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상사에서...일본땅콩수출사업 시작; ‘그는 나에게 돈봉투를 내밀었다’
/해태상사에서...일본땅콩수출사업 시작; ‘그는 나에게 돈봉투를 내밀었다’
1980년 12월말 어느 날, 년말 해태상사 송년식 자리.
나는 화장실에서 피땅콩(껍질을 깐, 알땅콩이 아닌, 껍질이 있는 땅콩) 샘플을 씻고 있었다.
회사 송년식이 열리고 있는 사이에 나는 모임에 참석하지않고 수출용피땅콩견본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었다.(조치원 소재 땅콩 수집상에게서 넘겨받은 샘플이었다.)
일본수입업자들이 한국산 피땅콩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를 볶아서 일본에 수출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국내땅콩 수요가 우리나라 한국보다 훨씬 많은데 특히 우리의 대보름에 해당하는 ‘절분’에 맞추어 볶음피땅콩 수입하였는데 늦어도 1월에는 선적을 해야 그 수요에 맞출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회사송년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채 마지막 견본의 품질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본 땅콩수출사업의 성격상, 기술적인 문제를 더 부연설명하자면, 원료땅콩은 중공땅콩을 홍콩무역상을 경유하여 수입하고, 다시 그 수입땅콩을 해태산업오징어땅콩공장에서 볶음가공하여 일본에 수출하는 것...문제는, 수입땅콩 대신 일본국내산 피땅콩과 거의 비슷한, 국내산 피땅콩을 볶음가공수출하고, 수입땅콩은 국내탈각공장에서 탈각하여 해태산업의 오징어땅콩 원료로 대체사용하는 프로세스...오징어땅콩의 동글동글한 균일한 규격이 절대적인데 이에 맞는 원료피땅콩으로 중공산을 수입대체하는 것. 엄밀하게 말하자면, 수입산과 국내산을 대체해서 수출하는 것이므로 실정법상 절대적으로 적법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때는 법적인 문제를 고려할 여유도 없이 그냥 가공수출을 하는 것만으로 ‘큰문제없이 괜찮다’고 밀어붙인 것이었다...후일, 감사원의 수출용 원자재 수입량 재고조사 때, 감사원의 지적사항이 되었다(후술)
(절차상 법적인 문제를 떠나면, 당시 ‘가공수출무역사업’의 전형적인 본보기가 되었다.
원료를 수입하고, 국내에서 가공하여 수출가득액을 높여,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
그 과정에서 원료를 잘 가공하여 ‘기술소득분’을 관세환급을 받아 영업이익을 한단계 높이기까지 할 수 있으니, 꿩먹고 알먹고의 사업이었다.
거기에 해태그룹의 경우, 해태산업의 부실주류사업의 손실을 ‘오징어땅콩’의 수익으로 상쇄시키기까지 할 수 있었으니 또 ‘꿩먹고 알먹고’가 되는 것이니, 해태그룹입장에서는 남고 또 남는 사업이 되었다. 더하여, 오징어땅콩 원료에 딱 알맞은 균일한 규격싸이즈의 중공산땅콩을 오징어땅콩제품에 쓰이니, 국내오징어땅콩제품의 후발주자인 해태산업으로서는 또 ‘꿩먹고 알먹고’가 되었다. 소위 시쳇말로 ‘따.따.따.’의 사업.)
(해태산업은 오징어땅콩 공장을 주류생산공장과는 별도로, 그러나 자체공장을 설립하지않고, 대신에 대전산업공단의 제일제침을 임대하여 시작하였다. 초기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본땅콩수출이 본궤도에 들어서면서 양질의 원료땅콩과 기술소득분의 추가이익까지 더해지니 날로 번창하게 되었다....몇년후 3년후? 나중에 청주에 최신식 스낵공장을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오징어땅콩사업등을 펼치게 되었다.)
(나는 해태상사의 ‘스타’가 되었다. 중공산땅콩을 수입하고...그때는 중공과의 직교역이 불가능하여 홍콩무역상을 통하여 거래하였지만 중공산원료를 수입한다는 자체가 ‘큰뉴스’가 되었고...거기에 그 땅콩을 우리의 공장에서 가공하여 기술소득분을 추가로 챙기고, 거기에 또 일본에 가공수출까지 하는 것이니, 거기에 또 ‘오징어땅콩’원료로까지 쓰이게 되는 것이었으니...해태상사내에서 그리고 해태그룹의 해태산업에서까지, 해태상사의 박대리 곧 박과장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거기에 또 일본말까지 유창하니 떠오르는 뉴스타였다.
덕분으로, 나는 승승장구하였다. 80년 4월1일 3년차 사원 입사, 81년 1월1일 대리, 83년 1월1일 과장...85년 곡물과장으로 전보, 사료사업개발과 태국산농산물사업총괄, 86년 차장으로 승진하여 86년 10월 방콕지사장으로..)
에피소드 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아나? 도처에 운명이다!!
앞서 송년식에도 참석하지못하고 화장실에서 땅콩샘플을 씻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날 나는 국내땅콩수집상과 함께 조치원의 원료선별공장을 방문하여 피땅콩선별과정과 원료콩 품질을 확인하였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속에서, 그 수집상은 나에게 흰봉투하나를 건내지 않은가!
나는 순간적으로 즉각 거부하였다.
나; 최 00 사장님, 이러시면 아니됩니다. 노.노.노~~~~
최; 받아두세요요요요요
나;노노~~~~~~~노!!!!
나의 성격상, 절대로 용납되는 일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받을 수가 없었다.
(최사장은 나의 얼굴을 봤는지 더 이상 가망없다고 판단했는지 봉투를 거두어들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우리부서 박영0부장의 절친의 절친이었다. 그때 내가 그의 봉투를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박부장은 나를 어떻게 다루었을까? 어찌된 노릇인지, 박부장은 훗날, 내가 하는 일에 일체의 간섭도 하지않았으며,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는 토를 달지않고 무조건 결재해 주었다. 그 돈봉투사건으로 나를 믿은 것일까?)
(솔직히, 나도 그 봉투를 거절하고나서는, 한편으로는 나도 봉투를 못이기듯 받을 걸 그랬나? 하고 잠시 흔들리기도 하였다. 곧 절래절래 머리를 저었지만...돈의 유혹이 잠깐 내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다시 나갔다. 나는 이겨냈던 것. 그걸 냉큼 받아챙겼다면? 나의 앞날은 어떻게 되었을까? 돈과의 운명적 첫만남! 나는 그걸 멋지게 거절하였던 것. 앞으로 나의 운명은?)
나는 본능적으로 업자의 돈봉투를 거절하였지만, 사실 영업부서의 직원들은 업자들과 그렇고 그렇게 상부상조하기 마련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꿋꿋이 나의 본능적인 거부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자랐는데 어찌 달리 업자와 타협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도 나는 아들들에게 가끔 조언한다. ‘업자들하고는 여자있는 술집에 절대로 가지말라.’ ‘업자의 돈은 받으면 안된다. 공짜 점심은 없다...’)
물론, 영업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나도 사회의 관행을 절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수 없다고 하듯이, 업자를 너무 경계하기 시작하면 사업을 펼쳐나가기 쉽지않으므로, 크게 잘못되지 않는 선에서 가끔 업자의 편의를 받아주기도 하였다. 그 경우라도, 나는 아무에게나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고, 정말 믿을 수 있는 거래선에 한정지었고 부하들과 내용을 공유하는 선에서 타협아닌 타협을 하였다...거래선 관리에 대해서는 또 ‘후술’ ‘나는 보험.선박.운송회사등 비교적.상대적.사회적약자 협력업체로부터는 단 한푼도 요구하지않았다. 오히려 ’일‘만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혹자는 이를 ’이상한‘친구라고 하였지만 나는 ’대원칙‘을 고집하였고 그래도 보란 듯이 승승장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