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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지리산종주기(2)......밤기차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2. 19. 21:54

9.19.월.

21;50

용산역

출발 1시간전...

밤기차의 특별한 열기는 어디로?

아무리 눈을 비비고 둘러보아도, 여기저기 냄새를 맡아봐도 내가 추억하는 밤기차열기는 거기에 없다.

아득하고

아련하고

또 아스라한,

멀리 있다가도 어느사이 가까이 내 주변으로 다가와서 서성거릴것만 같은,

그 밤기차는 없다.

대신

여기저기 곳곳

등산복차림들 울긋불긋

소리쳐 인사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진다.

껴안기도 하고 웃음소리도 크다.

언제 우리네 여인들이 이렇게 호방해졌는가

어느 등산동호회모임일듯한데 늦은밤의 공기속 더욱 우렁차고 자신만만하게 들려온다.

방자하다해도 좋을만큼 거침이 없다.

우리가 과히 여인들의 천국에 살고있음을 다시 일깨워주고 있다.

아스라한 추억이 사라진 자리, 여인들의 ‘방자함’이 틈입해서일까

모처럼 옛추억을 되살려 만나려한 내가 초라하다.

왠지 나는 외딴섬이 되어 저멀리 혼자 외톨이...

그들이 차려입은 등산행장마저 잘짜여져있는듯 뚜렷이 좋아보이고 왠지 나의 것은 엉성허술해보인다.

제대로 준비가 된 것인가 불현듯 걱정이다.

지팡이를 넣지않았고 면장갑도 챙기지못하고....

또 무엇을 챙기지 않았을꼬?

준비부족 철저하지못함까지 ‘고행’을 위한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우연히도 오늘 어느 책소개 기사에서 만난 니체;

‘큰수확, 큰 즐거움을 바라는가? 위험을 즐겨라! 베수비오산 기슭에 너의 도시를 만들어라’

‘고행’ 깃발을 들고 지리산종주를 한다고 내가 곧 니체가 될 수는 없으리.

한계상황속 가쁜숨속에 내마음속 탐.진.치 삼독 살짝 조금만이라도 떨쳐내는 길이 거기 어디 있을까 찾아낼 수 있을까

서두르지말고

힘닿는대로

천천히 또 천천히

자연을 호흡하며 자연과 함께

다리에 쥐만 나오지않는다면

무릎이 엄살만 부리지않는다면

편안함을 멀리

불편함을 가까이

고통을 친구삼아 지리산종주해보자!

환갑이란 글자뜻 그대로 '다시 돌아온 것'이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할 것이니 새롭게 다시 시작해도 된다는 것 아닌가

 

용산역 대합실은 현대식으로 잘 꾸며놓았다는데 무엇인가 부족하였다.

어딘가 허전하였다.

어쩐지 편하지않았다.

옛날 시끌벅쩍 시큼시큼 어수선하고 털털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않으니 씁쓸하였다.

그때가 그냥 마냥 그리웠다.

밤기차는 정시에 출발하였다.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였다.

소리내지않고 달렸다.

그러나, 내 머릿속으로는 기적소리 들렸다.

소리내며 달려나갔다.

칙칙~~

칙칙~~

폭폭~~

폭~폭~폭폭폭~~~~~~~

69년 어느 눈내리는 겨울밤

맨처음 상경길

다음날 새벽 서울역은 너무 추웠다.

장학금 꿈이 아무 이유도없이 사라져버렸다.

72년 어느 여름밤

무작정 밤기차를 탔다.

한손엔 등록금고지서를 또다른손엔 휴학계를...

기차난간에서 어둠속 현실을 들여다보았다.

77년 7월7일 오후 7시

행운이 겹치는날, 운명이 실려가고 있었다.

그 밤기차가 오늘 지금 떠나고 있었다.

22;45

여수행 무궁화호

5호차 7호석

What a nice surprise!

생각지않은 친구였다.

엉겁결로 잡음으로 소음으로 잘 들리지않았지만...

참 반가웠다.

지리산종주 시작이 참 좋앗다 무슨 좋은일의 시그널일까

한강다리

한강철교

그래 한강이 발아래라.

곧 영등포 22;55

영등포역에서 사람들이 많이 탔다.

5호차 3호석 창측으로 자리를 옮겼다.

맨 앞자리

바로 출입구와 맞닿아있지만 혼자여서 좋다.

출입문벽면;

‘웃음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행복한 이야기가 가득한 곳 코레일유통‘

진부한 표현의 광고

웃음꽃?

벌써 내게 말하고 잇는가?

‘그대 웃음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지리산종주 끝에...’

초저녁인데도 춥다.

털조끼 꺼내입고 등산점퍼 무릎에 덮고

그러나 답답하여 양말은 벗고

잠맞을 준비를 한다.

차창에 어리는 얼굴

엄숙할 수도 센치에 질수도 들떠있을 수도 없는

설레임반 두려움반의 맨얼굴

짓궂게

인증샷 하나 날려놓자.

찰칵.

열차가 속도를 내는지 흔들린다.

잠이 올까?

오면 오는대로 아니오면 아니오는대로

자연흐름 내몸 흐름대로 따르고 내맡기자

고통=행복?

고통의 크기= 즐거움의 크기?

고통의 총합은 즐거움의 총합과 같다?

‘고행’을 경험할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

새로운 만남

새로운 경험

‘고행’

그는 누구일까

어떤 얼굴을 하고있을까

23;20

수원역

나의 운명이 멈췄던 곳

나의 숙명이 지나갔던 곳

‘수원’

누구는 그 이름이 참 좋다 하였다.

그때 나에게는 그것뿐이었다.

허상의 이상과 실상의 현실은 그때는 보이지않았다.

그냥 순수함이 좋을 뿐이었다.

‘수원’이 고난의 시작이었고 고난의 다른말이었음을 곧 알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또 축복의 또다른말이 될수있음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신의 장난이 아니고, 신이 내리는 고도의 축복 아니면 나의 운명이었다.

그때와 지금

40년전과 지금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무궁화호는 무슨일이 있엇느냐는듯이 그때처럼 무심하게 달리고만 있다.

무궁화호=완행=행복?

멈추는 곳이 많으니

쉬고 또 쉬니...

운명실은, 고통실은, 축복실은 밤기차는

어둠의 장막속을 달리고 또 달리고...

차창밖 어둠속에서 그대 무엇을 찾는가?

옛추억을?

옛여학생들을?

옛꿈을?

그 ‘수원’은 어둠속으로 재빨리 저멀리 사라져간다.

나의 옛꿈이 사라지고 새꿈이 오는 것이지....

새꿈 새길이...

다시 웃음소리

5호차는 등산객전용열차?

5호차는 여인들 전세열차?

5호차는 여인천하?

용산대합실 여인네들이 모두 5호차로 몰려들었는가?

'밤의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방자하게 요란하게....

차창밖 하늘에는 상현달 아니 하현달이 떠있었다.

추석9.12 음8.15/오늘9.19 음8.22.. 그러니까 하현달!

23;51

천안

하늘아래 가장 편안한 곳=천안삼거리

‘천안삼거리흥흥 능수버들 늘어진 가지에....흐흥흐흥...’

우린 노랫말 속 숨어있는 '자유평등'을 들춰내고 히히덕거렸었다.

철부지 그 어리던 시절에...

그래 하늘아래 이곳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 제일 편안곳이 그곳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더욱 더 맞는 말이었다.

밤기차가 ‘천안삼거리’를 아느냐고 묻고는 금방 지나가버렸다.

비몽사몽 사이

뒷머리를 누군가 지근지근 눌러대고 있었다.

깨어보니 전주.

날이 바뀌어

9.20.화.

02;03

남이 잘되는 것은 참아도 배고픔을 참지못하는 놈

김밥을 꺼내 오물오물

어둠속 차창에 비친 모습이 심오해보인다.

새벽 배곪이 없어지고 김밥맛이 유별나게 좋다.

새벽추위가 더 기승을 부리니 배낭속 이옷저옷을 더 꺼내 무릎과 어깨위에 걸쳐도

으스스한 으스스함은 그대로 남아있다.

건너편 자리의 어느 등산객이 갑자기 말을 건넨다.

‘누구냐?’하여...

‘지리산종주 처음가는 초보다!’하였더니...

위아래를 훑고는 그는 18인의 산악동호회 소속이라 거침없이 내뱉는다.

나도 ‘누드’스럽게 하고 싶어졌다.

18?

열여덟?

씨팔!

와중에 ‘뒤큰일’이 왔다.

큰일 지리산종주를 앞에두고 ‘뒤큰일’이 오다니 마음은 아직 편안한 것이려니...

전혀 긴장을 하지않는단 말이징?

밤기차속 화장실속 ‘큰일’

처음에는 쑥스럽던지 머뭇머뭇 그러나 볼일은 봐야했던지

달리는 밤기차에 곧 실려나갔다.

앞으로 앞길이 훤하게 시원스레 트인다는 것 아니겠는가.

화장실 가며오며 차속을 들여다보아하니

온통 등산객 차지인데 남녀가 함께 뒤엉켜 있기도 하고

그 잠자는 모습이 과연 가관이로세

세상은 뒤죽박죽

얼키고 설켜서 살아가는 것

사는 것 잠자는 모양을 따져서 무엇하리

‘오수’를 지나고 남원을 향해 돌진하고있으니

곧 구례구인가

구례구역

9.20.화.

03;20

아직은 희끗한 어둠속

시골기차역

새벽이어서일까? 잔잔하기만하다.

그리고 춥지않다.

등산객옷차림만 우왕좌왕 서성댄다.

그래 전진기지일뿐 다른 것이 아니다.

택시기사들의 호객이 요란하다.

성삼재 만원이요 만원!

성삼재까지 지금 바로 가자면 1만원만 내라는 것.

빨리빨리 지리산 보고싶은자를 위한 택시합승이 마련되어있었다.

나는 또 완행으로...

때맞춰 버스 하나가 기다리고있었다.

10여분만에 구례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주고 거기서 새벽 4시출발하고, 화엄사 경유 성삼재에 4시30분도착하는,

지리산산행에 더없이 좋은 맞춤형 버스써비스였다.

새벽 3시30분

구례버스터미널

성삼재행 버스(구례구역에서 타고온 버스가 성삼재까지 그대로 간다)가 4시에 출발하니 30여분 남아돌았다.

‘해장국합니다’

구례버스터미널 앞 식당의 불빛간판이 해장국 유혹을 한다.

잠시 갈등을 하지만....

기차속에서 이미 김밥을 먹었으니 또 해장국을 뱃속으로 집어넣으면...

'고행'은 어디로 갈 것인가?

참자참자.

막커피 한잔이 간절한데...

‘고행’하기로 하였으니...또 참아야지...

그러는사이 옆에서 누군가 ‘달무리 떴어요’한다.

하늘을 보니 정말 달무리가 으젓하게 떠있다.

시골 울엄니는 말씀하셨다.

'달무리가 둘러치면 좋은 일이 생겨야. 풍년이 들고 귀인이 오고... 소원이 이루어진단다'

보름달은 아니지만 하현달도 떠있고 달무리까지 둘러쳐있고 별까지 총총하니 그래 내가 지금 별천지에 와있구나싶었다.

'별의 숫자 별의 밝기는 문명과 반비례한다'

서울에서는 쉬이 보이지않던 별들이 지리산기슭 새벽에 내눈속으로 쏟아져 들어왓다.

별천지

정말 별천지가 틀림없었다.

이곳은 아직 ‘미개’하여 '자연'이니 곧 별천지가 예 아니요! 하고있었다.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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