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1.배꼽티의 유래와 흥부네 수박/박범신
/배꼽티의 유래와 흥부네 수박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선 반라의 그리스 여자들 부조와 조각상을 얼마든 볼 수 있다.
기원전 수백 년부터 그들은 반라의 노출패션에서 앞서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전통은 오늘날의 그리스 여자들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아예 옷을 입지 않는 누드 해변이 그리스에 유난히 많은 것도 우연이 아닐 터이다.
적어도 여름에, 아테네 거리 패션과 근교의 해변 팻션은 노출 정도에서 보면 거의 차이가 없다. 그만큼 노출이 일상화되었다는 것이다.
깊이 파인 끈달린 옷은 기본이고 끈없이 상반신을 반쯤 노출한 여자들도 부지기수다.
상상해보라.
2천5백여 년 전, 세계의 중심이었던 아테네의 거리에 배꼽티와 한쪽 유방을 내놓은 언밸런스 셔츠를 입은 아름다운 여자들이 뽐내듯 활보하는 것을.
하기야 지금의 아테네 여자들도 마찬가지나 다름없다. 유두를 내놓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꼭 싸매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그녀들의 가슴은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가볍게 건드려도 우주적 빅뱅으로 금방 터질 것만 같다.
나는 처음엔 그것을 촌스럽게도 ‘흥부네 수박’이라고 명명했는데 수박처럼 컸지만 수박처럼 딱딱한 것이 아니라 아주 부드럽고 탄력이 넘친다.
셔츠가 다 수용하지 못해 반 이상 노출된 흥부네 수박이 활달한 걸음에 따라 출렁일 때면 마치 큰 파도가 연거푸 밀려오는 듯하다.
다이나믹하고 리드미컬하다.
흥부가 되어 톱질해 켤 것도 없다. 칼끝만 대는 시늉에도 제가 지닌 내부의 팽창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저절로 쫙 갈라지는 물오른 수박들 속엔 또 얼마나 황홀한 금은보화가 꿀물처럼 숨겨져 있겠는가.
그러니 그것은 가난한 흥부네 수박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수박이라 함이 오히려 합당한 명명일 터이다.
그렇다고 아테네의 여자들이 모두 가나안의 수박을 앞세우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여자들은 아담한 조롱박 수준이고 또 어떤 여자들은 나바론의 건포도다.
거리엔 나바론의 건포도와 조롱박과 가나안의 수박이 반쯤 섞여 피차 당당한 노출로 섞여 흐른다. 그런 거리 풍경은 가나안의 수박만이 일방적으로 흐르는 것보다 훨씬 보기 좋다.
그 다양성이 그대로 민주이자 자연이기때문이다.
다시말해 그리스에선 몸 사이즈에 모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사이즈의 획일적인 유행도 물론 없다.
가나안의 수박을 가졌다고 해서 일부러 큰 셔츠를 입어 가리려는 여자도 없고, 나바론의 건포도라고 해서 뽕브라로 사기를 치려 하거나 쟁빚을 내어 생살을 찢고 실리콘주머니를 넣으려 하지도 않는다.
큰 것은 큰 것대로 아름답고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아름답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받아들인다.
젖가슴의 크고 작음, 뚱뚱녀와 쭉쭉빵빵, 이런 식의 외형적 사이즈에 대한 획일적인 편 가르기, 획일적인 유행이란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문화만의 잘못된 한 단면이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그 사랑 때문에 모두 아름답다.
한껏 내놓고 있어도 부끄럽지 않고 뚱뚱하거나 말랐거나 상관하지 않으며, 가슴이 크다고 뽐내거나 작다고 콤플랙스를 느끼거나 하지 않는, 그런 당당함과 자연스러움이 없다면 아무리 균형잡힌 얼굴이라도 미인이랄 수 없다.
참된 미인이 되려면 그 영혼까지도 자연을 닮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보아라. 어디에 피어나든 아름답지 않은 꽃이 있던가.
소외는 빈부 차이나 직급 차이 혹은 남녀 차이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문화의 소외가 더 무섭다.
모든 존재는 다 당당하고 아름답다. 협소한 편가르기와 더러운 획일주의가 더 무섭고 잔인한 소외를 낳는다.
올여름엔 뚱보 처녀들도 아름답고 아랫배 나온 아줌마들도 아름답고, 물론 비키니를 처려입은 날씬한 처녀도 아름답다.
외모지상주의는 존재의 참된 가치를 획일주의적 감옥 속에 몰아넣는 나쁜 습관이다. 외모는 존재의 껍데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