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상사에서, 또다른 운명적 만남;‘그는 나에게 젊은 사람이 패기가 없다고 하였다’
/해태상사에서, 또다른 작은 운명과의 만남;‘그는 나에게 젊은 사람이 패기가 없다고 하였다’
나1; 운동을 오랫동안 하지않다가 갑자기 격한 축구를 하니 다리에 쥐가 나서 더이상 뛰지못한 것인데..이를 두고 '패기가 없다?'
나2; 국가에서 징집하는 동원예비군훈련을 가지말고, 회사축구시합에 참석하지않는다고, '경력신입사원이 군기가 빠졌다?'
나1+2; 나는 도처히 우리부장의 강압적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누구한테도 절대로 지고는 못사는 두 사람, 나와 그의 운명적 만남이었고 피할 수 없는 필연적 충돌이었다.
예비군 동원훈련과 부서대항 축구시합;
나의 자기소개서에는 당연히 축구와 달리기를 남보다 잘 한다고 쓰여져있다.
(서울대출신인 내가 축구와 달리기를 잘한다고 하면, 그냥 보기로는 전혀 운동을 잘할 것같지않은데 ‘특기’라고 하니, 모든사람들이 언제나 의아해 하는데 그것은 정말 사실이다.)
해태상사의 근무분위기는 매우 온화하였다. 매우 가정적이었다. 모기업인 해태제과의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와서인지 어느 의미로는 회사같지않았다.
사원복지제도가 매우 좋았고 무엇보다도 급여와 수당이 만만치않았다.
금호실업에서 받았던 급여와 수당에 비해서 훨훨씬씬 많았다. 우리집사람의 표현으로는 거의 2배수준?
거기에 교통비.접대비등 업무와 관련해서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청구하라 하였다.
(아이스크림.껌등 제과사업이 생각보다 수익성이 좋고 커져나가는 사업이어서 모기업의 재정이 탄탄한 이유였다. 그래서 우수한 경력사원을 채용하여 종합상사를 신설하여 날로 커져가는 해외사업의 창구역할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리...)
가족같은 분위기라 하였는데...
오후 6시만 되면 잔업이 있는 직원들은 일을 하고, 특별한 일이 없는 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여가선용을 하기도 하고...내가 근무했던 금호실업도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않은 회사였지만 해태상사는 더 훈훈하였다.
토요일이 되면 사내모임으로 등산가기도 하고 부서대항 친목운동경기를 하기도 하였다.
우리부의 부장과 인사부서의 부장은 토요일만 되면 부서대항 축구시합을 하고 있었다.
내가 속해있던 부서는 인사부서를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다한다.
그런데 ‘축구’ 잘한다는 내가 들어왔으므로 당장 다음주 토요일에 한판붙자고 도전하게 되었다. 시내 경복고등학교운동장을 빌려서 대망의 설욕전을 펼치게 되었는데...
‘축구’를 잘한다는 내가 전반전 뛰는 도중 ‘더이상 뛰지못하겠다’하며 퇴장을 하고 말았다. 다리에 쥐가 났으니 어찌할 것인가?(그동안, 한동안, 전혀 운동을 하지않다가 갑자기 격렬한 몸싸움을 하는 축구를 하였으니 내 다리가 놀래고또 놀랜 것. 당연히 쥐가 날 수도 있는 것.)
그날도 패배한 우리부서는 특히 우리부장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성질을 참지못하고 안절부절. 회식자리에서 어찌나 나를 까대는지 차마 그대로 듣고 있지못할 정도가 되었다. ‘젊은놈이 패기가 없다’‘새로온 직원이 전혀 어울리려 하지않는다’는 둥 온갖 비난을 퍼부어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참고 또 참고 있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거 어디 무서워서 회사 다닐 수 있겠는가?’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오려하였다. 주변 여기저기서 말려서 간신히 수습이 되엇지만 저런 고약한 부장과 함께 근무를 해야하다니 앞일이 암담하게 느껴졌다.
회식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부서직원들 모두를 자기집으로 몰고가 밤내 술을 먹으면서 그날의 패배를 되새겨나가는 것이었다. 술을 잘하지못하는 나는 정말 앞날이 갑갑해졌다.
그리고나서 며칠뒤, 다시 우리부장은 인사부서장에게 도전장을 다시 내밀었다. 다음주 토요일 다시 한번 붙자.
그런데 이일을 어찌하랴. 내게는 동원예비군 훈련통지서가 나왔지 않은가? 그때 동원훈련은 1박2일인가 입소하여 훈련을 받았다. 동원훈련입소를 해야하니 내가 축구시합에 참가하지못하는 것은 필연지사.(큰회사는 그때 직장예비군이 있었으나 나는 금호실업 퇴사하고 세운상가의 신설회사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아직 해태상사 입사전이어서, 직장예비군에 편성되지않고 지역예비군이었고, 동원훈련이 나오면 지역예비중대의 명령에 따라야했다.)
우리부장은 나에게 다짜고짜 동원훈련 가지말고 축구시합에 반드시 참가하라는 것.
나;‘어떻게 동원훈련을 빼먹고 축구시합에 참가하느냐?’
우리부장; ‘이유대지말고 무조건 참가하라!’ 쏘아붙이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나;???? .....@@@@
나는 동원훈련에 참가하였고 우리부서는 또 졌다.
우리부장은 또 도전하였다.
나는 이제 동원훈련 때문에 빠지지않았고, 또 다리에 쥐가 나지않았으며, 드디어 우리부서가 인사부서를 이겼다.
우리부장 그는 더 이상 나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지않았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일본땅콩수출사업을 맡겼다. 전임자인 서강대무역학과출신 김영0이 부장과 싸우고 사표를 냈으므로 후임이 필요했고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김영0은 서강대 무역학과 70학번인데.. 그 부장과 여러번 다투었던 모양이었다. 나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과는 조금 결이 다르긴 하지만, 그는 회사를 떠나게 되었고 그 자리가 나에게 넘어왔다...)
나는 이를 운명이라고 또 부른다. 그 고약한 부장과의 만남도 하나의 운명이었다면, 일본땅콩수출사업이 나에게 넘어온 인연도 또하나의 작은 운명이었다.
어찌된 노릇인지 땅콩수출사업을 나에게 맡기고 나서는 우리부장은 나에게 일체의 간섭을 하지않고 내가 하는대로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한편으로는 자유방임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나의 개성특성을 미리 간파한 고도의 전략이었을 것이었다. 남의 간섭을 죽어도 받아드리지못하는 나에게, 그는 차라리 간섭을 하느니 그대로 놔두면 내가 알아서 책임지고 일을 할 것이라는 나에 대한 믿음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 부장과 나는 축구와의 대면이후 여러 굴곡 끝에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잠깐, 나의 성격형성 과정을 이야기하고 넘어가야겠다...어린나이에 일찍 부모곁을 떠나 광주유학.자취생활을 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주변눈치를 보면서 자라게되었다. 광주의 낯선도회지에서 경쟁에서 지지않고 살아남아야하니, 생각을 우선 많이하면서 완벽해야만 하게 되었을 것이다...행동먼저보다 사고먼저..전형적인 먹물모범생패턴.스타일이 형성되기시작한 것. 거기에는 소심함이 따라다녔다. 행동이 꿈뜰수밖에 없게 디었다. 다행히 공부를 최상위로 잘하게 되었고 그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범생스타일이 되었다...그러나, 남보다 항상 우월.우수하다는 자존심은 대학진학을 비인기대학인 '농대'를 선택하면서 성격이 심하게 뒤틀리게 되었다. 사회적 환대가 있는 '의대'나 '법대'가 아닌, 사회적 냉대 심지어 모멸감까지 동반하는 '힘없는 농대'가 겪는 불합리한 현실사회는, 급기야 반체제.과격함이 자라났고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비난을 상습적으로 몰고왔다...여기서도 완벽주의는 언제나 필요했고 그래서 우선행동보다는 우선생각하는 것이 몸에 배었다. 기존의 소심함까지 겹치니 자연적ㅇ로 나는 행동우선보다는 논리추구형이 되어갓다...'뛰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나서 뛰었다고 할까?'
군대에 가서 나의 성격이 많이 변하긴하였지만 크게 바뀌지는 않았던 모양. 군대에서는 몽둥이가 날아오는데 생각하고 앉아만 있을 수 있는가? 명령이 떨어지면 움직여야하고 행동해야하니까 나의 소심함도 논리추구도 그때는 잠시 멈췄을 것이다...그러던 것이 해태상사 입사후 우리 박부정을 만나면서 다시 갈등하고 그리고 조정단계를 거치면서..드디어 소심함을 묻고 무조건 '밀어붙여놓고보자주의'로 심각한 변화를 하고, 결과는 나쁘지않았으며..지금에 이르렀지않을까? 아직도 생각이 많고 소심하지만 그래도 때가 되면, 밀어붙여야 하는 경우가 되면, 나는 물불가리지않고 저지르고 본다...좋을 때도 있고 그렇지않을때도 있지만...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울퉁불퉁거리며 살아지는 것 아니겠는가? 하하하 매우 길어졌지요? 나의 이야기를 직설적으로 하게되면 왠지 뻘쭘거리고 변명아닌 변명이 되는 것같아 많이 속상하다...자꾸 '농대' '약자'의 입장을 설명해야하니..언제나 속상하고 자존심 상하게 된다...참고 또 참다가 끝내는 못참고 폭발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누군가 내 자존심에 계속 상처를 주면 그 속상함을 참지못하고 욱하며 폭발한다..주변이 놀래자빠지게 된다..내가 갑자기 헐크로 변하니까...우우으윽. 오늘은 여기까지 중언부언.ㅎㅎㅎ)
(앞서 인사부서와의 축구시합에서 보았듯이, 그는 누구와 경쟁해서 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경쟁에서는, 무조건 우선 이기고 봐야한다 주의였다. 따라서 무슨 핑계를 댄다든가 행동하지않고 머뭇거린다든지 하면 용서하지않는다...회사일을 할때는, 싸움닭처럼 들이대고 밀어붙여야 한다...나는 전형적인 '햄릿스타일'+'논리추구형'=행동우선보다는 생각먼저하고나서형=그의 눈에는 나는 액션은 없고 말만 많은 먹물투성이 또는 행동이 따르지않고 비난비판만 하는 아무쓸모없는 일류대출신먹물. 그에게 내가 처음에 이쁘게 보일 까닭이 없었다.
그와 부딪치면서, 나의 자존심이 긁히면서 나는 논리적 사고 대신 우선 뛰쳐나가며 부딪치고 행동하였다...머뭇거리지않고 우선 밀어붙치고 행동하니 그가 나에게 일단 믿어주었다. 나의 행동에 무슨 숨어있는 불순한 저의가 없으니 그는 계속 신뢰를 보냈고 나와의 관계는 상호무간섭주의로 타협되었다..그런 그의 입장이 간섭을 하지않으니 나에게는 날개를 달아준 것 이상이 되었고, 나는 더욱 '사고먼저'에서 '행동우선'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패턴스타일이 바뀌게 되었고, 그는 더욱더 나에게 신뢰를 보냈으며...우리의 관계는 '선순환'되어 언제나 최고.최선.최대값을 만들어갔다..나는 어느사이, 그의 무대포 공격스타일 덕분으로, 나의 논리추구형.사고먼저 행동나중스타일은, 우선 행동하고나서 사고는 나중에 정리하는 스타일로 변해갔다...나의 단점은 줄어들고 나의 숨어있던 장점이 내잠재능력을 잠깨우게 된 것이었다....그가 굼뜬 나를 자극하여 일들을 멋지게 하게만든 것이었다...그가 의도했든 아니했든 나는 그로 인하여, 내본래의 성격.행동패턴스타일이 바뀌게 되었다...그에게 심심한 감사인사를 드린다.지금 이글을 쓰면서도...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지만 나는 그를 비난할 수 없다..그는 나만큼은 특별히 존중해주고 나의 기를 끝까지, 언제나 살려주었으므로...)
(그와의 운명적 만남은 내가 해태 방콕지사장으로 발령난 1986년 말까지...나의 돌발적인 '항명사태'로 본사에 조기복귀하여 내가 '보직대기상태'때까지...후술..., 공적관계가 계속되었고, 그가 해태에서 퇴임하고 나서도 사적으로 계속되다가, 내가 내 회사 1996년 ‘대평원농상주식회사’를 창업하고, 그가 미국으로 이민가고 나서 소식이 끊어졌다.)
(그는 해태그룹의 해외창구역할을 하는 해태상사를 '종합상사' 수준으로, 최소한 '농산식품사업분야'에서는 어느 종합상사가 일구워낸 사업 이상을 만들어냈던, 나의 표현으로는 '대단한 추진력'의 소유자였다. 일류대학 나온 것도 아니고 영어가 유창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업을 읽어내는 감각과 추진력은 타의 추종이 불허되었다. 최초로, 한국과 태국정부간 한.태 구상무역을 성사시켜 타 종합상사들의 놀라움과 부러움을 사기도 하였다...한.태구상무역은 한국산 비료수출하고 태국산 농산물인 옥수수.타피오카수입하는 것...나는 태국산농산물수입에 크게 기여하여 한.태구상무역이 확대심화되는 데 공헌하였다...비료수출은 아무나 하는 것이었지만, 태국산 농산물을 어떻게 대응구매하느냐가 주요관건이었는데 다행히 그때 내가 맡고있던 농산사업부는 타종합상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 비교우위를 갖고 있엇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아직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태국현지 농산물수출회사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1986년 해태방콕지사장겸 현지법인 Suisindo Development=스위스계열자본과 해태자본의 인도차이나반도 투자회사의 현지법인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재임중 한.태구상무역은 끝물을 달리고 해태본사의 경영권분쟁까지 겹쳐서, 나의 지사장역할은 큰 빛을 보지못하고 큰 어려움에 빠져들게 된다...우리 인생살이는 요동치게 되어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던가?....자세한 내용은 후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