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군대에서,1970-1977

복학하고....농대축전 ‘식품공학과 종합우승’ 그리고 하프마라톤 완주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2. 15. 23:00

/복학하고....농대축전 ‘식품공학과 종합우승’ 그리고 하프마라톤 완주

농대에서는 권농일인 6월10일 전후하여 ‘농대축전’을 해마다 개최한다.

마침 딸기철이기도 하여 농대캠퍼스 주변은 신록과 함께 어우러진 딸기밭은 서울에서도 인기였다.

이때를 중심으로 농대 각과들은 홈커밍데이 또는 페스티벌등 각종 행사를 하곤 하였다.

캠퍼스 주변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정말 잔치가 벌어진 듯 온통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농대 축전중 아무래도 하이라이트는 각종 구기종목의 결승전과 함께 단축마라톤(수원시내의 남문을 반환점)이었다.

 

농대내에서는 식품공학과는 공부만 잘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한국사회의 경제발전추이에 따라 국민들의 식생활 변화에 맞추기 위하여서인지 1968년 식품공학과가 신설되었다. 물론 기존의 농화학과가 분과되는 것이었는데 우리사회의 관심을 반영하듯 제1회인 68학번부터 서울공대의 상위과들과 맞먹는 커트라인이 형성되어 농대내에서는 최고인기학과로 평가되었다. 이는 73학번까지 계속 우수한 고교졸업생들이 입학하게 되었고, 특히 입학후 1학년성적순으로 과배정을 하였던 74학번부터는 농대입학생 500여명중 상위 20등까지 모두가 식품공학과를 지원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그때는 식품공학과 정원이 20명, 현재는 40명)

식품공학과는 공부가 최우선이었고 운동은 다음다음이라고 모두들 평가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내가 복학하고 4학년이 되었을 때는 분위기가 달랐다.

식품공학과 4학년은 74학번이 주축이었는데 이 친구들의 상당수가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남못지않은 수준이었다.

거기에 복학생중 70학번인 나와, 미식축구를 하던 71학번 오상0이 74학번의 빈자리 또는 약한 포지션을 채워주니 모든 구기종목에서 승승장구하였다.

특히 축구결승전이 백미였다. 모든 구기종목중 아무래도 단체경기에서는 축구의 열기가 제일이지않은가.

나의 포지션은 소위 ‘리베로’ 즉 2002년 월드컵에서 홍명보선수가 했던, 공.수의 중심에서 공배급을 하는 주요역할이엇다.

복학생과 재학생의 호흡이 잘맞아 떨어지고 특히 리베로의 역할을 하는 내가 공.수 양쪽에서 물흐르듯 볼배급을 해주니, 축구우승은 식품공학과가 차지하게되었다.

(나는 비록 복학생이지만 체력이 재학생들과 경쟁하여 결코 뒤떨어지지않을 뿐더러 달리기주력이 남보다 월등 빠르니, 전후반을 모두 뛰어도 체력이 조금도 딸리지않고 다른 선수들보다 빨리 달리니 ‘리베로’의 역할로는 딱 안성맞춤이엇다.)

 

다음날의 단축마라톤에서 사단이 나고말앗다.

단축마라톤에서는 복학생들의 참가와 완주하는 복학생들의 숫자에 가산점이 붙어서 복학생들의 참가권유가 빗발쳤다. 그러나 대부분의 복학생들은 여러 이유를 대며 마라톤 참가를 한사코 거절하였다.

식품공학과 복학생 아무도 마라톤 참가를 하지않으므로 후배재학생들이 어제 축구를 뛰었던 나에게 몰려와 간청간청하는 것.

나는 분연코 참가를 결정하였는데 운동장 현장에서 바로 결정하였으므로, 문제는 마라톤을 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않았다.

운동팬츠와 상의는 현장에서 비슷한 싸이즈로 후배의 것을 차용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신발이었다. 나에게 잘 맞는 신발이 없었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가장 비슷한 싸이즈의 신발을 현장에서 바꿔 신고 드디어 단축마라톤에 나서게 되었다.

뛰는 데는 자신이 있는 나는 중간에 포기하지않고 꿋꿋이 완주에 성공하였다.

끝까지 완주하는 복학생은 많지 않았는데 식품공학과 대표선수로서 나는 당당히 가산점의 일부를 얻게 되었고 결국은 식품공학과의 ‘종합우승’에 기여하게 되었다.

그런데....완주를 하고나서 신발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의 발을 보니...아니 이럴쑤가...오른쪽.왼쪽 엄지발가락이 들떠서 피멍이 들어있지않은가!

발톱이 빠져나가는 지경인데도 나는 그걸 모르고,,,아무런 통증도 느끼지않은 채 완주를 하였다니...정말 독하고 독한 녀석이 바로 나였다. 완주하는 복학생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중도포기를 하지않고 끝까지 완주하다니...감투상이 있다면 분명 나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