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하고...식품공학? 아니면 제3의 길?
/'복학하고...식품공학? 아니면 제3의 길?
곧 졸업하게 되는데 사회진출은 어떻게 어디로 할 것인가?
식품공학 전공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과감하게 진로를 바꿀 것인가?
군대가기전, 1년을 먼저 졸업한다고 1년을 늦게 졸업한다고 1년 휴학을 하면 그 1년이 그렇게 클까?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하며 1년 휴학을 결정했던 나였다. 1년 늦더라도 제대로 잡힌 방향으로 갈수만 있다면 1년 늦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했던 나였다.(1년을 휴학한 것이 나의 사회생활 시작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1년을 휴학하면서 행정고시 준비를 하다가 복학하면서 바로 운동권학적변동자로 징집되었다....1년을 휴학하므로써 복학하자마자 학적변동자라는 이유를 들어 군대강제징집이 되었으며...1년 늦게 졸업을 하게 되므로해서 마침 그때 ‘종합상사’라는 신세계가 내 앞에 전개되어 제3의 길을 찾던, 나는 급하게 나의 진로로 결정하였는데...이것이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 운명일까? 1년 휴학을 하지않앗다면 결코 만나지못할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이었다.)
이제 다시 행정고시 준비를 할 것인가?
아니면.....다른???
무엇을 어떻게 확실하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복학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경제적으로 힘든 학생신분으로서 뚜렷이 무엇을 결정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난센스였다.
나는 우선, 식품공학공부는 100% 포기할 수는 없고 졸업은 해야하니 전공필수는 공부를 하되, 전공선택을 신청하지않고 대신 농경제학과의 과목들을 선택하여 공부하기로 하였다.
식품공학과 출신이 농경제학 강의를 듣는 진풍경이 처음으로 생기게 되었다.
그때 배운 것이 경제원로. 경제분석1.2, 농산물시장론등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무대뽀’였다. 경제학도도 이해가 쉽지않은 과목들을 비경제학도인 식품공학도가 강의를 들으니 모두가 신기해하고 의아해 하였다.
(휴학하기전, 군대가기전에는 컨닝을 하느니 백지답안을 냈더니 교수들이 F는 주지않고 D를 주어, 전공과목을 거의 모두 D를 받아 8D=8띠를 해서 났다고 허풍까던 때도 모두들 나를 ‘괴짜’내지는 ‘꼴통’쯤 아니면 뭔가 ‘다른’‘특별한’사람으로 여겨주었다. 나는 결코 내가 괴짜거나 꼴통이라고 불리는 데 동의하지않는다. 나야말로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원칙에 충실하여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고, 컨닝을 하는 그들이야말로 순수해야할 학생의 본분을 무시하고 세속의 나쁜 편법을 쓰고 벌써 요령에 물들어버렸는데 왜 내가 괴짜가 되고 그들이 ‘정상’으로 평가되어야 하는가? 나는 도저히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정당한 주장을 하고있는데 왜 내가 비정상이 되고 그들이 정상으로 평가받아야 한단말인가? ‘정상’과 ‘비정상’이 혼돈되거나 아예 가치전도되는 사회를 인정할 수 없었다. 하물며 아직 젊고 순수해야할 학교캠퍼스 아닌가? 어찌 컨닝이 아무런 비판없이 용인될 수 있는가? 사회를 비판하면서 사회의 불공정.불평등을 타파해야한다는 학생들이 컨닝을 하는 자신들은 면죄부를 주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한편으로는 박대위교수의 ‘무역실무’책을 독학으로 공부하면서 혹시 있게될 진로변경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졸업을 얼마 앞두고 치러지는 식품기술사자격증시험을 나는 응시하지않았다.
어쩌면 나의 전공 식품공학에 대한 무언의 마지막 반항 또는 조용한 거절이었다.
배수진이었을까?
원서만 내면 모두가 합격하는 식품기술사 자격을 미리 포기해버린 것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복학생 우선으로 식품대기업 취업추천에 나는 과감히 신청하지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식품공학전공자가 반드시 실험실이나 연구실에 근무하라는 법은 없었다. 식품공학전공자도 기획실이나 영업부서에 얼마든지 환영받고 그렇게 근무하고 있었는데 나는 지레 실험.연구등 식품관련공부하기가 나의 적성과 맞지않는다는 핑계로 식품회사 취업을 마다한 것이었다.)
식품회사 취직을 하지않는다면, 남는 길은 1.행정고시준비 2.행정대학원진학 3.제3의 길이 있었다.
문제는 가정형편이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느냐를 자문하지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내심 행정대학원에 진학하여 행정고시에 필요한 과목을 공부한 다음 행정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희망이었다. 휴학때 그 공부를 했던 것도 나의 깊은 고민끝 일단이었다.
비인기학과인 농대를 벗어나 나의 숨은 꿈을 펼칠 수 있는 것은 ‘고시’가 해방구였다.
그러나 아무리 길이 보인다해도 나에게는 경제적 ‘돈’문제는 언제나 포기를 강요받기 일쑤였다. 실행도 해보기전에 나의 머릿속 계산은 이미 답이 나와 있었다. 사내가 어찌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느냐는 비난이 당연히 나오지만...그런 미리포기에 대한 비난이 죽어도 싫지만 그러나 어찌하랴. 언제나 그런 패턴이 반복되는 것을.
이번에도 마찬가지 패턴. 결론. 1과 2는 나의 경제형편상 불가.
대학원을 가면 그 학비는 누가 부담하며, 당장 취직을 하여 가정형편을 도와야하는데 도저히 생각을 할 수 없는 경우의 수.
거기에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나서는 바로 행정고시에 합격할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셈이 나오지 않는 산수였다.
그래서 당연히 다음은 제3의 길.
그당시 김우중의 대우실업 신화 또는 신선호의 율산신화가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오파상 성공신화. 작은돈으로도 큰기업을 일으킬 수 있다.
어디 ‘종합상사’로 갈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나는 꿈도 꿀 수 없는 길을 찾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그런 꿈은 현실에 존재하지않았다. 그러나 나는 막연하게 그냥 ‘종합상사’에 가보고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역실무’책을 독학하고 있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가?
그것은 또 운명이었을까?
내가 ‘종합상사’에 들어가지않고, 오비(동양맥주)나 롯데, 제일제당, 오리온(동양제과)이나 해태제과에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면 어떻게 내 운명이 달라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