이를 잘 해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질문을 던질 줄 모르고 오직 객관적 사실에 대한 암기에서 뛰어나다는 점은 그들이 기존체계를 지키는 가치관과 이념으로 무장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들의 지배를 받는 사회구성원들에게 비판능력을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이 의식세계에는 지배세력이 기획, 의도하여 암기하도록 한, 세뇌시킨 것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회의하지 않고 고집하기 때문에 지배세력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 관철되는 것이다.
이것이 ‘미친 교육’의 실상이다. 즉, 이것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부하면서도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는 자기 생각과 논리가 없어 지배세력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사회구성원을 양산하는.
우리 사회 젊은이들은 대부분은 물질적 이해관계에서는 영리한 편이지만, 인간과 사회, 사물과 현상에 대해서는 거의 무뇌아 수준이다. 공부시간은 세계 최장인데도 결과가 이렇다.
우리학생들이 인간을 이해하고 사회르 보는 눈을 뜨는 데에는 부적합한 DNA를 타고 날 것일까? 학생들을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라는, 서열화된 대학의 요구에 따라 인문사회과학을 ‘반학문’md로 만든 결과다.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뜨는 만큼 자아의 세계가 확장된다. 학생들에게 인간과 사회에 대해 자기 생각과 논리를 갖게 해야 한다. 학생들은 사물과 현상에 대해 자기생각과 논리를 펼때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서열;
한국 교육의 일상이 집단광란 상태에 빠진지 오래다. 집단의 일상이 돼버렸기 때문에 광란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의 학벌체계는 현대판 신분제다.
출생시점이 아닌 만 18세에 서열이 매겨진다는 점에서 과거 신분제와 다르지만 여기에 의미심장한 함정이 있다. 겉보기엔 경쟁시험에의해 서열이 매겨지기 때문에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신분상승의 기회가 열려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그러나,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은 지났다. 지난 시절에는 일제가 망하고 분단과 전쟁을 겪으면서 사회상층에 빈 자리가 생긴 데다 경제규모가 커져 그런 자리가 많이 늘었다.
서민출신이 들어갈 틈새가 컸던 것이다.
지금은 그 자리들이 이미 채워졌다. 또한 ‘고용없는 성장’ 시대가 말해주듯이 사회상층의 자리뿐만 아니라 ‘괜찮은’ 자리도 줄고 있다.
이처럼 병목현상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엄청난 사교육비를 쳐들이는 부유층을 서민출신이 따라잡아 용이 될 가능성은 로또 복권에 당첨될 확률밖에 안 된다. 한국의 교육과정은 이미 사회계층의 단순재생산을 합리화해주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인권의식도 연대의식도 기대할 수 없는 학벌 경쟁은 소수의 경쟁승리자들이 누리는 부와 지위와 권력을 더욱 강고히 하기 위한 것 이외의 목적을 찾을 수 없다.
학벌체계가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강요하는 입시지옥은 경쟁에서 낙오하거나 패배한 구성원들에게 사회적 차별을 받아들이도록 작용한다.
학벌경쟁에서 승리한 자들은 그 보상으로 특권의식을 갖는 한편, 패배한 자들은 신분귀족화한 사회상층에 대한 견제의식을 갖지 못한다.
과거 신분제에선 그나마 기대할 수 있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한국의 사회상층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이긴 자와 패배한 자 모두 학벌 경쟁에서 이긴 자들이 누리는 지위, 명예, 권력과 부를 당연한 보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교육비 지출은 투자로 인식된다. 경쟁 승리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투자에 대한 당연한 보상으로 여긴다.
엘리트들에게서 사회환원 의식이나 사회적 책임의식을 찾기 어려운 대신 특권의식과 집단 이기주의로 무장한 패거리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학벌체제는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평생 교육을 멀리 하게 한다. 만 18세에 인생의 서열이 거의 정해졌기 때문에 그 이후에 공부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사회구성원은 일생 동안 기껏해야 두 번 공부한다. 대학입시를 위해 한 번, 임용이나 취직하기 위해 한 번. 남과 벌이는 경쟁에서 이기려고 두 번 긴장할 뿐, 자기성숙을 위한 모색과 긴장은 거의 죽은 사회다. 대학 도서관마다 학문을 연구하는 학생이 아니라 고시생들로 넘쳐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자기 서열을 뛰어넘는 길이 고시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에서나 엘리트층은 형성되기 마련이다. 중요한 점은 그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능력과 사회적 책임의식이 있는가에 있다.
한국의 엘리트층이 엘리트로서 가져야 할 능력도 부족하고, 사회적 책임의식도 없다는 것은 온 국민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는 광란 상태의 교육현실을 외면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대학평준화라는 말에서 하향평준화를 떠올리는 사람, 대학평준화가 현실성이 없다도 말하는 사람은 개구리의 시각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서열화된 대학에 입학하면서 경쟁이 거의 마감되는 구조와, 평준화된 대학에 입학하면서 경쟁이 시작되는 구조 중에, 어느 쪽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까? 국가경쟁력을 위해서도 사회구성원들을 대학간판의 억압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사회구성원들이 공정한 경재의 규칙 아래 남과의 경쟁만이 아니라 자기와 부단히 싸우면서 성숙의 길을 모색할 때, 그 과정과 결과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구조가 될 때 국가경쟁력을 얻을 수 있고 민도른 높여 문화국가의 지평을 열 수 있는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