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9.한국 작가라는 운명/박범신
/한국 작가라는 운명
나는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광기의 세계사를 풍향계처럼 반영하면서 이어져 왔다고 본다.
민족상잔의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된 한국전쟁도 속을 들여다보면,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동서체제가 불러온 대리전 양상을 갖고 있었다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6.25 동란과 함께, 실패한 혁명이라고 회자되는 4.19와, 오랜 군부독재를 불러오고 개발 제일주의의 이념을 강요했던 5.16 쿠데타를 예민한 십대의 나이에 겪었다.
어렸을 때 우리집은 가난했다.
그러나 배고픔보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 가난과, 우리 집 가난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정치, 경제의 구조적 불평등 때문에 필연적으로 겪어야 했던 가족 간의 불화와 반목이었다.
그리고 그 불화와 반목이 가족 구성원만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보다 구조적이고 근원적인 세계의 ‘광기’때문이라는 걸 인식하게 된 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다.
이를테면, 동서 냉전체제에서의 강대국들이 추구하는 이기적인 헤게모니 싸움도 그랬고, 박정희 독재정권이 밤낮없이 개인적인 상상력과 존재의 본원적 빛깔에 따른 숨은 꿈들을 제한하는 명분으로 삼았던 반공주의도 그랬고,
재벌 중심 경제개발 정책으로 개인이 가진 노동력의 헌신을 일방적으로 강요한 성장 중심의 구조적 모순도 그랬다.
또한 그 모든 구조적인 모순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적과 적으로 대치해야 했던 분단 조국의 현실과 은밀하고도 강력하게 관계 맺고 있었다.
분단이라는 상황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 사는 칠천만 민족에겐 정치 문제만이 아니라 생활의 문제고, 도덕의 문제고, 상상력의 문제고, 희로애락의 문제였다.
내가 자랄 때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까지도 ‘분단조국’의 상황은 칠천만 우리 민족의 모든 규범과 생활과 문화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학이 무엇인가.
그것은 어느 제단에 바쳐져야 하는 것인가.
문학은 삶보다 위대한 것인가.
세계사적 나와 민족 구성원으로서의 나와 한 예술적 존재로서의 나 사이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시대와 내 소설 사이는 얼마큼 가깝고 또 얼마큼 먼가.
그렇다.
나는 글을 쓰지 않고 지낸 삼 년 동안 작가의 죽음을 선언할 수 밖에 없었던 나의 문제가, 사실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모든 한국 젊은 작가들의 문제였다는 걸 뒤늦게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작가는 절대적 개인인가.
사회역사적 존재로서 개인인가.
한국 작가의 운명은, 조국과 민족이 여전히 분단되어 있기 때문에 부여받은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제 작가들은, 아프리카의 제3세계의 작가들은, 제국주의적 상흔과 세계적 자본의 구조화된 힘이 어떻게 사람과 사람사이를 가르고 반인간화하는지를 냉엄하게 보고 그것에 반역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니 본질적으로 작가는 절대적 개인이며, 우리의 예술적 상상력은 자본이든 체제든 민족이든 그 어떤 명분에 의해서도 억압받을 수 없다는 예술 제일주의의 믿음을 누구보다 깊이 견지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분단조국에서 살아야 하는 한국 작가이기때문에, 세계 문학사에서 이미 폐기처분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문제를, 작가로서 자의식의 주머니에 무겁게 담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운명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고 또 받아들이고 있다.
연애소설을 쓰든 세태소설을 쓰든 판타지를 쓰든, 그런 것은 상관없다.
무엇을 쓰든 간에 모든 한국 작가들의 자의식 속에 원죄처럼 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식민 지배를 거쳐 분단된 지 반세기.
우리는 아직도 식민지배의 상흔을 다 극복하지 못했으며, 현실로 피어리게 남은 분단 상황에 대한 상처와 내적 분열은 더욱더 극복하지 못했다.
감히 말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세계사적으로 특별하고 유례없는 현대 한국작가들의 특별한 운명이다.
역설적으로 이 운명이, 오늘 역동적인 한국 문학의 자산이며, 어떤 면에선 제국주의와의 세계화에 직면해 힘들게 문화의 정체성을 지켜나가야 하는, 오늘의 제3세계, 곧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들의 운명과 맞닿아 있다고 느낀다./2010.5.6.목.노트정리.